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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집착보다 내 탈영이 빠르겠다 118화 (136/233)

나는 그에게서 내 몸을 떼어 내며 그의 얼굴을 마주했다.

어떤 상황에서든 담담해 보였던 그의 주홍빛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그의 뺨을 닦아 내니, 꼭 그 눈물이 불꽃에서 나온 것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미안.”

그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 앞에서는 감정 조절이 안 돼. 하지만 난 그냥 너만 있으면 돼.”

“난 계속 네 곁에 있을 거야.”

그가 이전과 다름없이 계속 나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니, 이유는 모르겠지만 짜릿한 기분이 들었다. 이 세계에 내 존재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는 감각이 날 전율하게 만들었다.

이 세계에서 나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다. 그게 나를 계속해서 이 세계에서 살아가게 만들었다.

내 말에 아퀼라는 다시 말없이 내 어깨에 자신의 얼굴을 한번 파묻더니, 곧 멀끔해진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가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것을 붙잡았다.

“가자.”

“응.”

비탈길을 굴러 동굴 안까지 올 정도였으니, 몸 여기저기가 저리고 욱신거렸다. 빨리 부대에서 치료나 받아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가 동굴 입구로 나가려고 하던 순간.

쿠구궁-!

“뭐야?”

거대한 진동음이 들렸다. 동굴 전체가 뒤흔들리고 있었다. 땅에 발을 딛고 서 있는 우리의 몸 또한 덜덜 떨려왔다.

우리가 당황하여 다리에 힘을 주고 균형을 유지하려고 했을 때, 순식간에 동굴 입구에서 돌이 와르르 떨어졌다.

밖에서 들어오던 빛이 차단되며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제야 나는 이 소리가 동굴이 무너지는 소리였으며, 내가 동굴 안에 갇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갑자기 동굴이 왜 무너졌지?’

그동안에도 진동은 계속되고 있었다. 동굴 안쪽에서 무언가가 쿵쿵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마물이야.”

아퀼라가 그렇게 말하며 빠르게 검에 오러를 둘러 앞을 밝혔다. 나도 들고 있는 총에 오러를 둘러 빛 역할을 하도록 했다. 다만 여전히 동굴 안쪽에서 다가오고 있는 게 무엇인지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지독한 악취가 풍기기 시작했다. 시체가 썩는 듯한 메스꺼운 냄새였기에, 나는 헛구역질을 하며 겨우 구토를 참아냈다.

깊은 동굴 안. 심각한 악취. 그렇다면….

“가스트야.”

마물의 정체를 파악한 내가 눈을 번쩍 떴다.

동굴 안쪽에서 걸어오고 있는 건 두 발로 걷는 회색 괴물. 긴 혓바닥을 밖으로 내밀고 있으며, 몸에는 초록색 털이 부숭부숭 나 있다.

한 마리도 아니고 수십 마리의 가스트 떼가, 우리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대체 오늘 왜 이런 일들만 일어나는 거지?’

가뜩이나 유격 훈련 마지막 날이어서 뒤질 판이었는데, 갑자기 소원 마법이 발동되며 국경이 파괴되어서 우리는 마물을 찾아 헤매고, 보스 머드펫은 무덤을 파헤쳐서 그것을 죽이고, 신병을 구하고 대신 굴러떨어진 동굴에서는 가스트를 만나고.

‘이런 상황을 부르는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무슨 법칙이었는데…. 패티의 법칙? 아니면 매티의 법칙? 뭐,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니 눈앞의 마물에만 집중하자.

아퀼라의 몸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기에 그가 무사히 마물들을 해치울 수 있을지는 좀 걱정이었다.

나는 흘끗 동굴 입구를 확인해 봤지만, 거대한 바위가 입구를 완전히 막고 있었기에 그것을 전부 밀어내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우리가 바위에 매달려 낑낑대는 동안 가스트가 우리를 공격할 게 분명하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 * *

“그래서 사루비아 님이 저 안에 갇히셨단 말이야?!”

호루라기를 듣고 달려온 부대원 중 한 명인 달린이 티아를 붙잡고 헉헉대며 물었다.

“예, 예…. 저를 구하려고 하시다가…!”

티아는 결국 눈물을 왈칵 터뜨리고 말았다. 그녀의 맑은 푸른색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그렇지만 그녀를 위로하는 대신 달린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사루비아 님이 너를 구하려다가 갇히셨다고?”

“예, 다 제 잘못…!”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달린이 진지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고, 다른 부대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루비아 님은 절대 후임을 구하려다가 갇히실 리 없어! 다른 이유가 있을 테니, 너는 죄책감 가지지 않아도 돼!”

“예, 예?”

“맞아, 사루비아 님이 그러실 리가 없지.”

그녀를 위로해 주는 말이긴 하지만 뭔가 묘한 내용에 티아의 표정이 이상해졌지만, 어쨌든 덕분에 그녀는 눈물을 그칠 수 있었다.

그동안, 호루라기를 듣고 왔던 베니는 심각한 얼굴이 되어서 동굴을 쳐다봤다.

“위험한데….”

“뭐가 위험하다는 거야?”

베니의 말에 카론이 빠르게 고개를 돌리며 반응했다.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것 같은 그의 표정에 순간 베니는 몸을 움찔했으나, 이내 침착을 되찾은 뒤 말했다.

“무언가 충격에 의해 동굴 입구가 막힌 것 같은데, 그 말은 동굴 안에 마물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뜻입니다.”

“동굴 안이라면… 가스트? 스톤버그? 세눈박쥐?”

달린은 사루비아에 의해 암기 당한 마물들의 이름을 읊어 봤지만, 결국 답을 찾지 못하고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 그럼 빨리 저 돌을 치우고 사루비아 님을 구해 드려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러나 달린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카론은 이미 비탈길을 구르다시피 하며 내려가고 있었다. 무릎이 뾰족하게 튀어나온 돌에 몇 번이고 부딪쳤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 듯했다.

“사루비아 님!”

그는 사루비아의 이름을 부르며 거대한 돌들을 무너뜨리려 애썼다.

베니도 뒤돌아 그들을 따라온 후임들에게 내려가자며 손짓했다. 달린, 패티와 매티, 그리고 지나가 그들을 따랐다.

베니는 여전히 불안해하며 몸을 부들부들 떠는 티아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티아, 괜찮을 거야. 두 분은 강하시니까, 이럴 때일수록 침착하게 행동하면 답이 나오는 법이야.”

쾅-! 쾅-!

베니가 후임들을 이끌고 비탈길을 무사히 내려갔을 때에는, 카론이 무식하게 자신의 몸을 들이박다시피 하며 돌을 무너뜨리려고 하고 있었다.

뾰족한 돌을 미느라 손바닥은 까져서 상처가 나고, 부딪치는 살갗이 빨갛게 변했기에 베니는 기겁하여 그를 말렸다.

“카론 님. 그 방법으로는 다치시기만 할 것 같습니다.”

“사루비아 님은 더 다치실 수도 있잖아! 동굴 안은 어두워서 위험한 마물들도 많다고!”

그러나 카론은 울먹이고 있었기에, 베니는 자신이 그를 진정시킬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카론을 통제할 수 있는 건 오직 사루비아뿐이었다.

쾅-!

카론은 정말로 오직 동굴 입구밖에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그곳에 돌진하고 있었다. 그의 눈에 다른 사람은 전혀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돌을 밀다가 이 방법으로는 안 될 것 같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카론이 넋 나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화약을 써서 동굴을 폭파시키면 안에 있는 사루비아 님이 다치시겠지? 아퀼라 님이 잘 감싸 주시려나? 아냐, 그래도 위험해…. 그렇다면 땅굴을 파서 들어가는 거야. 아, 아냐. 기다려. 내가 지금 부대에 가서 망치를 들고 올 테니까….”

동굴 입구를 보는 그의 시선에는 지나치리만큼 맹목적인 애정이 담겨 있어, 그를 말리려 들다가는 오히려 그 애정에 두려움을 느끼고 나가떨어질 것 같았다.

그때, 예상치도 못했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카론 님, 그 아래의 돌을 빼내야 합니다!”

“뭐?”

모두의 미심쩍은 시선이 패티에게로 쏠렸다. 그러나 패티는 기죽지 않고 꿋꿋하게 서서 외쳤다.

“제가 저희 상단 창고에 있는 물건을 자주 무너뜨려 봤는데 말입니다! 무게중심이라는 게 있어서… 그 위치에 있는 돌들을 무너뜨리면 됩니다!”

베니는 패티가 가리키는 돌을 불안한 눈으로 쳐다보다가, 패티의 사고로부터 나온 경험을 믿기로 했다.

“도구! 도구를 쓰는 게 좋겠습니다!”

매티는 어딘가에서 기다란 나뭇가지를 가져오더니 뚝딱뚝딱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평소 매티의 손재주 없는 모습을 봐 온 베니는 매티를 말리려 했으나….

“이렇게 하면 힘을 덜 싣고도 물건을 밀어낼 수 있습니다! 제가 이 방법으로 몰래 과일나무에서 과일을 서리해 봐서 잘 압니다!”

“…그런데 너 농사 짓는다고 하지 않았니? 누구 과일을 서리한 거니?”

“저희 아버지 과일을 서리할 때 썼습니다!”

그 말에 베니의 동공이 잠시 흔들렸지만, 어쨌든 베니는 매티 또한 믿어 보기로 했다.

이윽고 매티가 기다란 도구를 건네자, 카론은 그것을 곧바로 건네받더니 힘을 주어 돌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오!”

“무너집니다!”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던 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기에 그들이 환호하던 찰나.

“꺄악!”

그들의 발밑에 깔린 흙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기에, 달린이 비명을 지르며 펄쩍 튀어나왔다. 그 정체를 깨달은 베니가 얼른 검을 고쳐 잡았다.

“동굴 근처라 지하에 있던 마물들이 올라오고 있는 거야! 카론 님이 돌을 무너뜨리는 동안, 너희는 마물들을 막아!”

그렇게 외치면서도 베니는 그들에게 큰 기대를 품지 않았다.

둘이서 1인분을 하는 패티와 매티나, 달린은 말할 것도 없고. 두 명의 신병은 아직 미숙하고, 그나마 달린의 맞후임인 지나만이 좀 쓸 만한 정도였다.

‘내가 혼자서 전부 맡아야겠군.’

땅 위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검은 마물을 보며 베니가 침을 꿀꺽 삼킨 찰나.

“사루비아 님….”

갑자기 진지한 얼굴이 된 달린이 두 손으로 검을 꽉 잡았다.

‘나도 할 수 있다고 했어.’

사루비아는 달린에게 언제나 할 수 있다고 했고, 사루비아가 할 수 있다고 말한 일들은 늘 실제로 이루어졌다.

사루비아는 그녀가 가진 빛의 오러가 뛰어난 재능이라고 했다. 비록 달린은 아직 속성 오러를 잘 활용하지 못하고 남들처럼 평범하게 마물을 베는 데만 쓰고 있었지만….

‘아퀼라 님은 불을 다루고, 베니 님은 바람이 불도록 할 수 있고, 윈터 님은 모두 얼릴 수 있었어.’

그러므로 달린도 이 빛의 오러로 무언가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마침내 달린이 진정으로 그녀의 힘에 집중한 순간, 그녀의 검에 둘러진 흰색 오러가 눈부신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어둠을 처단하는 데 특화되어 있는 빛의 오러. 그것이 땅 위를 뒤덮었고.

파앗-!

이윽고, 땅 위로 미처 올라오지도 못한 채 마물은 그대로 동작을 멈췄다. 달린은 믿기지 않는 눈으로 자신의 검과 마물을 번갈아 쳐다봤다.

“이렇게 하는 거였구나….”

직접 검을 쓰지 않고도, 빛을 이용해 어두운 곳에 사는 마물을 무찌를 수 있다. 그게 자신이 가진 힘이었다.

“달린, 잘했어!”

와르르- 쾅-!

때마침 카론은 돌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고, 빛이 동굴 안을 비추며 그 안에 있는 것들의 형체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동굴 안은 마물이 가득할 거야!’

베니가 했던 경고를 머리에 새기며 달린은 검을 꽉 잡았다. 그녀의 힘을 이용해서 그 안에 있는 마물들을 모두 해치울 생각이었다.

“사루비아 니이임!”

달린이 긴장을 유지한 채 그 이름을 부르짖으며 동굴 안을 쳐다봤을 때.

“어, 왔니?”

달린은 바닥에 쓰러진 수십 마리의 가스트 떼와, 그 가운데 서 있는 아퀼라와 사루비아를 발견할 수 있었다.

사루비아는 피에 의해 젖어 있는 총과, 피가 튀어 있는 뺨으로 그들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너희가 전부 구하러 올 줄은 몰랐는데.”

“그… 괜찮으십니까?”

자신이 그녀를 구해 주는 모습을 기대했던 달린이 얼떨떨한 목소리로 묻자, 사루비아는 너무나도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폭력과 공포가 우리 모두를 구원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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