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의 집착보다 내 탈영이 빠르겠다 127화 (145/233)

“저, 정말 괜찮습니다….”

“그래.”

내가 달래 준다는데 한사코 거절하는 태도가 아무래도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 나는 그녀를 먼저 두고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누가 루나를 찾는다면 찾지 말라고 말해 주기나 해야겠다.

“사루비아.”

“아, 프로스트 님.”

건물 벽에 기대어 어쩐지 멋있어 보이는 자세를 하고 있던 프로스트가 나를 돌아보았다.

“처음 했던 결심은 여전히 유효해?”

“…아.”

이 부대의 후임들과 친해지지 않고, 나도 다가가지 않겠다고 했던 그 말.

“지금은 아닌 것 같습니다.”

…뭐, 이 부대에서는 정말 대충 사리면서 잠만 자다 가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이 부대의 후임들까지 내 후임들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았다.

“이제는 제 후임들입니다.”

“훗, 그럴 줄 알았지.”

“아, 그러셨습니까…?”

내가 방금 한 다짐 말고도, 또 깨달은 사실이 있는데….

‘프로스트, 즐기고 있구나….’

그는 ‘의미심장한 말을 하는 현자’라는 자신의 컨셉을 그 누구보다 즐기는 사람이 분명했다….

역시, 국경방위군에 정상인은 없었던 것이다.

* * *

그들을 내 후임으로 받아들이기로 한 이후, 나는 달라졌다.

어떻게 달라졌냐면….

“아니, 방금 분명 방아쇠를 당겼는데 왜 과녁에 흔적이 없지?! 총을 쐈는데 그 무엇도 맞히지 못한 XX가 있다, 뚜둥?!”

이전에는 말년답게 뒹굴기만 하겠다고 후임들의 훈련에도 관심을 주지 않던 나였지만, 이제 더 적극적으로 그들을 지도하기로 한 것이다.

“아무래도 동체 시력을 기를 필요가 있군. 내가 지금부터 눈밭에 쇠구슬을 던질 테니, 그것을 찾아내도록 한다.”

후임들의 생존율을 높이기 위해, 잠을 희생하면서까지 훈련을 돕는 나, 정말 멋진 선임이다.

“애, 애쉬 님, 살려 주십시오….”

훈련이 고됐는지 일등병 하나가 울먹거리는 눈으로 애쉬에게 도음을 요청했지만.

‘나도 도울 수 없다….’

내 뒤에서 뒷짐을 지고 선 채 고개만 절레절레 젓는 애쉬의 모습에, 후임들은 결국 눈을 번쩍 뜨고 바닥을 뒤질 수밖에 없었다.

“좋아, 이렇게 하면 손도 단련될 수 있겠지. 추위 속에서 손이 얼면 총을 잘 못 쏜단 말이야…. 추위에 강인한 놈들로 길러 내 주마.”

그렇게 나는 후임들의 훈련, 특히 사격 훈련에 집중하여 그들을 굴렸다.

“내가 잘 때 깨우지 말라고 했잖아! 발소리 내지 말라고, XX들아! 지금부터 복도에서 발소리를 내는 놈들은 은신 능력을 키우기 위해 설원에서 숨바꼭질을 시작한다. 물론 잡히는 놈은 눈밭을 구르게 된다.”

당연히 내 평온한 일상생활을 방해하는 놈들을 조지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이전과 달리 상등병들은 내가 내리는 명령을 적극적으로 이행하려고 노력했는데, 물론 그들도 마냥 편한 일만 할 수는 없었다.

“애쉬? 숨바꼭질을 할 때 후임들을 찾아내는 일은 너한테 맡기겠다.”

“아, 알겠습니다….”

내가 이 짬밥에 설원에서 후임들이랑 숨바꼭질이나 하면서 놀아 줘야겠는가?

나는 바깥에서 보내는 시간을 최소화하고 싶었고, 그걸 위해 애쉬는 내가 시키는 대로 열심히 숨바꼭질을 하고 눈밭에 쇠구슬을 던져 주어야 했다.

“네가 후임들을 늦게 찾아낼수록, 너부터 뒤지는 줄 알아라.”

“…꼭 일 분만에 모든 놈들을 찾아오겠습니다.”

애쉬를 다루는 일도 아주 쉬웠고 말이다.

그리고 노만 역시 애쉬를 보조하여 후임들이 명중시킨 과녁의 개수를 열심히 세고, 복도에서 발소리를 내며 걸어 다닌 놈들을 열심히 잡아내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그나마 가장 편한 일을 하게 된 건 루나였다.

“루나, 너는 그냥 지금까지 하던 일이나 하렴.”

“예, 감사합니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이전에 루나가 가지고 있던 슬픔을 엿봐서? 루나가 몇 안 되는 여자 후임 중 하나여서?

아니, 전부 틀렸다. 내가 루나에게 편한 일을 시키는 이유는….

‘이름이 마음에 들잖아.’

처음에 이름이 마음에 든다고 한 건 진심이었다. 정말 그 이유뿐이었다.

* * *

“…저, 정말 이게 맞는 걸까?”

밖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후임들을 열심히 찾아내고 난 뒤 애쉬가 한 말이었다. 뺨을 부르트게 만드는 매서운 바람 속에서 머리카락도 보이지 않도록 숨은 후임들을 찾느라, 그는 그대로 눈사람으로 변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정말 이 훈련을 따르는 게 의미 있는 일이겠냐고….”

“그, 글쎄 말입니다…. 하지만 사루비아 님이 강한 분인 건 맞는 것 같으니, 사루비아 님께서 지시하시는 훈련을 따라야 할 것 같긴 합니다….”

동상처럼 복도에 서서 발소리를 내는 자들을 감시하며 노만이 말했다.

그는 그 일을 하며 소리에 지나치게 민감해져서, 이제 무언가가 귀에서 윙윙거리는 소리를 내도 그것이 무슨 벌레인지 구별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들은 부러운 눈으로 루나를 쳐다봤다. 고작 이름이 마음에 든다는 이유만으로 사루비아의 총애를 꿰찬 루나는 이제 거의 사루비아를 신봉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사루비아 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모두 옳아. 틀림없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 거야.”

“…사루비아 님께서 강의 얼음을 깨고 물고기를 잡아 오라고 하신다면?”

“그 물고기가 건강에 좋은가 보지.”

“쟤는 이미 눈이 맛이 갔어….”

애쉬가 혀를 쯧쯧 차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안타깝게도, 얼마 안 가 루나의 말은 사실로 밝혀졌다. 사루비아가 지시했던 일들이 실제로 그들에게 도움이 된 것이었다.

“애쉬 님, 실제로 사격 정확도가 이전보다 올랐습니다!”

“애쉬, 후임들의 은신 능력이 발전해서 이제 다들 마물한테 들키지 않는데? 사루비아 님의 훈련 덕에 다들 소리도 내지 않고 걸어다니게 된 데다 모습을 숨기는 데도 능해졌거든.”

“애쉬 님! 후임들이 튼튼해져서 추위 속에서도 몸이 얼지 않습니다! 자체적으로 열을 발산하고 있습니다!”

“마, 말도 안 돼….”

실제로 사루비아의 훈련들이 효과가 있었음이 증명될수록 애쉬의 얼굴은 거무죽죽해졌다.

왜냐하면 후임들이 강해진다면 분명 그에게는 좋은 일이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애쉬, 오늘 숨바꼭질은 여섯 명이다.”

“크흡, 알겠습니다!”

그는 앞으로도 이 고생은 계속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정말 비극적인 일이었다….

* * *

‘하. 나는 정말 완벽한 선임이야.’

상등병들에게 내 훈련의 결과로 후임들의 전반적인 전투 능력이 크게 발전했다는 보고를 들은 후, 나는 뿌듯한 얼굴로 숙소에 누워 다리를 꼬았다.

내가 후임들을 강인하게 만들다니! 앞으로도 그들을 강하게 키우기 위해, 새로운 훈련들을 더 고안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흐뭇하게 웃던 그때, 누군가가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들어오라며 허락을 내리자 일등병 세 명이 얼굴을 삐죽 내밀었다.

“사루비아 님, 혹시 이불 세 개 더 덮으시겠습니까?”

“뭐? 추가로 난 거야?”

갑자기 그들이 자발적으로 이불을 가져다주는 모습을 보며, 나는 미심쩍은 얼굴을 했다. 물자가 부족해서 늘 찢어진 이불도 꿰매 쓰는 이곳에 남는 물자가 있다고?

“아뇨, 그냥 저희가 다른 병사들의 이불을 나눠 쓰기로 했습니다!”

“…그럼 춥지 않겠어?”

“저희는 추위 속에서도 열을 뿜어내는 몸을 가지게 되어서 말입니다, 하하!”

참 패기 어린 말이었다. 얼마 안 가 춥다고 오들오들 떨며 자신들의 결정을 후회할 게 분명했지만, 이불을 더 덮을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으므로 나는 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래, 이건 내가 덮을게. 너희도 더 강해져라.”

“감사합니다!”

문이 닫히고, 그들이 밖으로 나감과 동시에 신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좋아! 좀 더 따뜻해지면 덜 예민해져서 이상한 훈련들을 안 시키겠지?”

“우리 목도리도 양보하자!”

“그거 좋다, 훈련병들도 설득해서 뭐 더 양보할 게 없냐고 하자!”

“어휴, 저 미친X…. 저 화를 감당할 바엔 그냥 추위를 이겨 내는 게 낫지….”

“그 애쉬 님도 사루비아 님 앞에선 꼼짝을 못하더라. 반면 루나 님은 사루비아 님의 눈에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잘 지내시잖아. 역시 사루비아 님 라인을 타서 총애를 받는 수밖에 없어.”

‘…저 XX들.’

지금 내 뒷담화를 까?

“이것들이 발소리를 내지 말라고 했더니 말소리를 내?!”

안 되겠다. 이제부터는 대화 없이 눈빛만으로 소통하는 훈련도 추가한다!

* * *

제대 D-618일.

“후훗, 잘 지내고 있는 얼굴인데.”

“아, 프로스트 님.”

이불을 돌돌 감은 채 복도로 기어 나왔을 때, 막 자신의 숙소에서 나온 듯한 프로스트가 벽에 기댄 채로 내게 손을 들어 보였다.

“뭐, 이제 저도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처음에 부대에 배정받았을 때는 프로스트가 내게 인정받기 어려울 거라는 말을 해 줬었는데.

“프로스트 님은 얼마나 걸리셨습니까?”

“무엇이 말이지?”

“인정받는 데 걸린 시간 말입니다.”

“큽, 나는 큰 시간을 쏟지 않았지. 난 여기랑 가까운 부대 출신이니까.”

…그래 놓고 나한테는 자신도 인정받기 어려웠던 척한 거야? XX 빡치는군.

“그래도 사루비아 너도 꽤 뛰어나더군. 내 예상보다 훨씬 빠른 시간 안에 인정받았어.”

옆에서 프로스트가 오글거리는 멘트로 나를 띄워 줬지만, 여전히 얄밉기는 마찬가지였다.

내가 속이 부글부글 끓는 표정으로 프로스트를 보자, 그는 자신에 대한 내 살의를 알아차린 듯 후훗 웃으며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이곳의 일원들은 좀 예민하더군. 아무래도 다른 부대보다 훨씬 죽음을 코앞에 두고 있으니.”

“아, 예….”

“그래서 이곳에 배치받는 자들은 이종족의 피가 짙은 이들이지. 뭐, 생긴 것만 봐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지만 말이다.”

그의 말대로, 이곳에 배치받았던 아르콘들은 내가 있던 부대의 병사들에 비해 뛰어난 신체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단지 이들이 더 힘든 훈련을 해서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타고난 신체 능력 자체가 달랐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마냥 무작위로 배치되기만 하는 건 아니라는 소리구나.

“이곳에선 죽음이 얼마나 흔한 일인지, 심지어 간부들마저 영면에 들기도 하더군.”

“아, 그렇습니까?”

간혹 마물 토벌의 지휘를 위해 함께 나선 간부들이 죽는 일이 있기는 하지만, 프로스트가 저렇게 말할 정도면 이 부대에서는 꽤 잦은 일인가 보다.

‘…나 다시 데드 플래그 밟은 건가?’

지휘사관이 되었다고 너무 방심하고 있었나? 지금보다 훈련을 더 늘려야 하나?

내가 심각한 얼굴로 고민을 시작했을 때, 프로스트는 내 어두운 표정이 여전히 자신을 죽여 버리겠다는 신호라고 받아들인 듯했다. 그는 내 주의를 돌리기 위해 재빨리 다시 입을 놀리며 간부들의 사망에 대해 주절대기 시작했다.

“몇십 년 전이었나…. 과거 우리 중대의 중대장과 옆 중대의 중대장이 부부였는데, 마물 토벌에서 함께 사망한 사건이 있었지. 그 사건 이후로 간부들은 다 이곳에 지원하기를 피하게 되었다고 하더군. 참 비극적인 일이다. 아마 신도 눈물을 흘릴 거야.”

“세상에….”

붙어 있는 중대의 중대장 둘이 부부인 것도 신기한데, 그들이 함께 사망하기까지 하다니. 그의 말대로 정말 비극적인 일이기는 했다.

“그분들은 밖에 아들도 하나 있었다는데,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됐는지 소식을 모른다지. 뭐, 전해져 내려오는 부대 괴담 같은 이야기이니 그것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후훗.”

“정말 충격적이지 말입니다.”

프로스트의 말에 건성으로 대꾸하며, 나는 다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제대하고 나서도 데드 루트가 XX 많잖아.’

만약 내가 누군가와 가정을 꾸려 제국민들 틈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려 한다면, 제국민들의 공포 속에서 소외될 거고. 아이를 낳아도 그 아이가 훗날 국경방위군으로 끌려가는 고통을 겪어야만 하고.

그렇다고 해서 함께 국경방위군에 말뚝을 박는다면, 국가가 기억해 주지 않는 허망한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고.

국가는 제대만 하면 행복이 시작될 것처럼 말한다지만, 국경방위군 이후의 아르콘의 삶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들은 모두 어딘가로 사라졌다.

아르콘에게는 무엇을 선택해도 썩 좋지 않은 선택지들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혁명을 제외하고는 다 별로였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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