소설리스트

남주들의 집착보다 내 탈영이 빠르겠다 129화 (147/233)

“사루비아 양은 다른 부대에서 왔고, 나와 얼굴을 본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혹시 국가에서 감시를 위해 보낸 첩자인가 했는데, 생각해 보니 누가 봐도 이종족인데 그럴 일은 없겠군.”

“국가에서 왜 감시를…. 아.”

중대장이 더 이상 말을 잇지 말라는 듯 험악한 눈을 했기에, 나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중대장이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계속된 죽음으로 아르콘들이 큰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면 안 돼.’

우리가 국가에 괜한 마음을 품고 있다고 간주할 수 있으니, 국경방위군이라는 이 집단은 거듭되는 아르콘들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의 원한을 티 내서는 안 된다.

그런 상황에서 간부의 비극적인 죽음 이야기가 부대에 전해져 내려오고, 그들의 유품까지 보관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면 지금 이 부대의 간부들은 징계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중대장은 내가 처음 말을 꺼냈을 때 그들의 죽음을 일부러 깎아내린 거겠지… 라는 게 내 추측이었다.

“그럼 제가 대대장님을 만나 뵙고 싶습니다.”

“이런 특별 상황이면, 내가 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다.”

내가 그들의 편이라고 생각한 듯, 중대장은 아까와 완전히 달라진 태도로 흔쾌히 허가해 주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난데없이 이 부대의 대대장과 만날 약속을 잡게 되었다. 물론 다른 병사들이라면 대대장을 낯설어하겠지만….

‘난 이미 전 부대 대대장과 면담하는 동안 영창에 갈 위기를 넘긴 적이 있다.’

그에게는 황실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지 않냐고 떠보기까지 했는데, 이 부대의 대대장과 유품 얘기를 하는 것 정도야 어렵지 않았다.

* * *

얼마 뒤, 나는 대대장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대대장실 경력직인 나는 당연히 별로 긴장하지 않은 상태였고.

내가 너무나도 태연한 얼굴로 있으니, 대대장은 조금 미심쩍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다가 본론을 꺼냈다.

“사루비아 양이 과거 전사했던 대위의 자식과 아는 사이라는 건가?”

“네, 그렇습니다.”

“정확히 그의 자식이라는 걸 어떻게 알지?”

“누가 봐도 자식인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얼굴이 닮았지 말입니다.”

“나이는?”

“올해로 스물하나입니다.”

불충분한 증거였지만, 그래도 나이가 같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대대장의 얼굴은 조금 누그러졌다.

“정말 확신할 수 있나?”

“예, 얼굴을 본다면 대대장님도 틀림없이 그렇게 생각하실 겁니다. 그리고….”

대대장은 아르콘이었다. 그건 중대장도 마찬가지였다. 설산 부대가 워낙 죽음의 위기가 잦은 부대인 만큼, 이곳의 간부들은 대부분이 아르콘이었다.

내가 예전에 있었던 클레도어 산악대대의 대대장은 국가에 불어올 새로운 바람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건 설산 대대의 간부들에게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누구보다 극악한 상황에 놓인 이일수록, 그들은 체제 전복을 꾀하게 된다.

중대장이 나를 경계했고, 대대장이 나에게 쉬이 유품을 넘겨주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은 실제로 국가에 무엄한 생각을 품고 있고, 그들이 전사자를 기리며 그들의 유품을 보관한 것도 그 일부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대대장으로부터 유품을 얻어내는 방법 또한 어렵지 않을 것이다. 지금 그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나 또한 가지고 있다고 넌지시 전해 주면 된다.

“대대장님이 이 유품을 가지고 계셨다는 사실은 당연히 비밀을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이 부대의 간부 분들이 위험에 빠지시는 걸 원하지 않습니다.”

“…지금 무슨 의미로 말한 거지?”

“옳은 행동을 하는 분들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으로 말씀드렸습니다.”

대대장의 표정이 싸늘해져서, 나는 순간 몸을 움찔했다. 나와 비교도 되지 않을 연륜을 쌓아 온 그에게서 감당하기 어려운 기운이 느껴졌으니까.

“…소문대로군.”

“예? 잘 못 들었습니다?”

“병사들이 말하던 대로, 만만치 않아….”

…대체 왜 대대장에게까지 저런 소문이 들어간 거지?

내가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 대대장은 표정을 풀더니 자신의 품속으로 손을 넣었다. 곧 그는 내게 펜던트형 목걸이를 내밀었다.

“받게.”

은색 줄로 이어진 동그란 펜던트를 열자 나온 건, 조그마한 말린 꽃 하나였다.

“이게 뭡니까?”

“부대에 전해져 오는 그의 유품이다. 그 사건으로 그 시절 대대장으로 부임했던 중령이 다른 곳으로 발령 나시면서, 그들의 자식에게는 미처 유품을 전해 주지 못하고 가셨지.”

아하, 이렇게 돼서 유품이 누락된 것인가 보다.

“이후 부임한 분이 전해 주려 하셨으나 연락이 닿지 않았고, 그 후로 계속 부대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카론은 연락이 닿지 않는 동안 양부모님의 집에 있다가, 흑마술사의 집으로 끌려가게 된 거일 테고.

“전사할 때 그 대위가 목에 걸고 있던 것인데, 만약 자식을 찾으면 그에게 줘야겠다고 생각했어.”

나는 펜던트 안에 있는 선명한 색의 노란색 꽃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게 그에게 어떤 의미가 있던 물건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게 바로 유품이라는 거지.

“만일 다음에 네가 알고 있다는 그 후임을 만나면, 전해 주도록.”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한테 이걸 믿고 맡기셔도 되는 겁니까?”

오직 얼굴이 닮았다는 말 하나만으로 너무나도 쉽게 유품을 넘겨주는 모습에, 나는 대대장을 흘끔거렸다. 그러자 대대장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태도로 말했다.

“그 후임이 진짜 그들의 아들이라면, 이 펜던트를 통해 무언가를 찾아내겠지.”

‘카론만이 알고 있는 기억이 있는 건가?’

노란 꽃을 통해 알 수 있는 건 없어 보였기에 내가 미심쩍은 얼굴을 하자, 대대장이 다시 지나가는 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오직 허락된 자만이 볼 수 있는 게 있어…. 그게 아니라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물건이니.”

…무슨 소리인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일단 카론에게 이 펜던트에서 보이는 게 있는지 물어봐야겠다.

나는 눈을 깔고 다시 펜던트를 관찰했다. 내가 이곳에서 카론의 부모님에 관련된 소식을 듣고, 그들의 유품까지 전해 줄 수 있게 됐다는 게 참 신기했다.

‘어쩌면 이게 운명일까.’

내가 빡세기로 유명한 설산 대대에 배정된 것도 다 이런 운명을 따라서였…. 아니, XX, 생각해 보니까 또 XX 빡치네?

‘그럼 그냥 카론이 이 부대에 오면 되는 거잖아!’

왜 늘 이런 힘든 일은 내가 도맡게 되는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인생에 마가 낀 게 분명하다!

‘그놈의 운명, XX!’

내가 죽을 운명도 피하고, 알타이르가 죽을 운명도 비껴가게 해 주느라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바로 그렇게 투덜거리던 순간, 나는 깨달았다. 카론이 아닌 내가 이 부대에 배정되어야만 했던 또 다른 이유를.

“대대장님.”

“왜지?”

“나중에 제가 대대장님의 뜻에 반하지 않는 일을 할 때, 대대장님의 도움을 구해도 되겠습니까?”

대대장이 진지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가 저희 모두의 뜻과 일치하는 일을 할 때 말입니다.”

“허….”

대대장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정말 거물이군….”

그 뒤를 이어 그가 할 말은 물론 정해져 있었다.

“…먼저 손을 내밀었으니, 내가 그 손을 잡는 게 마땅하겠지.”

내가 이후 국가 체제 전복에 관해 도움을 요청하면, 들어주겠다는 뜻이었다.

내가 이 부대에 배정되어야만 했던 또 다른 이유, 그건 바로 이곳에 위험한 사상을 가진 간부들이 많기 때문이었다!

예비 반동분자들이 가득한 이 부대에서, 나는 인연을 만들어 둘 필요가 있었다! 어쩌면 그게 바로 내 운명일지도 모른다.

‘나가기면 하면 혁명이다, XX들아!’

결국 나는 오늘도 혁명에 대한 의지를 다지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 * *

작은 마을에서 홀로 우뚝 서 있는 고풍스러운 성.

냉기만 감도는 성의 정원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무채색의 옷을 입고 정원에 홀로 우뚝 서 있는 남자, 윈터가 하늘을 보며 고개를 들었다.

“후우-.”

많이 추워진 날씨 속에서 숨을 내쉬자 그대로 입김이 나왔다. 그 공기 속에서 그는 추위를 유독 잘 타던 여자애 하나를 떠올렸다.

“2년 남았군….”

남들은 미련하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그에게 있어 그 시간은 절대로 길지 않았다. 그가 가진 마음의 크기에 비하면.

똑똑똑-.

그 순간, 누군가가 성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윈터가 성큼성큼 걸어가 문을 열자, 그가 기다리고 있던 얼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알타이르, 유리.”

“오랜만이다.”

“잘 지냈냐, 윈터~?”

각자 손에 선물을 하나씩 든 그의 동기들이 윈터를 찾아온 것이었다.

알타이르는 성을 보자마자 휘파람을 불며 윈터에게 물었다.

“야, 네 마음은 여전하냐?”

“한 번 가지게 된 마음은 절대 변할 리가 없지.”

“에휴~, 역시 그럴 줄 알았다.”

“잡담은 그만하고 본론이나 꺼내.”

알타이르가 윈터에게 시시껄렁한 태도로 말을 거는 동안, 유리는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아 무뚝뚝한 얼굴로 그들을 불렀다. 그제야 윈터와 알타이르도 그녀를 따라 소파에 앉았다.

“그래, 이 문제에 대해서는 역시 논의해 봐야겠지?”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

윈터가 표정 없이 그들이 말을 꺼내기를 기다리자, 알타이르가 옆에 앉은 이들을 둘러보며 그가 이 자리까지 찾아온 이유를 입에 올렸다.

“그럼 이제부터 에이프릴 님이 보내신 스카우트 건에 대해 논의해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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