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의 집착보다 내 탈영이 빠르겠다 120화 (138/233)

* * *

제대 D-775일.

오늘은 바로 내가 대대장을 보러 가기로 한 날이었다! 그에게 내 소원을 말하러 가는 날이라는 뜻이다!

중대장으로부터 통행 허가증을 받은 후 17중대로 가는 길은 평소라면 멀게만 느껴졌겠지만, 내가 원하는 정보를 얻으러 간다고 생각하니 유난히 발걸음이 가벼웠다,

17중대에 도착하여 대대 본부 건물로 들어간 후, 나는 대대장실 앞에서 노크했다.

똑똑-.

“충성. 18중대 알파 소대 소속 상등병 사루비아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아, 그래. 들어오게.”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소파에 인자한 얼굴로 앉아 있는 대대장이 나를 반겼다.

“그래, 우리 사루비아 양이군. 아주 우수한 병사였지.”

그가 자신의 앞에 앉으라며 손짓했기에, 나는 조심스럽게 소파에 앉았다. 의무실 침대랑은 비교도 안 되게 푹신했다.

“자, 한 잔 들게.”

대대장이 건네주는 따뜻한 차 한 잔을 홀짝이며, 나는 슬쩍 그의 얼굴을 살폈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회색 머리카락, 카리스마 있어 보이는 두꺼운 눈썹과 깊은 눈매, 싸움의 여파인지 턱 쪽에 나 있는 흉터….

지금까지 부대에서 만났던 장교들 중 나는 새로 온 이 대대장에게 가장 큰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최근에 일이 많았는데, 수고했네. 사루비아 양도 유격 훈련은 처음이었을 텐데 힘들었겠어. 거기다 갑자기 사고가 발생해서 국경 보수까지 해야 했고.”

“아닙니다.”

“허허, 나도 그 나이 때는 하루하루가 참 원망스러웠지. 내가 왜 이런 존재로 태어나서 이렇게 고생해야 하는지.”

내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대대장은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때의 나는 내가 이렇게 대대장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할 거야, 하하….”

뭔가 질문을 해야 할 타이밍이어서, 나는 눈치 빠르게 먼저 말을 붙였다.

“대대장님은 왜 군대에 남기로 하신 겁니까?”

“글쎄, 어느 날 이 삶의 가치를 깨달았다고나 할까…. 내가 병사일 때 어느 날 갑자기, 호승심이 생기는 거야. 마물들을 모두 베어 버리고 싶어졌지….”

공감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나는 경청하는 척 괜히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그때 이종족의 본능이 발동한 걸지도 모르지. 마물과 싸우기 위해 진화해 온 존재 말이야. 그래서 나는 이 부대에 남아서 마물과의 싸움을 이어 가고 싶었고, 무엇보다 다른 어린 병사들을 지켜 주고 싶었어.”

“아….”

“자네도 알겠지만, 가끔 위에서는 병사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기도 하잖아.”

대대장이 한쪽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나는 차마 그에 뭐라 답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하하 웃었다.

“이번 유격 훈련도 사실 병사들을 무리하게 고생시키는 것 같아 참 미안하네. 다음에는 이런 훈련이 잡히지 않도록 노력해 보지.”

“감사합니다.”

내가 예의 바른 어조로 대답하자, 그제야 대대장은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을 떠올린 듯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말했다.

“어쩌다 보니 이야기가 딴 길로 샜군. 자, 그래서 우리 사루비아 양이 원하는 건 뭐지?”

“예, 제가 원하는 건….”

경계 근무 휴가니 뭐니 하는 건 필요 없다. 나한테 필요한 건 이 세계에 대한 정보였다.

“제가 원하는 책들이 중대 자료실에 들어왔으면 좋겠습니다.”

“아, 읽고 싶은 책들이 있는 거군!”

갑자기 나를 보는 대대장의 눈빛이 돌변했는데, 꼭 기특한 아이를 보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래, 그의 눈에는 군대에 와서까지 열심히 자기 계발을 하는 훌륭한 병사로 보이겠지.

“무슨 책이 필요한 거지?”

“저는 제국의 역사에 관한 책들이 읽고 싶습니다. 아, 그리고 마물에 관한 책들도 더 필요합니다.”

“그래, 마물을 아는 건 우리에게 중요한 일이겠지. 역사를 아는 것도 좋고. 정말 이것뿐인가?”

내가 말한 ‘소원’이라는 게 너무 별거 아닌 일들이긴 한지라, 대대장은 이걸로 정말 만족하냐는 듯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물론 내가 고작 그런 책들을 원해서 대대장을 독대하려고 노력한 건 아니었다. 저런 책들은 그냥 작업할 때 행보관에게 적당히 건의 사항을 넣는 것만으로도 받을 수 있었을 테니까.

그러나 나는 내가 원하는 책이 무엇인지,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흘리지 않고 대대장에게만 말할 필요가 있었다.

나에게 필요한 건 ‘책’이었지만, 마물이나 제국의 역사가 담긴 일반적인 책을 원하는 건 아니었다.

내가 원하는 건 비올렛의 도움을 받으면서까지 ‘몰래 읽어야 할 책’. 국경방위군에서는 결코 허락되지 않는 금서. 이를테면….

“대대장님, 저는 제국 이전의 아르콘의 삶에 관한 책이 읽고 싶습니다.”

이건 완전한 도박이었다.

공식적인 단어인 ‘이종족’이 아닌, 제국에서 금기시되어 우리끼리만 은밀하게 쓰던 ‘아르콘’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

그리고 ‘제국 이전의 아르콘의 삶’에 관해 알고 싶다는 욕심을 드러낸 것.

내가 이 말을 꺼내자마자, 대대장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아까 나에게 보여 주던 인자한 할아버지 같은 얼굴은 온데간데없었고, 그의 눈빛에서는 오랜 시간 전장에서 구른 자다운 살기까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 눈빛에 주눅 들지 않으려 오히려 허리를 더욱 꼿꼿하게 폈다.

“사루비아 양은… 지금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말을 하고 있는지 아나?”

“예, 알고 있습니다.”

“금지된 단어를 사용한 일로 인해 내가 징계를 내릴 수 있다는 것도?”

“예, 그것도 압니다.”

내가 꿋꿋한 태도를 유지하며 덧붙여 말했다.

“하지만 대대장님이 그러시지 않을 거라는 사실도 압니다.”

“…어째서지?”

“유격 훈련에 대해 말씀하실 때도 그렇고, 제국에 대해 생각이 많아 보이셨습니다.”

대대장은 처음 부임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제국의 명보다 우리 병사들이 더 중요하다’라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물론 그런 태도는 그저 입바른 소리일 수도 있겠지만….

‘대대장은 원작에서도 그랬어.’

원작에서 제이슨이 홧김에 아돌브 제국 망하라는 말을 내뱉었을 때 대대장이 처벌을 하지 않고 지나갔던 일이 그 예시이다.

즉, 대부분의 아르콘들이 그렇듯 대대장도 아돌브 제국에 반감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알고 있는 정보가 더 많은 만큼 나보다 더욱 싫어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지.

그의 심리를 정확히 꿰뚫는 내 말에 대대장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그렇지.”

이제 우리 사이에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서로가 이 제국에 반감을 품고 있음을 알지만, 그 누구도 함부로 나설 수는 없다.

“그렇다면 사루비아 양은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 거지? 제국 이전의 아르콘의 삶을 앎으로써, 무얼 하고 싶은 거지?”

“저는 변화를 원합니다.”

“무엇을?”

“모든 걸 말입니다.”

“…하하하!”

대대장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눈물을 닦아내며 당돌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젊은 피군.”

이번에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니, 마침내 그는 내가 원하던 대답을 입 밖으로 꺼냈다.

“그래, 사루비아 양이 원하는 책들을 반입하도록 하지. 단, 그 책을 중대 자료실에 둘 수는 없어.”

“예.”

“내 방에 둘 테니, 시간이 날 때 나와 면담을 하는 것처럼 말해서 통행증을 받아 놓고는 오도록.”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유격 훈련을 거쳐, 소원권을 얻어내고 이 자리에 오기까지 얼마나 길었던가….

나 자신, 여주력 +100.

* * *

그 후로, 나는 대대장이 말했던 것처럼 가끔 일이 있는 것처럼 대대 본부에 방문하고는 했다.

왔다 갔다 하는 시간으로 인해 내 모든 자유 시간을 써 버려야 했지만 전혀 아깝지는 않았다.

대대장실에 방문했을 때 가끔 대대장이 일이 있어 자리를 비운 순간도 있었는데, 그럴 때 나를 도와준 것이 바로 비올렛이었다.

‘역시, 사람은 다 어딘가 쓸 곳이 있다니까.’

내기에서 패배했기에 내 말을 따르도록 약속한 비올렛은 내가 대대장실에 들어가려 할 때 망을 봐주었다. 내가 아무도 없는 대대장실에서 혼자 책을 읽고 있다 한들 대대장은 뭐라 하지 않겠지만, 다른 간부에게 걸리면 일이 복잡해질 수 있었으므로.

“책을 읽으며 자기 계발을 하시는 겁니까? 크윽, 역시 독서를 해야 다양한 편법을 익힐 수 있군…!”

비올렛은 나를 만날 때마다 이상한 오해를 하는 것 같긴 했지만, 나는 그냥 그녀를 무시하고 책에만 집중했다.

‘국경 너머는 땅 자체가 다르구나.’

다양한 책을 읽으며, 나는 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국경 너머의 땅에는 화려한 색깔을 가진 동식물이 많이 살고 있었다. 아르콘 중 화려한 외양을 가진 이가 많은 이유도 그것과 연관되어 있었다.

지금의 내 머리색은 제국민들 사이에서는 아주 눈에 띄지만, 국경 너머의 땅에서는 그저 화려한 동식물 사이에 핀 평범한 꽃처럼 보이는 것이다.

『마력이 존재하는 땅에서는 온갖 마법적인 것들이 튀어나온다.

이종족은 선천적으로 강화되어 있는 신체와 내재된 오러 사용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마법적인 존재이다.

마물들은 괴물 같은 외양과 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탄생한 마법적인 존재이다.』

‘마력이 존재하는 땅.’

책의 내용에 따르자면, 국경 너머에는 마법과도 같은 힘이 존재한다는 모양이다. 이종족과 마물들은 그 힘을 바탕으로 국경 너머에서 공존하고 있었고. 동식물의 외양이 화려한 이유도 그 때문이겠지.

‘그럼 대체 마물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건 언제부터지?’

그 현상이 아르콘을 제국에게 지배받도록 만들었는데, 정작 그 원인이 뭔지는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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