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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집착보다 내 탈영이 빠르겠다 119화 (137/233)

* * *

가스트 떼를 해결하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훈련병 시절 달달 외웠듯이, 가스트는 불에 약하니까! 그래서 원작에서 아퀼라가 달린을 구해 줄 수 있었…. 아오, 빡쳐.

어쨌든 아퀼라가 검에 불을 두르자마자 가스트 떼는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아퀼라는 곧장 그들에게로 몸을 날려 전부 베어 버릴 기세였으나, 그의 상처가 걱정되었기에 나는 그에게 움직이지 말라고 한 후 총을 쐈다.

내가 아무리 공격한다 한들 불 때문에 가스트 떼는 이쪽으로 다가오지도 못하니, 우리는 안전하게 가스트 떼를 해치울 수 있었다.

“비올렛, 기다려라.”

바닥에 쓰러진 마물의 시신 일부를 도려내며 뺨에 피가 튀었지만, 내 머릿속은 비올렛의 코를 눌러 줄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승부 중독자, 이제 나한테 승부를 그만 걸겠지?

“동굴은 어떻게 빠져나가지?”

“괜찮아, 사루비아. 내가 무너뜨릴 수 있어.”

아퀼라가 엉망으로 다친 몸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서서 돌을 무너뜨리려 하기에 내가 그를 말리려던 바로 그 순간.

와르릉- 쾅-!

갑자기 무너지는 돌에 나는 그쪽을 쳐다봤다. 그리고 입을 떡 벌린 채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후임들과 눈을 마주쳤다.

“사루비아 님!”

뒤에 있는 후임들이 자리에 멈춰 서 있을 때, 카론은 총알같이 내게로 튀어 와 울먹거리는 눈으로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어디 다친 데는 없으십니까?!”

“그건 아퀼라한테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

머리가 좀 헝클어지고 만 나에 비해 옷 곳곳이 찢어지고 뺨에까지 생채기가 나 있는 아퀼라는 누가 봐도 심각한 몰골이었다.

내가 머쓱한 얼굴로 아퀼라를 가리키자, 카론이 기계적인 태도로 물었다.

“저런. 참 안타깝습니다. 괜찮으십니까.”

“…그냥 사루비아나 신경 써라.”

“예!”

…쟤네 사이좋은 거 아니었나? 사이가 좋다고 하기에는 좀 애매한데…?

얼떨떨한 기분이었지만 일단 카론을 다독여 주며, 나는 어쩐지 슬금슬금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후임들을 쳐다봤다.

“참 빨리도 왔네.”

“사루비아 님.”

베니가 예리한 눈으로 바닥에 쓰러진 가스트 떼를 살폈다.

“두 분이서 전부 처리하셨습니까?”

“응. 아퀼라가 불 속성 오러를 쓰니까.”

“아, 이해했습니다.”

베니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두 분을 구하겠다고 후임들이 엄청 노력했습니다.”

“그랬어?”

“패티랑 매티가 돌을 무너뜨리는 데 도움을 주고, 달린이 동굴 입구에서 솟아오르려던 마물들을 처리했습니다.”

지옥에서 올라온 고문관인 그들이 이렇게까지 성장하다니!

“이야~, 너희 많이 늘었는데?”

기특한 기분이 되어 내가 감동적인 눈빛으로 그들을 쳐다봤더니, 어쩐지 달린이 몸을 움찔했다.

“아, 아닙니다….”

“왜? 훌륭한데.”

“아직 저는 사루비아 님을 따라가려면 많이 먼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빛이 가스트 떼의 시체에 꽂혀 있었다. 음, 막상 우리가 너무 멀쩡해 보이니 기분이 좀 그런가 보군.

하지만 개똥도 쓸 곳은 있다더니, 나는 패티매티달린 세트의 성장에 정말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저들을 성장시킨 건 내 인생 최대의 성과였다.

* * *

시간이 지나 마물을 어느 정도 해치웠다는 판단이 들었을 때, 부대원들에게 집합을 알리는 호루라기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동안 부상이 큰 아퀼라는 먼저 의무관을 보러 가 있었고, 상대적으로 작은 부상을 입은 나는 간단한 처치를 받은 뒤 산 입구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잠시 후, 포대 자루를 들고 이쪽으로 올라오는 비올렛의 모습을 보며 나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사루비아 님! 승부의 결과를 확인해 봅시다!”

비올렛이 열정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보라빛 눈으로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자루를 열었다. 그 안에서 수많은 마물들의 일부 조각이 떨어졌다. 비늘, 꼬리, 갈기 같은 것들이었다.

주목할 만한 점은, 그것들의 크기가 모두 커다랬다는 것이었다.

“비올렛, 너 큰 마물들을 잡았나 보네?”

“예! 어쩌다 보니 큰 마물들만 만나게 돼서 말입니다. 2급 마물도 여럿 섞여 있습니다!”

비올렛이 자부심이 넘치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의미심장하게 빙그레 웃어 보였다.

잠시 후, 머드펫과 가스트의 시신 일부가 와르르 떨어졌다. 족히 오십 개는 될 법한 그것들을 보며 비올렛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많을 수가….”

“떼거지로 몰려 있는 마물을 사냥하면 적은 힘으로도 많은 수를 해치울 수 있지.”

“크윽! 왜 무리 지어 다니는 마물을 생각하지 못한 거지?!”

비올렛의 자신의 머리를 움켜쥐며 혼잣말을 하다가, 결국 나를 보며 무릎을 턱 꿇었다.

“크윽-! 승부는 승부! 결과에 승복하겠습니다!”

“결과에 승복하다니, 좋은 태도이지 말입니다.”

우리를 지켜보던 산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로 산체스랑 잘 맞는 것 같은데.’

왜 진작 그와 붙여 놓을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의문이다. 산체스와 비올렛이 둘이 알아서 시합한다면 우리 중대의 후임들과 저 중대의 후임들 모두가 편안해질 것 같은데….

어쨌든, 나는 그녀를 보며 의기양양한 어조로 말을 시작했다.

“내가 원하는 건….”

“예!”

“단지 나랑 친하게 지내 주는 거다.”

“…잘 못 들었습니다?”

“아니, 네가 들은 그대로다. 그냥 내가 너희 중대에 볼일이 있어서 갔을 때 얼굴을 볼 정도의 사이가 되자는 거지.”

물론 진짜 순수한 친교 활동을 원하는 건 아니었다. 나중에 ‘친구’로서 도움을 좀 많이 받고 싶다는 거지.

그러나 그 사실을 숨기며 오직 친분만을 원하는 것처럼 내가 말을 맺었더니, 갑자기 비올렛의 눈에 번뜩이는 빛이 감돌았다.

“정말 감명받았습니다!”

“…으응?”

“후훗! 사루비아 님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정말 훌륭한 자세입니다. 저도 비올렛 님의 태도를 본받겠습니다.”

심지어 산체스까지 그렇게 말했기에, 나는 조금 착잡해졌다…. 뭐지? 산체스가 둘?

나도 이제 베니처럼 ‘나만의 산체스’를 얻게 된 건가?

그렇게 다소 찜찜하지만, 비올렛과의 승부는 내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 * *

“아퀼라.”

아직 철조망 보수 작업은 좀 남아 있었지만 다행히 부상을 입은 나에게는 쉬라는 허락이 주어졌기 때문에, 나는 얼른 아퀼라가 있는 의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조금도 푹신해 보이지 않는 의무실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는데, 뺨에는 작은 거즈가 붙어 있었고 살짝 드러난 발목에도 붕대가 감겨 있었다.

“얼마나 다친 거야?”

아퀼라는 크게 다치지 않았다고 고개를 저어 보였지만, 나는 얼른 그의 소매를 올려 보았다. 팔에도 감고 있는 붕대가 보였다.

“긁혀서 약 바르고 붕대를 감은 게 전부야. 괜찮아.”

아퀼라는 나를 안심시키려는 어조였지만, 그가 다친 게 여전히 마음 아파서 나는 그의 상처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등은 괜찮아?”

아까 옷이 가장 많이 찢어진 곳이 등이었기에, 차마 상의를 먼저 들춰 보지도 못하고 나는 안절부절못했다. 그러자 아퀼라는 그런 내 눈치를 알아차렸는지 옷을 위로 슥 올려 보았다.

“봐, 괜찮아?”

그의 말대로 오히려 등은 비교적 멀쩡했다.

“휴우….”

그렇게 나는 안심하며 기울였던 몸을 다시 바로 하다가….

‘음.’

그의 상체를 정면에서 보고는 잠시 옆으로 눈을 굴렸다. 음…. 남주력 +100….

어쨌든 그가 무사하다는 걸 확인하고 나니 조금 안심되어서, 나는 그가 앉아 있는 곳 옆에 걸터앉았다.

“어차피 쉴 거 누워 있지 그랬어? 좀 자고 있지.”

“원래는 누워 있었는데….”

아퀼라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며 천천히 말했다.

“네가 오는 소리가 들려서.”

“발걸음으로 나를 알았다고?”

모든 인간의 발걸음을 판단하고 있을 것 같은 윈터가 그런다면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아퀼라까지 내 발걸음을 알 줄은 몰랐다.

“네 발걸음만 외우고 있어.”

아퀼라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양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가장 귀여운 소리가 네 소리야.”

“…뭐라고?”

도대체 그게 무슨 판단 기준인 거지? 나는 고개를 기울였으나, 굳이 되묻지 않고 화제를 전환하기로 했다.

“아퀼라, 너 이렇게 몸 막 던지면 안 돼. 우리가 진급해서 다른 부대로 가고 나면 내가 네 상태를 확인할 수도 없잖아.”

“그럼 내가 다칠 일도 없겠지.”

하긴, 동기인 나 말고 아퀼라가 챙기는 사람은 없으니 그건 그렇겠지.

그 후에 할 말이 없어져서 그냥 멍하니 앞을 보고 있다가, 나는 다시 입을 열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진급하기 무섭다.”

“…무서워?”

아퀼라가 조심스럽게 반문했다. 내가 진급을 무서워할 거라고는 생각해 보지 못한 눈치였다.

“그냥, 완전 새로운 곳으로 가야 하잖아.”

이 부대의 환경에 완전히 적응했는데, 새로운 부대로 떠나야 한다는 건 참 가혹한 일이다. 이미 유대감을 쌓아 놓은 부대원들 사이에 내가 편입하게 되는 거니까.

비록 내가 그들의 고참이라지만, 고참 대접을 받기 위해서는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기도 하고.

그리고 지휘사관으로서 중간을 유지하는 것도 참 어려운 일이다. 로산이 그랬듯이 괜히 후임들에게 시비를 털지 않고 적당히 존중해 줘야 하고, 하지만 먼저 나를 무시하는 모습을 보여 줬을 때는 에이프릴이 그랬듯이 그들을 강하게 잡아야겠지.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두려운 건….

“그곳엔 네가 없잖아.”

나랑 6년 동안 함께했던 동기와 떨어지는 것은 정말 불안한 일이다.

그럼 이제 하고 싶은 얘기가 생기면 누구한테 말한단 말인가? 믿을 사람은 또 어디 있고?

아퀼라는 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내 어깨를 가만히 토닥거려 주며 말했다.

“지휘사관이 되면 편지를 쓸 수도 있잖아.”

“하지만 매일 연락하지는 못하니까…. 가끔씩 편지가 끊길 때도 있고.”

지휘사관이 되면 다른 부대의 지휘사관들과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혜택이 주어졌다. 주로 헤어졌던 동기들과 연락을 주고받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부대로의 편지는 일주일에 한 번씩 모아 두었다가 몰아 보내는 것이고, 가끔 일이 생기면 편지가 중단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위험한 마물이 나타난다든가, 기상 문제가 생긴다든가 아니면 도적 떼가 길을 막고 있다든가.

윈터도 알타이르, 유리와 편지를 주고받고는 했는데, 산사태로 길이 막혀서 무려 두 달 동안이나 편지가 끊긴 적이 있었다.

따라서 편지를 주고받더라도 평소에 매일 대화할 수 있는 것에는 비할 수 없는 것이다.

아퀼라도 내 말을 듣고 그 사실을 상기한 듯 조금 어두운 얼굴이었다가, 곧 다시 어깨를 토닥여 주던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괜찮아, 사루비아. 난 매일 너랑 함께 있을 거야.”

“마음속에 함께 있는 그런 거야…?”

그거 굉장히 데드 플래그 같은데…. 넌 죽었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영원히 함께일 거야! 뭐, 이런 건 아니겠지.

“네가 답하지 못하더라도, 난 매일 너에게 말을 걸 테니까.”

그렇게 말하는 아퀼라는 너무나도 진지한 표정이었지만, 그 말이 조금 웃겨서 나는 작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뭐야, 그럼 허공에 대고 말이라도 하려는 거야?”

입대 초의 딱딱했던 아퀼라에 비하면 지금의 그는 많이 유해진 것 같다. 이렇게 농담도 할 줄 알고.

그렇지만 우습게도 그 말에 조금 위안이 되는 기분이어서, 곧 숙소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괜히 시계를 보지 않고 한참 동안이나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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