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데없이 자신의 이름이 마음에 안 든다는 소리부터 들었던 애쉬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좀 성격 나쁜 여자 같긴 해.”
“그래도 본인이 조용히 있다 가겠다고 했으니, 딱히 신경 쓸 필요는 없는 거 아닙니까?”
그들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상등병, 노만이 진지한 얼굴로 대꾸했다.
노만까지 포함해 이 자리에 있는 세 명이 알파 소대의 상등병 전부였다.
“그건 그렇지.”
“게다가 생긴 게 어째 영….”
한 떨기의 청초한 꽃 같았던 사루비아의 모습을 떠올리며 노만이 고개를 기울였다. 동식물도 얼어붙게 만드는 이 설산 부대에는 꽃도 피지 않는지라, 그런 화려한 색을 본 건 오랜만이었다.
“맞아. 별 기대는 안 되긴 했어.”
“그 정도면 아르콘의 피가 강하게 섞였을 수도 있잖아.”
“하지만 눈빛도 순해 보였지 말입니다.”
그들은 새로 온 지휘사관 사루비아가 어떤 사람일지 각자의 의견을 내놓았지만, 별로 긍정적인 종류의 것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그들은 사루비아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유치하게 그녀를 괴롭힌다든가 그녀와 기 싸움을 해 볼 생각은 없었다. 이 극악한 환경에서 살아남기도 바쁜데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소모하는 건 멍청한 짓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단지, 사루비아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쏟지 않을 예정이었다.
* * *
‘기분 탓인가?’
아니, 기분 탓일 리가 없다.
이 부대의 병사들은 나를 무시하고 있다.
“너, 너무 추운데 이불 더 없어?”
“없습니다.”
“아, 응….”
내가 먼저 말을 걸면 저렇게 단답으로 대꾸해서 나를 무안하게 만든다. 내가 더 무언가를 얘기하려고 하면 할 일이 있어 바쁘다면 쌩하니 사라져 버리고.
“뭐야, 보급품 나온 거 왜 보고 안 했어?”
“저번에 노크했는데 대답이 없으시길래.”
“아니, 그러면 좀 문을 열고 들어와서 깨워 보란 말이야.”
그들은 나한테 먼저 말을 걸거나 친해질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나도 적당히 지내다 가려고 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대화가 되지 않을 정도면 좀 불편하다.
가뜩이나 추워서 힘든데 그 속에서 묵언수행까지 하자니 점점 답답한 기분이었다.
“후우….”
숙소의 공기가 퀴퀴한 것 같아 건물 밖으로 잠시 나온 나는, 뼛속까지 파고드는 시린 공기에 몸을 바르르 떨었다. 분명히 두터운 외투를 입었는데도 이가 달달 떨려 왔다.
“XX, 안 되겠다….”
그냥 숙소의 퀴퀴한 공기를 즐기는 편이 훨씬 나을 것 같았다.
외투를 어떻게든 여며 보며 숙소 안으로 들어가려던 나는 익숙한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쳤다. 나를 무시하는 이 부대의 병사들 중 한 명인 상등병 애쉬였다.
‘애쉬가 여기 실세인 것 같았지.’
세 명의 상등병 중 기수가 더 높은 쪽은 애쉬와 루나인데, 대체로 애쉬가 더 자기주장이 강하고 루나는 애쉬의 말을 들어주는 편인 것 같았다. 군대에서 몇 년 구르다 보면 사람의 관상을 보는 법까지 익히기 마련이다.
애쉬는 딱히 나에게 악의를 품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으나, 상등병 중에서도 나를 가장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사람인 건 분명했다.
“에휴….”
그렇기에 한숨을 내쉬며 숙소 안으로 들어가려던 내 눈에, 그의 손에 들린 상자가 보였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건 목도리였다.
“뭐야, 웬 목도리?”
반갑게 느껴지는 마음에 내가 그렇게 묻자, 애쉬는 내 쪽을 흘끗 쳐다보더니 대꾸했다.
“보급품입니다.”
“지금 가져가도 돼?”
“신병들부터 지급해 준 뒤에 드리겠습니다. 규율상 그렇게 해야 돼서.”
…물론 애쉬의 말대로 신병들부터 보급품을 챙겨 줘야 하는 건 맞았다.
하지만 보통은 융통성을 발휘하여 고참들을 먼저 챙겨 주는 게 일반적인 관례이기도 했다….
예전 부대였냐면 내가 얼어 죽게 생겼는데 너부터 뒤지고 싶냐며 윽박지를 나였지만, 추워서 그런지 그럴 기력도 없어서 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나중에 두고 봐라….’
물론 두고 본다고 해서 내가 그들에게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씩씩거리며 건물 안으로 들어가던 그때, 저 멀리서 걸어오는 프로스트가 보였다. 그는 나를 보고 입꼬리를 올려 웃더니 한쪽 손을 흔들었다.
“사루비아.”
프로스트는 아무도 나와 대화해 주지 않는 이 부대에서 그나마 나와 가끔 대화를 주고받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후임들이 나를 무시하는 것을 방관하면서도, 동조하지는 않고 가끔 내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비록 나는 프로스트와 별로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아, 그를 회피하고 있었지만.
“후후, 거슬리는 게 있는 얼굴인데?”
“예….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물론 네 속마음 정도는 이미 알고 있지, 푸흡….”
심지어 그의 목에 둘려 있는 그것은 이번에 보급품으로 나온 목도리처럼 보여서 나는 더 기분이 나빠졌다.
이 XX, 프로스트에게는 융통성을 발휘할 줄 알면서 나한테는 규율 운운해? 자기가 윈터도 아니면서! 북부대공처럼 생기지도 않았으면서!
내가 분한 눈빛을 숨기지 않자, 프로스트는 그런 나에게 넌지시 물었다.
“여전히 적응은 어려운 모양이지?”
“적응할 마음도 사라졌지 말입니다.”
이제는 나도 치사해서 이 부대의 후임들과 말을 트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래? 정말 계속 남처럼 지내게?”
“뭐, 그러지 않겠습니까?”
내가 대충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하자, 프로스트가 다시 묘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글쎄…. 인생은 대충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법이더라고, 후훗.”
…프로스트는 왜 자꾸 현자처럼 의미심장한 말을 중얼거리는 거지? 오글거리긴 했지만, 자꾸 나한테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 같아서 좀 거슬린다.
그리고 보통 저런 말은 나중에 다 사실로 확인되고 이유가 밝혀지는 법이어서 좀 불길했다.
* * *
『사루비아에게
사루비아, 잘 지내고 있니? 새 부대에 도착했다는 네 편지를 어제 받았어. 이 편지가 도착했을 때쯤이면 그 부대에서 보낸 시간이 몇 주는 됐겠네.
하필 네가 설산 대대에 배정받게 됐다니 걱정이야. 감기 걸리지 않도록 옷 따뜻하게 입고 다녀. 목이 따뜻하면 온몸이 따뜻해지니까 목도리 꼭 하고, 단추 끝까지 잘 잠그고, 손이 트면 따가우니까 달팽이 종류의 마물이 나타났을 때 점액질이라도 모아 놓으면 도움이 될 거야.
2년이란 시간이 길게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지금처럼 하루하루를 잘 보낸다면 금방 지나갈 거야. 나는 네가 잘 해낼 거라고 믿어. 옛날에 그랬듯, 어려운 게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
네가 그곳에서도 잘 지내기를 바라며, 이시나 보냄』
『이시나 님께
얼어 죽을 것 같습니다. 춥습니다. 엄청 춥습니다. 목도리도 너무 늦게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시나 님은 제가 잘 해낼 거라고 말씀하셨지만, 저는 이곳에 적응하기 힘든 것 같습니다….
사루비아 올림』
『사루비아에게
사루비아, 네 편지를 받고 조금 걱정이 됐지만, 그래도 너는 금방 적응할 거라고 믿어. 너는 굉장히 적응력이 빠른 편이니까.
사실 내가 걱정하고 있는 건 네 적응이 아니야.
그 부대의 후임들이 사루비아 너에게 적응할 수 있을까…? 그들이 좀 걱정되네….
그래도 여전히 사루비아 너를 응원하며, 이시나 보냄』
“아니, 당연히 나를 걱정해야 하는 거 아냐?!”
이시나의 편지를 읽은 후 나는 씩씩대며 외쳤다.
뭐? 후임들이 나한테 적응하지 못할까 봐 걱정돼?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이시나의 답장을 받은 뒤 서러워져서, 나는 이번엔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아퀼라아아….”
이시나의 생각과 달리, 나는 여전히 이 부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부대는 미쳤다.
아니, 이 산 자체가 미쳤다. 나를 얼려 죽일 생각인 게 틀림없다. 쿨민트아이스민간인78기보다 더 쿨하고 민트하고 아이시했다.
시간이 지나면 이 추위에 적응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나는 여전히 매일매일 추웠다! 심지어 그 상황에서 애쉬는 나한테 목도리도 늦게 줬고!
물론 입대한 뒤로 처음으로 나태한 삶을 보내는 것만큼은 만족스럽긴 했다.
아침에 밍기적거리며 일어나, 밥 먹고 다시 자기. 점심 먹고 경계 근무 서고, 다시 자기. 저녁 먹고 씻고, 아퀼라가 써 준 편지를 읽으며 자리에서 뒹굴다가 다시 자기. 정말 잠, 잠, 잠뿐이었다.
날씨가 하도 추운지라 저절로 잠이 늘었다. 숙소 안에 감도는 냉기를 막기 위해 나는 창문을 꽁꽁 틀어막고 자리에 이불을 여러 겹 깐 후 이불을 두 장 덮고 잠에 들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추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처음에 이 부대에서 잠이 올 때에는 체온이 떨어져서 가사 상태에 빠지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정신 차려! 이거 아포칼립스야! 잠들면 안 돼, 잠들면 죽어!” 이따위 대사를 외치며 버텨봤지만 결국 수마를 이기지 못하고 잠들어 버렸지.
하지만 꿀잠을 자고 일어난 후, 나는 좀 춥긴 하지만 이곳에서 잠이 든다고 해서 죽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도 매일매일 그렇게 추위와 싸워 가며 잠에 들 때마다 나는 아퀼라가 보고 싶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가 내 옆에 있었다면 이 추위에서 나를 구원해 줬을 텐데.
게다가 나는 외로웠다.
나도 날 냉대하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주지 않을 거라 다짐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낯선 부대에 와서 대화할 사람마저 없는 건 꽤 비참한 기분이다.
아퀼라가 내게 매일 한 장씩 써 준 편지는 그러한 상황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하루에 한 장씩 그것을 뜯어보며 아퀼라의 이름을 부르짖고는 했다.
특히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이곳에 온 첫날 뜯어본 편지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사루비아에게
사루비아, 새 부대에 잘 도착했어?
그곳은 환경도 낯설겠지만, 새로운 사람들도 너를 기다리고 있겠지. 그래서 네가 긴장하진 않을까 걱정이야.
하지만 사루비아, 다 괜찮아. 달라진 건 없어.
나는 여전히 이곳에서 너를 기다리며 네 생각을 하고 있어. 이 년 동안 잠깐 헤어져 있을 뿐, 우리는 다시 만날 거야.
네 세계는 달라지지 않았어. 불안해하지 않아도 괜찮아.』
‘미친 자식….’
처음 그 편지를 읽었을 때, 나는 편지를 가슴에 묻으며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정확히 어떤 포인트에서 불안감을 느끼는지, 아퀼라가 알고 있는 것이 너무나도 감동적이었으니까.
그래서 그건 내가 제일 좋아하는 편지였고, 내가 몇 번씩 다시 읽는 편지이기도 했다.
‘탈영하고 싶다, XX….’
그렇게 나를 잘 알아주는 아퀼라가 지금 내 옆에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니 새삼스럽게 다시 탈영의 욕구가 들었다.
나는 어떻게든 탈영을 참아 보기 위해, 아퀼라의 편지 중 오늘 자의 봉투를 얼른 뜯었다. 자기 전에 아껴 읽으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안 될 것 같다.
『사루비아, 이제 거기서 지낸 지 일주일이 되었겠네.
부대 적응은 잘했어? 넌 어딜 가도 잘할 거야.
그리고 네가 아직 적응하지 못했더라도, 남은 시간은 많으니까 괜찮아.』
나를 위로해 주려는 편지를 읽으며 나는 마음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가, 그 아래에 이어지는 문장에서 숨을 멈췄다.
『너는 강하지만, 새로 간 부대에 있는 무기에도 적응하는 걸 잊지 마. 특히 총기류는 보급품의 종류가 다를 수도 있으니까.』
‘무기에 적응하라고?’
사실 그동안 경계 근무를 설 때, 나는 남들처럼 대충 검을 들었다. 이 부대에 있는 총기를 새로 잡아 보는 것도 귀찮았고, 어차피 검으로도 충분히 나를 지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곧 정기 마물 토벌이 다가오는데, 아퀼라의 말대로 총기를 제대로 연습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다가 방심해서 지휘사관 때 죽을 수는 없지.’
그래, XX!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남았는데!
하마터면 이 추위 때문에 정신 줄을 놓고 나태하게만 굴 뻔했다.
내 목숨을 연명해 주는 데 도움을 준 아퀼라에게 고마워하며, 나는 벌떡 일어나 훈련장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