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의 집착보다 내 탈영이 빠르겠다 122화 (140/233)

“아퀼라, 카론을 잘 부탁해….”

“걱정 마, 사루비아. 열심히 연습할게.”

“사루비아 님! 자, 잘 지내십시오…!”

그러나 나에게 인사하던 카론의 눈에서 옅은 눈물이 흐르고 있었기에, 결국 나는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카론과 포옹했다.

“내가 먼저 제대하고 기다릴 테니까 그때 꼭 만나자, 카론.”

“예…!”

카론과도 마지막 인사를 마친 후, 나는 숨을 들이마시며 내 앞에 만들어진 길을 쳐다봤다.

이미 감마 소대의 선임 한 명이 제대를 위해 이 길을 지나갔고, 이제 나와 블루, 데미안이 진급을 위해 길을 걸을 차례였다.

내 뒤에서는 아퀼라가 서서 나를 배웅해 주고 있었다.

“후우….”

“사루비아 님께 경례!”

높게 들린 검들이 내게로 길을 만들어 주었다.

내가 새로 시작할 부대로 연결되는 길이었다. 동시에 클레도어 산악대대에서의 마지막이었다.

* * *

돌이 가득한 길을 지날 때마다 마차가 덜컹거리며 튀었다.

나는 설산 대대로 이동하기 위해 수레를 타고 산을 내려와 마차로 갈아탄 뒤 한참이나 이동하고 있었는데, 역시 마차의 승차감도 썩 좋지는 않았다. 나는 이전 세계의 교통수단이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설산 대대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몸이 점점 으스스 떨려 오는 기분이었다.

실제로 기온이 급강하하고 있는 듯 숨을 쉴 때마다 입김이 나왔다. 나는 얇은 군복을 최대한 목 끝까지 잠그며 어떻게든 추위를 막아 보려 애썼다.

“이제 내리십시오!”

“예.”

그리고 마침내 마차에서 내렸을 때, 내 눈앞에 있는 건 얼음으로 뒤덮인 산이었다.

앞으로 2년간 내가 생활하게 될 부대가 위치한 곳이었다.

#15. 말년에는 정말 몸을 사리려고 했는데

제대 D-729일.

추위로 인해 땅이 꽁꽁 얼어 있는 이 산은 수레를 타고 올라갈 수 없었다. 결국 나는 나를 이곳까지 인도해 준 운전병으로부터 지팡이 두 개를 받고 산을 올라가야만 했다.

지팡이를 언 땅에 쿡쿡 박으며 올라가자니, 내가 이제 하다 하다 설산까지 정복해야 하는가에 대한 자괴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국경방위군 중에서도 설산 대대는 힘들기로 악명이 자자한 부대였다.

추운 기후는 말할 것도 없고, 그로 인해 땅은 늘 얼어 있었는데 그 위에서 구르며 훈련을 하는 건 최악이었으며, 추위 탓에 물도 자주 얼어 버리고는 하기 때문에 단수될 때도 있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이 산의 가장 큰 문제점은….

‘하늘에서 쓰레기가 내린다!’

예전 부대에 있을 때 비가 내렸다면, 이곳은 쓰레기 같은 눈이 펑펑 쏟아지는 것이다! 우린 부대에 쌓인 눈을 치우기 위해 개고생을 해야 하겠지….

이 산이 이토록 추운 이유는 한랭 건조한 기단이 어쩌고저쩌고 했는데, 어쨌든 그건 중요한 사실이 아니니 대충 흘려들었다.

…그래도 이렇게 추우면 호수나 계곡도 얼어 있을 거고, 이 산에서는 수영 훈련 같은 건 안 하겠군. 불행 중 다행이었다.

마침내 내가 배치된 부대로 보이는 곳이 저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다시 산을 올랐다. 아퀼라가 내게 써 준 편지까지 챙겼더니 가방이 두 개라 유독 산을 오르는 일이 힘들었다.

내가 한 건물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그곳을 지나는 병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위아래로 살피더니 물었다.

“아, 오늘 새로 오신 지휘사관 분이십니까?”

“예, 맞습니다.”

“중대장실은 이쪽에 있습니다.”

그는 나를 중대장실로 이끌어 주었고, 나는 그의 뒤를 따라 걸으며 이 부대에서의 내 생활에 대해 계획을 짰다.

나는 절대 로산처럼 괜히 후임들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에이프릴처럼 후임들의 일에 간섭하지도 않을 거고.

그렇다면 윈터처럼 모범적으로 일을 척척 해내는 깔끔한 선임이 되려는 건가 하면 또 그것도 아니었다. 내가 생각하는 모범적인 지휘사관은 바로….

‘타로!’

비록 부대에 온 뒤 늘 사건 사고만 터져서 고생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늘 자신의 숙소에 누워 손 하나 깜짝 안 하던 그의 모습은 이상적인 지휘사관이라 할 수 있다.

부대 꼴이 어떻게 되든 말든, 나는 얌전히 몸을 사리며 말년을 보낼 것이다. 원래 말년에는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하라는 말이 있으니까. 이곳에서는 떨어지는 눈을 조심해야 하겠지.

똑똑똑-!

“오늘 288중대 알파 소대로 새로 배정받은 지휘사관입니다.”

“아, 그래. 들어오도록.”

허락이 떨어지고, 나는 긴장을 유지한 채 문을 열고 들어갔다. 중대장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내 부대 생활이 달라지니 처음 만난 자리에서 미리 파악해 두어야 했다.

‘일단 평범해 보이는군.’

그는 굉장히 평범한 국경방위군의 중대장1처럼 보였지만, 아직 속은 어떨지 모른다. 내가 딱딱한 표정으로 그를 슬쩍 살필 때, 그가 내게 다가오더니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름이 어떻게 되지?”

“사루비아입니다.”

“그래, 사루비아 양. 앞으로 나를 실망시키지 않고 부대 생활을 잘 꾸려나가도록.”

‘…뭐지?’

“얼마 전 부대에서 사고가 있어서 부대원들에게 몹시 실망했으나, 사루비아 양은 군 내 무사고를 유지하는 데 힘써 주길 바라네.”

…이 중대장이 어떤 사람인지 굳이 새로 파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자신의 할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군.’

그는 다른 평범한 중대장들처럼 자신의 할 일 ‘실망’을 자주 하는 사람이었다….

뭐, 이전 중대장처럼 대하면 되겠지.

* * *

이후, 나는 알파 소대로 이동했다. 새로 배정받은 소대의 이름도 이전과 똑같이 알파 소대라니 친근감이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중대장은 알파 소대의 지휘사관에게 나를 인도하도록 시켰는데, 그는 자신의 이름을 ‘프로스트’라고 소개했다. 정말 설산 부대에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어디서 왔지?”

“클레도어 산악대대에서 왔습니다.”

“아, 산악대대…. 그래, 어디인지 알겠군, 후훗.”

이상한 소리를 내며 프로스트가 웃었다.

“그곳에 비하면 여기는 훨씬 힘들 거야. 말도 안 되게 춥거든. 외지인은 감히 버티지 못하고 굴복하고 말 정도로 말이지….”

‘…뭐지? 왜 저렇게 말을 오글거리게 하는 거지?’

하긴, 국경방위군에 뭐 이상한 사람이 한둘이겠는가. 나는 대충 그의 장단을 맞춰 주기로 했다.

“예, 정말 추운 것 같습니다.”

“후훗, 아마 너에게는 외투가 필요할 거다. 그건 그나마 이 악마 같은 추위를 버틸 수 있게 해주지. 가서 하나 지급받도록.”

프로스트는 두꺼운 남색 코트 같은 것을 입고 있었는데, 설산 대대 병사들이 입는 외투인 것 같았다. 하긴 이곳에서는 이 얇은 군복만으로 버티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리고 이 부대의 병사들은… 다들 기준이 높아.”

“예?”

“지내다 보면 알게 되겠지. 네가 그 기준을 넘겨 시험에 통과할 수 있을지.”

그가 내게 한 말은 의미심장했지만, 일단 나는 굳이 되묻지 않기로 했다. 그의 말대로 지내다 보면 저 말의 의미를 알게 될 테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프로스트랑은 최대한 얘기하지 말아야겠다.’

난 저렇게 오글거리는 타입에는 항마력이 없었다….

소대에 도착한 뒤 그는 내 인사를 위해 병사들을 불러 모았다.

“자, 모두 집합하도록.”

잠시 후 병사들이 모여들자 나는 천천히 그들의 모습을 살폈다.

신기하게도 이곳의 병사들은 내가 있던 곳에 비해 전체적으로 피부가 하얬고 좀 더 체격이 컸다. 추운 곳에서 지내다 보니 저절로 몸이 그렇게 변한 것 같았다.

“반갑다, 나는 사루비아다.”

이전에 지휘사관들이 내 앞에서 했던 말을 내가 하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지만, 나는 냉철해 보이려고 노력하며 말을 이었다.

“2년 동안 조용히 있다 가고 싶다. 이 부대에 적응하는 데 여러분들도 많은 도움을 줬으면 좋겠고, 앞으로 잘 지낼 수 있었으면 좋겠군. 이상.”

짝짝짝-!

그 말에 병사들이 기계적으로 작은 박수를 쳤지만, 어쩐지 그들의 표정에 떠오른 건 묘한 떨떠름함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표정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무시하고 있군.’

하긴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럴 법도 하다. 자신들은 빡세기로 소문이 난 부대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며 강인하게 단련되어 왔다.

그런데 지휘사관이라고 온 나는 비교적 편한 부대 출신인 데다 외모도 만만해 보이는 것이다. 그런 내가 자신들의 선임이 된다면 탐탁지 않을 만도 하다.

프로스트가 조금 전 내게 한 말이 이런 의미였을 것이다. 이곳의 병사들은 나를 인정해 주지 않을 거라고.

뭐, 18중대의 나였다면 조금이라도 나를 무시하는 놈들의 기를 어떻게 꺾어 놓을까 고민하고 있었겠지만….

‘말년인데 얌전히 사리자.’

왠지 딱히 의욕이 들지 않았다.

이 부대에는 이시나나, 아퀼라나, 카론이나, 베니나… 어쨌든 내가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은 전부 없다고 생각하니 더욱 무기력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날카로운 눈빛을 그냥 넘긴 채, 무던하게 반응하기로 했다.

* * *

“이곳에서 지내시면 됩니다.”

소대의 상등병들 중 하나가 내게 개인 숙소를 안내해 주었다. 지휘사관으로 진급해서 비록 좁아터지긴 했지만 이렇게 개인 숙소를 쓸 수 있게 되었으니 참 기쁜 일이었다.

나는 나를 안내해 준 상등병의 얼굴을 흘끗 보았다. 회색 머리에 회색 눈. 피로하게 생긴 인상의 남자였다.

“화장실은 어디지?”

“왼쪽 복도에 있습니다.”

나는 내가 지낼 숙소의 문을 슬쩍 열어 보았다가 그 안에서 냉기가 훅 밀려오기에 놀라 움찔하며 문을 닫았다.

“뭐야, 왜 이렇게 추워?”

“원래 설산 대대는 늘 이렇습니다. 다른 곳에서 지내다 오셨으니 잘 모르시겠지만.”

‘…이 XX 태도가 건방진데.’

아니다…. 빡치긴 하지만 괜히 피곤한 일을 만들지 말고 참아야 한다….

“이름이 뭐지?”

“애쉬입니다.”

“흠, 마음에 안 드는 이름이군.”

“예? 뭐, 뭐라고 하셨습니까?”

“뭐야? 나는 혼잣말도 못 해?”

나는 애쉬에게 이만 물러가라고 손을 휘적거리며, 숙소 안으로 들어왔다.

‘이 정도면 후임들에게 무난하게 대해 주고 있는 거겠지.’

앞으로 이 부대에서는 소리도 지르지 않고, 멱살도 잡지 않을 것이다. 대신 지금처럼 후임들에게 유하게 대해 주도록 노력해 봐야겠다.

* * *

“새로 온 지휘사관은 어떤 것 같냐?”

“모르겠어. 좀 이상해.”

애쉬가 한 질문에, 긴 금발과 금색 눈을 가진 그의 동기 루나가 답했다. 그들은 이 부대에서 가장 기수가 높은 상등병들이었다.

루나는 조금 전 인사를 하러 갔을 때 사루비아가 보인 태도를 떠올렸다.

“뭐야? 아오, 난 금발이 싫어….”

“사, 사루비아 님?”

“아, 그래. 너는 이름이 뭐지?”

“루나입니다.”

“루나? 이름은 마음에 드네.”

자신의 머리 색을 보고는 대번에 인상을 팍 찌푸리더니, ‘루나’라는 이름을 듣고는 진심으로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나는 새로 온 지휘사관이 좀 미친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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