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뭐지…?’
정말 게임 속에 나오는 슬라임 같았다….
또잉-! 또잉-! 또잉-!
총을 쏘는 것보다는 그냥 내리치는 게 더 빠른 것 같아서, 나도 아퀼라와 함께 머드펫들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긴가민가한 눈으로 우리를 보던 신병들도 엉거주춤하게 다가와 우리의 옆에서 머드펫을 내리쳤다.
“혹시 보스 머드펫이 나타나면, 호루라기를 부는 걸 잊지 마!”
나는 호루라기를 목에 걸고 있는 티아를 향해 외쳤다.
1급 마물이나 2급 마물이 나타났을 시에는 원칙상 다른 부대원들을 불러 모아 함께 처리해야 했다. 원래는 이런 적은 인원으로 처리할 수 있는 마물이 아니었으니까.
‘사실 여기는 아퀼라가 있으니 괜찮겠지만.’
원작에서 아퀼라는 카론과 함께 보스 머드펫을 해치웠다.
그렇지만 이 자리에는 카론도 없었으므로 혹시 모를 위험을 피하기 위해, 나는 원작에서처럼 보스 머드펫이 나타난다면 그것을 자연스럽게 다른 부대원들이 있는 쪽으로 유인해 함께 처리하기로 했다.
“이제 끝났어.”
아퀼라는 나를 위해 죽은 머드펫들에게서 동그란 귀를 한 짝씩 잘라내 주었다. 이따 비올렛과 승부의 결과를 가릴 때 증표로 쓰일 것들이었다. 나는 그것들을 마물의 시신 처리를 위해 가지고 있던 주머니 안에 집어넣었다.
‘이것만으로도 이기겠네.’
조금 비겁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아까 승부를 하자고 했을 때 비올렛은 단순히 ‘마물의 수’만을 기준으로 정했다. 그렇다면 이런 약한 머드펫을 떼로 해치운 경우도 해당되겠지.
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주머니를 챙기면서도, 경계를 풀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보스 머드펫이 나타날 게 분명했다.
“사루비아. 너 긴장했어?”
그런 내 상태를 알아차린 듯 아퀼라가 내 팔을 가볍게 붙잡았다가, 무언가를 느낀 듯 갑자기 바위 너머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기척을 감지한 것 같았다.
“거대하네….”
그가 허공을 보며 중얼거렸다.
나는 지금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지만, 아퀼라는 기척에 민감하니까.
“티아, 호루라기를 불어.”
“예? 아, 알겠습니다!”
티아는 허둥지둥하다가 자신의 목에 걸린 호루라기에 손을 뻗어 겨우 그것을 불었고.
삐이익-!
요란한 호루라기 소리가 울리자마자, 그 소리가 마물을 자극하기라도 한 듯 우리의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졌다.
나름 귀엽게 생겼던 머드펫들과 달리 끔찍한 형상을 한 보스 머드펫이 진흙을 뚝뚝 떨어뜨리며 돌무더기 위에서 우리를 향해 몸을 숙였고.
“달려!”
내가 그렇게 외침과 동시에, 우리는 모두 뒤돌아 달렸다.
“사루비아, 지금 공격하면서 버틸까?”
“아니! 신병들이 위험해질지도 몰라! 다른 부대원들과 합류할 때까지 도망치자!”
보스 머드펫은 땅을 파헤치며 우리를 쫓아오고 있었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땅을 파고들어 이동하는 특성답게, 그것이 흙을 파헤치며 사방으로 흙이 튀었다.
나는 흘끗 뒤를 돌아봤다. 다행히 우리가 달리는 속도가 더 빠른지, 보스 머드펫과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봉긋하게 솟아오른 땅을 파헤치며 우리를 추적하고 있었…. 잠깐만.
“…아, 아퀼라.”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기분이 느껴졌다.
머리가 멍했고 정신이 어지러웠다. 이러다가는 심장이 펑 터져서 죽어 버릴지도 모른다고 느낄 만큼 지금의 내 상태는 이상했다.
하지만, 나는 정말로 이성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아퀼라….”
내가 갑자기 제자리에 우뚝 서서 그의 이름을 부르자 아퀼라도 나와 함께 멈춰 내 팔을 붙잡았다.
“왜, 무슨 일이….”
그러나 내 시선이 향한 곳을 본 후, 아퀼라의 얼굴도 나와 마찬가지로 하얗게 질렸다. 오래전 보았던 빛이 다시 그의 눈에 감돌았다.
나는 이곳이 어디인지 안다.
원작에서 묘사된 이 장소에 내가 언제 왔었는지, 이제 기억이 난다.
첫 마물 토벌, 드래곤을 상대했던 날.
내 일곱 명의 동기들이 참혹한 죽음을 맞이했던 날.
피 냄새를 맡고 마물이 부대로 몰려들까 봐, 산에 그들의 시신을 묻어 두고 떠나와야 했던 날.
이곳은 우리가 동기들을 묻어 두었던 장소였다.
그리고 아퀼라와 나는 오래전 동기들이 묻혀 있었던 땅이, 마물에 의해 엉망으로 파헤쳐진 광경을 목격했다.
…여기서 그 누가 이성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더 이상 우리의 안전이니 뭐니를 고려하며 보스 머드펫을 유인하겠다는 계획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아퀼라.”
“그래.”
아퀼라가 나보다 먼저 보스 머드펫의 정면으로 뛰어들었고, 나도 그의 뒤를 따라 달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는 저 마물의 숨통을 끊어 놓아야만 했다.
“아퀼라 님, 사루비아 님?!”
뒤에서 티아가 뭐라 외치는 것도 같았지만 그녀의 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분노로 인해 눈앞이 하얘졌고 소리는 웅웅대며 울렸다.
그 상황에서 내가 느낄 수 있었던 건 오직 아퀼라가 내 바로 옆에서 달리고 있다는 감각뿐이었다.
탕-!
오러를 두르는 것도 잊고 총을 쐈기 때문에, 요란한 소리가 산을 울렸다.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새들이 푸드덕거리며 날아갔다.
순간 몸 전체에 울리는 듯한 강력한 소리에, 그제야 나는 정신을 차리고 총에 오러를 둘렀다.
그렇지만 보스 머드펫은 흐물거리는 진흙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탄환은 별 효과를 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 상황에서는 아까 그랬듯이 그것의 몸을 내리쳐서 강한 충격을 주든가, 오러를 두른 검으로 완전히 베어내는 것만이 답이었다.
타앗-!
내 바로 옆에서 아퀼라의 몸이 허공으로 부웅 떴고, 그는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한 화염을 검에 두른 채 마물을 향해 내리찍었다.
진흙이 울컥 흘러나오며 마물의 몸이 찢어졌지만, 아직 생명을 유지할 힘은 남아 있는 듯 그것은 꾸물거리며 움직였다. 본능적으로 공포를 느낀 듯, 보스 머드펫은 몸은 반대로 하여 우리로부터 도망치기 시작했다.
“쫓아!”
삐익-! 삐익-!
울상이 되어 호루라기만을 불던 티아가, 결국 우리를 따르는 것 외에는 답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듯 동기와 함께 우리를 쫓았다. 우리는 오직 보스 머드펫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그것만을 쫓았다.
‘죽여 버릴 거야.’
유격 훈련으로 인해 뭉쳐 있었던 근육에서는 더 이상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몸의 감각이 점점 사라지고, 달리면 달릴수록 누군가가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아릿한 감각만 남았다.
저 멀리 있는 비탈진 내리막길 너머로 작은 동굴이 보였다. 보스 머드펫의 방향을 보니 그 안으로 도망가 숨으려는 듯했다.
하지만 우리의 속도가 더 빨랐다. 보스 머드펫이 돌로 된 거친 길로 도망치기 전에, 아퀼라는 검을 들어 그것을 뒤에서 내리찍는 데 성공했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타격을 입혔는지 보스 머드펫의 몸이 흐물거리며 자리에 무너졌다.
“내가 이 XX를….”
내가 그것을 노려보며 그렇게 중얼거린 바로 그 순간.
“어?”
보스 머드펫의 입이 쩌억 열리더니, 진흙으로 된 몸이 붕괴되다시피 하며 우리 쪽으로 쭈욱 늘어났다. 거대하게 벌려진 입이 그대로 티아의 앞에서 멈췄다.
“어어….”
입 안에서 그대로 튀어나온 진흙더미에 의해 티아가 끌려가기 전에.
“XX!”
나는 몸을 던지다시피 하여 티아를 붙잡았고, 손에 힘을 주어 티아를 강하게 잡아당기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티아의 몸이 밀려남과 동시에, 내 몸은 아래로 기울어졌다. 최후의 공격에 실패한 보스 머드펫도 비로소 죽음을 맞이한 듯 몸이 허물어졌다.
‘아오, XX….’
이미 보스 머드펫은 죽었고, 이 높이에서 아래로 구르는 것 정도로 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다치는 건 어쩔 수 없을 거다.
하지만 내가 이성을 잃고 보스 머드펫을 쫓아 달리지만 않았다면 후임들도 위험에 빠질 일은 없었을 테니까. 티아를 구하는 건 내 일이었다.
그렇게 내가 어디 한 곳 정도는 부러지는 것을 감안하며 눈을 질끈 감았을 때 누군가가 내 손을 붙잡았다.
나는 그 손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그대로 내 몸이 그에 의해 감싸지다시피 하며, 우리는 함께 비탈길을 굴렀다. 바닥에서 튀어나온 돌에 부딪칠 때마다 몸이 위로 통통 튀는 기분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몸을 끌어안고 있는 이가 있기에 많이 아프지는 않았다.
그렇게 구르고, 또 구르고.
비탈길의 끝에 있는 동굴의 입구를 통해 동굴 안까지 떨어지고 난 뒤에야, 비로소 몸이 멈췄다.
“하아, 하아….”
땅을 구르며 충격을 입은 탓인지 숨쉬기가 조금 어려웠지만, 어딘가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욱신거리는 몸을 간신히 차가운 돌바닥 위에서 일으키며, 내 옆에 있는 남자의 얼굴을 쳐다봤다.
“아퀼라.”
돌에 긁힌 것인지, 그가 피가 흐르는 팔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괜찮아? 거기서 나를 붙잡으면 어떡해…!”
나보다는 아퀼라의 부상이 심한 것 같아서, 내가 헐떡이는 목소리로 그렇게 외쳤지만.
정작 아퀼라의 옷은 곳곳이 찢어졌고 그곳에서 피가 흘러나오는데도 불구하고 침착해 보였다.
“내가 예전에 말했잖아, 사루비아.”
나와 마찬가지로 숨쉬기가 어려운 듯, 그는 느리지만 또렷한 발음으로 말했다.
“무슨 수를 써서든 곁으로 데리고 오겠다고. 그런데 내가 널 곁으로 데리고 오는 데 실패하면….”
그가 손을 휘익 뻗어 허공에서 방황하던 내 손을 붙잡았다.
“그럼 내가 네 곁으로 갈 거야. 무슨 수를 쓰든 네 곁에 있을 거야.”
“야, 너….”
지금 이 순간 그의 눈빛은 불안정했다.
과거 동기들이 죽었을 때, 그가 보여 주었던 바로 그 눈빛이었다.
“사루비아 네가 추락한다면, 나도 함께 추락해.”
나는 잠시 입을 다물고 그를 바라보았다.
동기들의 무덤이 파헤쳐진 일로 나도 지금 제정신이 아닌데, 아퀼라는 나보다도 더 불안해하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아퀼라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그의 호흡이 천천히 안정되는 동안에도, 나는 슬쩍 손을 뻗어 그가 다친 곳이 없는지는 살피고 있었다.
멀쩡하게 서 있는 걸 보니 어디 부러진 데는 없는 것 같고, 등과 팔 곳곳에 생채기가 난 것 같고….
이 상태로 그 비탈길을 다시 기어 올라가는 건 좀 힘든 일일 것 같지만, 그래도 신병들이 우리를 도와줄 테니 괜찮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저 그를 안정시켜 주기 위해 계속 그를 안고 있었다. 내 귓가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루비아, 나는….”
“응.”
“네가 하고 싶은 일을 뭐든지 해도 좋아. 그냥 그 곁에 내가 있게 해 줘.”
“응.”
“내가 말려도 너는 위험한 일을 할 거잖아. 단지 그 곁에 내가 있으면, 그걸로 나는 좋아….”
순간 내 어깨에 뜨거운 무언가가 닿았다.
나는 놀라서 몸을 움찔했다. 그러니까,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아퀼라, 너 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