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로 우리는 철조망을 다시 세우는 작업을 했으나, 더 중요한 건 이미 국경을 넘어온 마물들을 처리하는 일로 보였다.
우리가 부대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이동한 마물들도 많을 테니 산이 마물들에 뒤덮여 엉망이 되었으리라는 사실은 불 보듯 뻔했다.
“마을 아래로까지 내려가면 안 되는데….”
중대장은 불안한 듯 정신 사납게 자리를 왔다 갔다 하더니, 결국 일부는 남아서 철조망 작업을 마치고 일부는 먼저 마물을 해치우라고 명령을 내렸다.
‘아, 이렇게 된 거였군.’
이다음에는 원작에서 그러하듯 달린이 위험에 빠졌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각성하는 장면이 이어지겠지.
예상대로 우리 18중대에서 먼저 마물을 소탕하는 일에 선별된 것은 바로 알파 소대였다.
“최대한 많은 마물들을 잡아 오도록!”
그의 명령에 따라 부대를 빠져나가 산 아래로 달리는 동안, 유격 훈련 때 혹사시켰던 다리가 욱신거리며 통증을 호소했다.
그나마 나는 이런 사건이 벌어질 거라는 사실을 예측하고 체력을 아껴 두기라도 했지, 갑작스럽게 비상 상황을 마주하게 된 다른 부대원들은 헉헉거리며 간신히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휘익-!
그 와중에도 아퀼라는 전혀 지친 티를 내지 않고 그의 눈에 띈 작은 뱀 마물을 빠르게 해치웠다. 산을 살피는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여기서는 흩어지는 게 좋겠어.”
아퀼라가 짧게 명령했다. 그는 지휘사관 케이엇과 로산을 쳐다보았지만, 그들은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그들은 이전 베니 사건 이후로 늘 입을 다물고 조용히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 판단을 내려야 하는 건 우리였다.
“그래, 적당히 인원을 나눠서 산 곳곳으로 흩어져서 마물을 잡아 오게 하자.”
아퀼라의 말에 동조하며 내가 후임들에게 명령을 내리려던 바로 그 순간, 나는 저쪽에서 내려오고 있는 다른 부대 병사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17중대네.”
이 사단으로 인해 바쁜 건 우리 중대만이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 우리와 함께 훈련으로 고생하던 16중대와 17중대도 마물들을 잡기 위해 다시 고생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인 것이다.
17중대의 선두에는 익숙한 얼굴이 서 있었다. 지난 5일 동안 지긋지긋하게 경쟁해 왔던 그녀, 비올렛이었다.
나를 발견하자 그녀는 갑자기 눈에 힘을 주며 부릅뜨더니,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이쪽으로 걸어왔다.
“사루비아 님!”
“어, 어?”
언제나 그렇듯 기합이 바싹 들어가 있는 태도였다.
“이번에야말로 승부를 보시지 말입니다!”
“뭐? 또 승부?”
“예! 누가 더 마물을 많이 잡는지 시합합시다!”
이런 미친 승부 중독자 같으니라고…. 이런 상황에서도 승부를 해야 하는 건가?
그녀의 뒤에 있는 후임들이 나와 마찬가지로 질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언뜻 ‘또 시작이군.’과 같은 소리가 들려오는 걸 보면, 그녀가 평소 얼마나 승부에 미쳐 있는지는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비올렛에게 넌 이럴 때도 승부를 하고 싶냐며 핀잔을 주고 이 일을 무효로 돌리려다가, 나는 문득 원작의 내용을 떠올렸다.
‘…이건 내가 이길 수밖에 없는 승부잖아?’
원작을 읽은 나는 어느 곳에 마물이 많은지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건 내가 무조건 이길 수밖에 없는 승부였다!
그렇다면 내가 비올렛과 굳이 왜 승부를 해야 하는가? 그 답은 간단했다.
‘비올렛은 17중대 소속이지.’
그리고 17중대에는 대대 본부가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대대장에게 소원권을 사용해서 얻어 내고 싶은 물건이 있었다. 그리고 남들의 눈을 피해 ‘그 물건’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대 본부와 가까운 누군가의 조력이 필요했다.
그런 면에서 만일 내가 이 승부에서 이긴다면, 비올렛은 내게 유용한 조력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잃을 게 없고 얻을 것만 있는 승부라면 당연히 승낙하는 편이 내게 이득일 것이다.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비올렛의 제안에 대답했다.
“좋아, 승부를 받아들이지.”
“좋습니다!”
갑자기 내 태도가 손바닥 뒤집듯 바뀌자 아퀼라가 내 눈을 흘끔 쳐다봤다. 그렇지만 내가 무슨 꿍꿍이를 품고 있는지는 아직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누가 더 많은 마물을 처리하는지 내기하자. 그리고 진 사람은 상대의 소원을 들어주는 거야.”
“절대 지지 않겠습니다!”
비올렛의 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승부. 참 신나는 일입니다.”
우리를 구경하던 산체스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기에 나는 그처럼 짐승 같지는 않다고 반박하고 싶어졌지만, 어쨌든 나는 입을 꾹 다물고 비올렛과의 승부를 준비했다.
갑자기 마물이 나타나서 생고생하게 되는 판에 승부라니. 남들이 보면 뭔 미련한 짓이냐고 할 수 있겠지만, 나는 원작에서 달린이 위험에 빠진 장소가 어디인지 알고 있다.
‘달린은 갑자기 마물이 많은 곳에 혼자 떨어지게 돼서 위기에 빠졌지.’
그곳에 간다면 득실득실한 마물들을 전부 처리할 수 있다.
원작에서의 달린은 목숨에 위협을 받았지만, 달린보다 짬밥을 훨씬 먹으며 실력을 쌓아 온 나라면 괜찮을 것이다. 원작에서 묘사된 마물들은 모두 약하디약한 3급 마물들이기도 했고.
비올렛이 나와 눈빛을 주고받은 뒤 마물을 찾아 저 멀리로 힘차게 달려갈 때,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아퀼라에게 말했다.
“흠흠, 이제 우리 소대 부대원들을 잘 배정하자.”
원작에서 달린이 그랬듯이 혼자 다니면 위험에 처할 수 있으니, 3인 1조나 4인 1조로 배정해야 한다.
그러나 아퀼라는 내 말에 동의해 주는 대신 주홍빛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사루비아, 갑자기 웬 승부야?”
“으음…. 그냥, 이길 자신이 있어서….”
“이유는 말해 주지 않아도 괜찮아. 사루비아 네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 그런데….”
아퀼라가 꼭 내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으로 말했다.
“마물을 잡는 승부는 위험할 것 같아.”
“음, 그래서 조를 짜서 가는 거니까….”
“응, 그러니 나도 너랑 함께 갈래.”
“응?”
보통 조를 짤 때 우리는 후임들을 이끌 책임이 있으므로 흩어지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아퀼라의 태도는 확고해 보였다.
“사루비아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하지만 나도 함께 가.”
“…응, 안 될 건 없겠지.”
사실 이제 자이든과 밀피, 베니가 후임 관리를 열심히 하고 있으니, 우리는 이전처럼 후임 관리에 신경 쓸 필요가 없기는 하다.
그리고 ‘마물들이 많은 곳’에 약한 후임들과 함께 갔다가 위험해질 가능성이 있기도 했다.
나야 내 실력으로 괜찮을 거라고 장담했다지만, 사실 이게 위험에 빠지는 플래그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원작에서 위험하다고 나온 곳에 아무런 대비도 없이 가는 건 멍청한 짓이다.
‘절대 데드 플래그를 밟는 멍청한 짓 따윈 하지 않겠어.’
내가 패티와 매티, 달린도 아니고,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다. 아퀼라가 있다면 당연히 우리는 안전할 것이다.
“그래, 같이 가자.”
그렇게 하여 아퀼라와 나, 그리고 이번 기수 신병 둘로 구성된 조가 완성되었다.
* * *
“야, 네가 몇 기더라?”
“413기입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방금 내 말에 대답한 신병 티아를 훑어보았다.
푸른 머리카락과 눈을 가진 이번 신병 티아는 참 요정처럼 청초한 인상이었는데, 원작에서 적은 비중으로 등장했던 기억이 난다. 대충 달린의 말에 잘 따르는 천사 후임 캐릭터였다.
‘그리고 저쪽은….’
티아와 동기인 남자 신병의 이름은 잭이었나 잭슨이었나 했는데, 그는 원작에 등장하지 않았다.
‘죽었다는 거지.’
어차피 나는 곧 이 부대를 떠날 테니 신병들에게 신경 쓸 여유는 없는 것 같아서, 그에게서 완전히 관심을 끈 채 아퀼라와 나란히 서서 마저 길을 걷기 시작했다.
나는 원작에서 달린이 마물 ‘머드펫’을 발견했던 곳으로 가고 있었다.
머드펫은 진흙으로 된 작은 덩어리처럼 보이는 마물이었는데, 슬라임의 진흙 버전이라고 보면 된다. 초보자용의 약한 마물이라는 뜻이다. 그들은 여럿이서 몰려다니며 폴짝 뛰어오르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공격했고, 땅을 파고 아래로 들어갈 수 있다는 특징이 있었다.
“여, 여기가 어디지?”
[달린은 불안에 젖은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나 숲의 풍경은 어딜 가나 비슷비슷한 탓에 결국 그녀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온 길을 되돌아가 보려 했으나, 걸어도 걸어도 부대원들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달린은 자신이 길을 잃었다는 것을 깨닫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흑!”
[오른쪽에는 거대한 소나무가 있었고, 앞에는 바위가 왕창 쌓인 곳이 있었다. 이 자리에 선임들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길을 찾아 줬을 텐데. 달린은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달린을 혼자 보내질 않길 잘했다….’
길을 잘 찾는 카론과 함께이니, 이번에는 달린이 위험에 빠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각설하고, 달린과 달리 나는 저곳이 어디인지 알고 있었다. 이 산을 누비고 다닌 지가 몇 년째인데 ‘소나무와 왕창 쌓인 바위’라는 말을 들었을 때 머릿속에 그 장소가 그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분명히 가 본 적 있는 길이야.’
정확히 언제인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어쨌든 나는 희미한 기억 속의 장소를 찾아 천천히 걷고 있었다. 아퀼라는 내가 생각이 있어서 이 길로 가리라고 생각하는 눈치인 듯 말없이 나를 따라 걸었다. 그동안 우리는 마물을 발견할 때마다 가볍게 처치하기도 했다.
“아, 찾았다.”
곧이어, 원작에 나왔던 장소를 발견한 내가 고개를 들었다.
큰 바위가 여럿 쌓인 곳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는….
“머드펫!”
마물 떼를 발견한 티아가 그렇게 외치며 검을 고쳐 잡았다. 원작에서 살아남았던 애답게 좀 유약한 성격이어도 머리는 영리한 것 같아서 나는 흐뭇해졌다. 앞으로의 마물 토벌에도 잘 대처할 것 같군.
“티아, 머드펫이 몇 급 마물이었는지 기억하니?”
“아… 3급 마물입니다!”
그렇게 답하고 나서 그녀의 팔에서 힘이 풀리는 게 보였다. 마물을 처음 봐서 긴장하기는 했지만 3급이라는 사실을 상기한 뒤 조금 안심한 모양이었다.
“그래. 머드펫은 전혀 위험하지 않아.”
하다못해 달린도 머드펫은 혼자서 때려잡았다. 그녀가 빛의 오러를 두른 검을 한번 휘두르기만 해도 우수수 털려 나가는 것이다.
그렇지만 달린이 위험에 처했던 이유는….
“머드펫이 나타난 자리에서 주의해야 할 건, 보스 머드펫이야.”
보스 머드펫, 2급 마물.
머드펫 수십 마리를 합쳐 놓은 것처럼 거대한 크기의 이 진흙 괴물은 일반 머드펫보다 훨씬 빠르고 영악하다. 그것은 땅굴을 파고 갑자기 거대한 몸을 불쑥 드러내서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며, 거대한 입을 통해 진흙 속으로 순식간에 사람을 삼켜 버린다.
“휴우….”
[땅 위로 쓰러진 머드펫들의 시체를 보며 달린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뺨은 상기되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녀가 혼자 마물을 처리했다니!
달린이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빙그레 웃었을 때, 순간 그녀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어…?”
[거대한 진흙 덩어리를 본 달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2급 마물, 보스 머드펫. 지금 달린의 실력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가 없을 존재.
달린을 향해 활짝 벌려진 그것의 입에서, 진흙이 땅으로 뚝뚝 떨어졌다.]
그래서 그 이후로 달린은 보스 머드펫을 피해 열심히 도망쳤고, 원작에서 언제나 그랬듯이 아퀼라가 나타나 그녀를 지켜 주었다. …늘 그랬지만 원작은 역시 XX 빡치는군.
“아오, 빡쳐….”
내가 화를 참지 못하고 또 으르렁대자, 나를 슬쩍 돌아본 아퀼라가 말했다.
“사루비아, 저건 내가 죽이고 올게.”
“…아냐, 같이 해.”
비올렛과의 내기가 있었기에, 나는 화를 삭이며 그쪽으로 걸어갔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머드펫들은 어떻게 보면 귀여워 보이기도 했지만, 그것이 우리가 해치워야 할 마물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아퀼라는 오러를 두른 검으로 머드펫 한 마리를 내려쳤고.
또잉-!
이상한 효과음과 함께 머드펫은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