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의 집착보다 내 탈영이 빠르겠다 126화 (144/233)

* * *

D-698일.

“사루비아 님, 요즘 불편하신 거 없습니까…?”

“없는데?”

“하하, 알겠습니다….”

확실하다. 요즘 나를 대하는 부대원들의 태도가 예전과 달라진 것 같다.

아무래도 마물 토벌에서 내가 총을 좀 막 쏘았던 이후부터인 것 같은데, 아마 내 능력을 인정해서 그런 거겠지?

그들은 이전과 달리 어떻게든 나한테 먼저 말을 붙여 보려 했고, 더 나아가 나를 챙겨 주려고 했다.

“아오, XX! 얼어 뒤지겠네!”

“야! 사루비아 님께서 추우시다잖아!”

“빨리 이불 더 안 가지고 와?!”

“사루비아 님! 이 목도리를 전부 두르시면 따뜻해지실 겁니다!”

…덕분에 요즘 좀 안 춥긴 하니, 일단 긍정적인 일이겠지, 뭐.

특히 나를 잘 챙겨 주는 건 세 명의 상등병들 중 가장 기수가 낮은 노만이었는데, 그는 후임들에게 내가 불편하지 않도록 대신 명령을 내렸다.

내가 숙소에 심드렁하게 누운 채 그들이 가져다주는 이불을 겹겹이 덮고 있을 때, 이불을 나르던 일등병 한 명이 불퉁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니, 이게 추우면 얼마나 춥다고.”

…흠, 저것 참 흥미로운 발언이군.

“야, 너는 별로 안 춥냐?”

“예? 아, 뭐…. 저는 여기서 오래 지내서 말입니다.”

일등병은 내가 그를 지적할 줄 몰랐던 듯 눈썹을 움찔했지만, 곧 그는 다시 삐딱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정작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하는 건 노만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당장 후임 교육을 시키겠습니다! 야, 이 XX가! 당장 안 따라와?!”

“아냐, 너를 번거롭게 만들 수는 없지.”

나에게 무례하게 군 놈인데 처분을 다른 사람의 손에 넘길 수는 없다.

“안 춥다니까 마침 잘됐다. 그렇게 안 추우면 눈사람을 좀 만들어 와.”

“…잘 못 들었습니다?”

“눈사람! 눈사람을 만들라고! 내가 눈사람이 보고 싶단 말이야!!”

“사, 사루비아 님, 죄송합니다! 제가 후임 관리를 제대로 시키겠습니다!”

일등병이 노만에 의해 질질 끌려가며 숙소 문이 닫히는 가운데, 나는 그 너머의 일등병을 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눈사람! 눈사람을 만들어!”

* * *

“하하, 사루비아 님.”

“왜?”

여느 때와 같이 이불에 파묻혀 아퀼라의 편지에 대한 답장을 쓰고 있을 때, 루나가 웃는 얼굴로 숙소 안으로 들어왔다.

“아니, 오늘 과일이 좀 남아서 챙겨 드릴까 해서 말입니다.”

“두고 가.”

루나가 내 앞에 둔 접시 위에는 복숭아 한 쪽이 놓여 있었다. 늘 시들시들한 채소만 있는 곳에 저런 과일은 귀한 것이었기에, 나는 루나를 좀 좋게 봐주기로 했다. 그래, 처음부터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니까?

접시를 내려놓고도 루나는 자리를 떠나는 대신, 헤헤 웃는 얼굴로 내 옆에 앉았다. 그녀의 눈치를 보니 나와 친분을 쌓고 싶은 모양이라, 나는 할 말이 있냐는 눈으로 루나를 쳐다봤다.

“하하, 그냥 궁금한 게 있는데 질문드려도 됩니까?”

“어디 한번 해 보시지.”

“…예? 아, 예…. 그, 그냥 제대하시면 뭐 하실지 궁금해서 말입니다, 하하.”

나왔다. 단골 질문, ‘제대하면 뭐 하실 겁니까’.

저건 국경방위군에서 아이스 브레이킹을 위해 가장 적절한 질문이었다. 처음 만난 부대원들끼리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이었고, 서로 친해지고 싶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도 했다. 이를테면 ‘마이X 먹을래?’ 같은 것이었다.

“흐음, 제대하면….”

제대하면 일단 누군가랑 결혼해서 가족을 만들겠지?

이 세계에 정착할 가정이 있다는 건 부러운 일이었기에, 이전부터 늘 생각해 온 것이었다.

그리고 집을 살 거고, 예쁜 가구를 놓고, 예쁜 옷을 입을 거고, 그리고….

“반역?”

“…예?!”

“음, 아냐.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것’이라고 하자. 뭐, 어쨌든 그런 걸 할 거라고나 할까?”

그 말에 루나의 얼굴이 잿빛이 되더니,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하하, 아, 알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시길 바라겠습니다….”

* * *

요즘 노만과 루나가 나를 찾는 횟수가 뜸하길래 포기한 줄 알았는데, 그들은 여전히 나와 친해지고 싶어 하는 듯했다.

왜냐하면 원래 나를 가장 무시하던 애쉬까지 이제 나에게 달라붙기 시작했으니까.

“안녕하십니까, 사루비아 님.”

“뭐야?”

나는 조심스럽게 노크를 하고 들어온 상등병을 위아래로 흩었다. 애쉬가 손에 신문을 든 채 공손하게 내 앞에 서 있었다.

“중대장님께 가져다 드렸던 저번 주자 신문인데, 혹시 관심 있으신가 해서 말입니다.”

“신문? 줘 봐.”

이 폐쇄된 곳에서 바깥소식을 알 방법은 도통 없었기에, 나는 그가 가져다준 신문이 상당히 달가웠다. 내가 신문을 그의 손에서 홱 집어 들자 애쉬의 얼굴이 밝아졌다.

“읽으시면서 뭐 궁금하신 게 있으시다면, 제가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중대장님이 혼잣말로 실망하시는 걸 종종 들었습니다.”

이 부대의 중대장도 역시 실망을 참 잘하는 중대장이군….

아니, 어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나는 신문을 천천히 넘기며 지난주의 소식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사실 대부분은 나와 큰 관련이 없어 보이는 것이었다. 한 상단이 대성공을 거뒀다든지, 모 공작 가문이 모 백작 가문과 약혼을 맺었다든지, 현상 수배범이 잡혔다든지 등의 이야기였다.

그러다가, 나는 눈에 들어오는 뉴스 하나를 발견했다.

“흑마술 수색 특수군, 전년 대비 흑마법사 체포량 3배 급증. 성공적인 개혁의 결과로 실적 개선?”

내가 그 제목을 읊조리자마자, 애쉬가 곧장 아는 체를 했다.

“아, 제가 들었는데 말입니다. 흑마술 수색 특수군이 개혁된 이후로 이번에 분위기가 많이 자유로워졌다고 합니다.”

“오…. 그, 그래?”

“혹시 궁금하십니까?”

애쉬는 본격적으로 설명을 시작하려는 것 같았지만, 나는 도무지 그의 말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에이프릴….’

그 지긋지긋한 여자의 이름이 자꾸 머릿속에 떠올랐으니까.

“간부가 물갈이되면서 지금 그곳은 거의 독립적인 단체로 분리되었고, 계급에 큰 의미가 없이 수평적인 조직으로 개혁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악!”

“사, 사루비아 님?”

“XX, 그 얘기 좀 하지 마! 궁금하지 않아! 궁금하지 않다고!”

“죄, 죄송합니다!”

“지긋지긋하다, 진짜!”

* * *

“다들 진행 상황은 어때?”

세 명의 상등병들이 모이자, 루나가 가장 먼저 말을 꺼냈다. 그러자 노만이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저어 보였다.

“실패입니다. 제가 사루비아 님 앞에서 후임들을 잘 관리하는 모습을 보여 드리려고 했는데, 사루비아 님이 저보다 훨씬 잘하셨습니다….”

“하긴, 정말 획기적인 방법이었어.”

“아니, 대체 눈사람을 만들어 오라는 건 또 뭐야? 이제 후임들이 눈사람만 봐도 어떤 자식이 또 당했나 싶어서 벌벌 떨더라.”

그다음으로는 루나가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물론 나도 실패다. 사루비아 님에게 미래에 대한 계획 같은 건… 절대 물어보지 마.”

“대체 그게 뭐길래 그러시는 겁니까?”

“모르는 게 나아. 알면 다친다….”

루나가 진짜로 공포에 질린 얼굴이었기에, 노만과 애쉬는 더 캐묻지 않았다. 대신 이번에는 애쉬가 자신의 상황을 보고했다.

“흑마술 수색 특수군에 관심이 있어 보이시길래 그쪽 얘기를 꺼냈더니, 갑자기 설명을 잘 듣다가 발작하시더라. 정말 미친 것 같았어.”

“아, 그거 말고도 사루비아 님은 금발만 보면 발작하시더라. 왜지?”

“대체 분노하시는 포인트가 뭔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이제 그들의 얼굴은 처음 만났을 때보다 어두워져 있었다.

이대로 사루비아와 친해지는 계획은 영영 실패로 돌아가는 것이란 말인가?

* * *

제대 D-685일.

“아오, XX. 얼어 죽겠네, 진짜.”

평소처럼 숙소에서 뒹굴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나는 추위를 헤치고 연병장으로 걸어 나갔다. 내가 아까 지시한 대로 후임이 사람 크기만큼 거대한 눈사람을 만들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숨을 쉴 때마다 새하얀 입김이 나올 정도로 추웠지만, 나는 후임을 제대로 조져 놓겠다는 일념 하에 성큼성큼 걸어갔다.

“…루나?”

내가 도착한 연병장에 있던 것은 내가 지시를 내렸던 후임이 아니라, 상등병 루나였다.

긴 금발을 늘어뜨린 루나가 휙 나를 돌아보았다. 달빛 아래에서 그녀의 노란 눈동자가 금빛으로 빛났다. 이곳에서 나를 마주할 줄 몰랐던 듯, 루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 사루비아 님. 무슨 일이십니까?”

“눈사람 좀 확인하러.”

그녀의 왼쪽에 있던 거대한 눈사람을 가리키며 그렇게 말하니, 루나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아…. 사루비아 님이 지시하셨습니까…?”

“그래. 어떤 XX가 시끄럽게 나 자는데 숙소 앞에서 떠들잖아.”

“하하….”

눈사람을 보는 루나의 시선에는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태도가 담겨 있었지만, 나는 그것을 지적하지 않고 아량을 베풀어 주기로 했다.

“넌 여기서 뭐 하고 있었냐?”

여기서 제대할 때쯤이면 나도 루나처럼 추위에 익숙해지게 될까? 이 밤중에 혼자 바깥 공기나 쐬고 있을 정도로?

“아, 그냥….”

루나가 어쩐지 아련한 얼굴로 나를 보며 말했다.

“선임들 생각을 좀 하고 있었습니다.”

“선임들? …아.”

얼마 전 마물 토벌 중 있었던 사고로 인해, 현재 알파 소대에 남은 건 세 명의 상등병들이 고작이다.

루나와 애쉬는 396기이고, 노만은 397기이다. 원래는 그 위로도 몇 명의 상등병들이 더 있었는데, 그들은 마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하고 만 것이다.

“예…. 한 달 전 오늘이었는데,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아서 나왔습니다.”

루나는 자신의 무릎을 힘주어 배 쪽으로 더욱 끌어안았다.

나는 그들을 알지 못하니 차마 뭐라 위로해 주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 있었더니, 오히려 그 상황에 더욱 용기를 얻은 듯 루나는 말을 시작했다.

“다들 참 좋은 분들이셨습니다. 저는 많은 도움을 받기도 했고.”

“그래.”

“그런데 그렇게 죽었다는 게 말이 됩니까….”

허공을 응시하는 루나는 세상을 모두 잃은 듯 허망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다들 6년째 버텨 오고 있었는데… 6년을 버티고도 어떻게 죽을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찬바람으로 인해 붉게 변해 있는 뺨 위로, 투명한 눈물 한 줄기가 흘렀다. 달빛을 받은 눈물이 진주처럼 빛났다.

“…죄송합니다.”

“응?”

“저희가 초기에는 사루비아 님을 배척하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혼란스러워서 그랬습니다….”

아무래도 그녀는 나에게서 답을 듣고 싶기보다는 그저 자신의 마음을 누군가에게 말하면서 정리하고 싶은 듯 보였다. 밖에서 온 이방인, 그녀와 얼마 시간을 지내지 않은 선임인 내가 그 대상이 된 거겠지.

“저희 부대 사망률이 워낙 높으니 다른 부대 출신 사람들은 만만해서 그러는 것도 있고…. 또 저희 부대 선임들은 죽어서 진급도 못 하게 됐는데 무사히 진급해서 오신 게 기분이 이상하기도 했고….”

“아.”

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프로스트가 조언을 해 준 게 떠올랐다. 프로스트도 인정받기 위해 나와 같은 과정을 겪었을까?

“다들 그렇게 죽을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마음도 안 줬을 겁니다. 처음부터 벽을 치고 굴었을 텐데….”

자신이 마음을 준 사람이 죽어서 괴로워하는 루나의 모습을 보며, 나는 이시나를 생각했다.

원작에서 이시나는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은 덕분에 사람의 죽음에 괴로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가 이시나처럼 자신의 감정을 통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마침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내 앞에서 오열하는 루나의 모습을 보며, 나는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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