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하지만 지금 나에게 더 큰 문제는 비올렛이 아니라 유격 훈련 그 자체였다.
그다음 날부터 이어지는 훈련은 또다시 지옥이었다.
첫날 했던 체조와 사격 훈련은 페이크였다는 듯 우리는 극한의 장애물 산악 훈련을 했고 레펠을 탔다….
“XX, 진짜 미친 거 아냐?”
둘째 날, 장애물 산악 훈련을 마치자마자 내가 내뱉은 말이었다. 부대에서 훈련하며 충분히 강해졌다고 하는데 역시 유격 훈련이라는 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힘들었다.
‘대체 로판에서 유격 훈련이라는 말이 왜 나오냐니까?!’
땅 위에 주저앉은 채 이 불합리한 현실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데 멀리서 아퀼라가 내게 다가왔다. 그는 장애물 훈련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을 내서 소원권을 막 따낸 참이었다.
“사루비아.”
아퀼라가 내 앞에 쪼그려 앉으며 수통을 꺼냈다.
“탈수 오겠다. 물 마셔.”
그가 내 입으로 물을 흘려보내 주는 걸 얌전히 받아먹고 있을 때 아퀼라가 내 손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레펠에 쓸려 빨갛게 변해 있는 것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레펠 때문이야?”
“응. 까진 건 아니고, 그냥 지금 잠깐 뜨거운 정도.”
아퀼라는 눈을 내리깔고 가만히 내 손을 꾹꾹 눌러 주었다.
“그나저나 너 훈련에서 1등 했더라? 기분 좋겠네?”
“글쎄, 속상한데.”
“응?”
“그런 건 다 의미 없어.”
그가 하는 말이 내 피부가 쓸린 것을 두고 하는 얘기라는 걸 모를 리 없었다. 그는 유일한 동기인 나와 관련된 일이라면 늘 민감해졌으니까.
“소원은 정했어?”
“아니. 훈련이 끝나면 정하려고.”
“으응, 어쨌든 잘했다. 멋졌어.”
내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그의 귀가 확 붉어졌다. 아퀼라가 칭찬에 약하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내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한 채 괜히 땅만 보고 있었지만, 붉어진 귀와 자꾸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숨길 수는 없었다.
“남은 훈련도 힘내자.”
“사루비아 너도 다치지 마.”
* * *
아퀼라는 그다음 날에도 최우수 병사가 되었다. 그는 레펠 훈련에서 놀라운 성과를 거뒀다.
그다음 날에도 그는 최우수 병사가 되었다. 그는 이전보다 더욱 난이도가 높아진 장애물 훈련에서도 독주했다.
다른 중대의 병사들까지 아퀼라에게 감탄했기 때문에 나는 좀 뿌듯해졌다. 이게 바로 원작 남주의 능력치군. 그리고 저게 바로 내 동기다, 자식들아.
긴 시간이 지나, 오늘은 드디어 훈련의 마지막 날이었다. 이 지긋지긋한 유격 훈련을 끝내고 부대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 길에 사고가 터져서 마물 토벌을 해야겠지만, XX.’
차라리 훈련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
…아니다. 그동안 5일 내내 눈을 세모꼴로 뜨고 나에게 달려들던 비올렛을 생각하면, 빨리 이 유격장에서 벗어나는 게 상책이었다.
“레펠 훈련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바람의 방향을 고려해서 내가 안쪽 줄을 타야 한다! 하, 사루비아 님! 이번에는 제 승리일 겁니다!”
“장애물 산악 훈련? 하하, 사루비아 님! 장애물을 제가 더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 미친X, 진짜….’
원래라면 평범한 승부 중독자였을 비올렛은 나로 인해 ‘편법까지 쓰는 미친 승부 중독자’가 되었다….
나는 이미 소원권 하나를 따냈고 체력을 아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으므로 그냥 그녀가 나를 이기도록 내버려 뒀다. 비올렛이 뿌듯해하는 걸 보면 그걸로 된 거 아닐까 싶다.
‘국경방위군 여자들이 다 그렇지, 뭐….’
이곳에서 살아남은 여자들은 대체로 경쟁심이 넘치고 지는 걸 참지 못해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 나는 그녀가 피곤하게 승부에 집착하는 것을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뭐, 어쨌든 이제 볼일도 없는 사람이니까. 설마 내가 그녀랑 또 승부를 해야 할 일이 생기겠어?
그리하여 우리는 다시 복귀 행군을 시작하여 부대에 도착했고.
“와, 드디어 도착이다….”
다른 후임들이 기쁨을 표하는 가운데, 나는 홀로 경계하는 눈빛으로 주위를 살폈다. 틀림없이 곧 사고가 터질 텐데….
“야! 빨리 들 것 가지고 와!”
“철조망부터 막아! 그게 우선이야!”
역시나 부대의 분위기는 어딘지 소란스러웠다. 부대에 남아 있던 장교들과, 파견 근무를 나왔던 다른 부대원들이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큰 사고가 터진 분위기에 부대원들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고, 지휘사관들이 상황을 파악하러 장교들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아, 그게….”
마침 밖에 나와 있던 행보관이 곤란하다는 얼굴로 답했다.
“파견 근무를 나왔던 부대원들 중 한 명이 죽었다.”
“…예?”
그 말에 지휘사관들은 당황하여 자리에 굳었고, 카론도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물론 일등병들이 경계 근무를 서다가 죽는 건 꽤 흔한 일인데, 파견 근무를 나오는 건 상등병들 이상이므로 그들이 사망하는 일은 웬만해서는 없었다. 게다가 다른 부대에서 죽음을 맞다니 이건 상당히 비극적인 일이었다.
그렇지만 지금 문제는 다른 부대 병사의 죽음만이 아니었다. 행보관이 급박한 얼굴로 우리에게 크게 손짓하며 외쳤으니까.
“부대원이 죽으면서 소원 마법이 발동되어서, 일대의 마물들이 전부 죽으며 그 여파로 철조망이 박살 났다! 얼른 보수해야 해.”
* * *
그 ‘소원 마법’이라는 게 뭔지 제대로 설명도 듣지 못한 채, 우리는 피로에 절은 상태로 철조망을 보수하러 이동해야만 했다.
부대원이 죽었다는 자리에는 핏자국이 남아 있었을 뿐, 이미 그의 유해는 수습되어 사라진 상태였다.
다만 눈에 띄는 건 거대한 폭발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엉망이 된 그 일대였다.
부대원을 습격했다는 거대한 독수리 모양의 마물은 처참하게 난도질당해 쓰러져 있었고, 마물이 산다는 국경 너머로도 몇몇 마물이 땅에 쓰러져 있는 게 보였다.
엉망이 된 건 마물만이 아니었고, 부대원이 죽은 자리와 가까운 철조망들은 모두 너덜너덜한 꼴이 되어 쓰러져 있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일대의 마물은 전부 죽어 있었지만 다른 곳에 있는 마물이 언제 국경을 넘어올지 모르므로 우리는 일단 서둘러 철조망을 보수했다. 실제로 일부 마물들은 국경을 넘어 우르르 넘어왔고, 파견 온 부대의 병사들은 그를 목격했지만 미처 막지 못했다고 한다.
“대체 그 ‘소원 마법’이라는 게 뭐지?”
“나도 처음 듣는 말이야.”
내가 이 세계에 대해 물어보면 아퀼라가 늘 상세하게 알려 주고는 했는데, 이번엔 아퀼라도 그게 뭔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원작에서도 ‘사고로 인해 국경 철조망이 파손되었다’라고만 했을 뿐, ‘소원 마법’ 같은 건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저는 들어 본 것도 같은데, 잘 기억이 안 납니다…!”
카론이 그렇게 말하는 걸 보아 흑마술과 관련되어 있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산체스!”
“예.”
“소원 마법이 뭔지 알아?”
그리고 역시나 흑마술 전문가인 산체스는 내 질문에 답을 내놓았다.
“예, 알고 있습니다.”
“역시! 빨리 설명해 봐!”
물어보기 전까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는 게 참 답답하긴 하지만, 이 정도까지 길들여진 것에 만족해야지 어쩌겠는가.
산체스는 ‘소원 마법’에 대해 찬찬히 설명을 시작했다.
“소원 마법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우선 계약 마법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계약 마법에 걸려 있는 대상은 모두 체내에 약간의 마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계약 마법’이 걸려 있는 만큼, 그 여파로 우리도 마력이 조금 남아 있다는 거겠지? 그건 나도 이해가 갔다.
“그리고 그 대상이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아주 간절하게 소원을 빌 때, 체내에 남아 있던 마력은 대상이 바라는 바를 이룰 수 있는 방향으로 움직이기도 합니다.”
“뭐? 정말?”
그렇다면 계약 마법이 걸려 있는 모든 아르콘은 죽으면서 바라는 바가 이루어진다는 소리인가?
“하지만 대상의 소원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정말로 희박합니다. 목숨을 걸 수 있을 정도로 아주 간절한 바람이어야 하고, 죽기 이전부터 늘 바라오던 소원이어야 합니다.”
하긴, 그간 국경방위군에서 죽은 사람을 내가 두 자리 수 정도는 봤는데, 그들 중 누군가의 소원이 이루어졌다는 건 본 적이 없다. 역시 마력을 증폭하여 소원을 이루어지게 하려면 아주 간절한 염원을 품고 있어야겠지.
“그럼 죽은 부대원이 품은 소원은 뭔데?”
“일대의 마물이 전부 죽은 걸 보니 아무래도 이전부터 마물을 없애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아하….”
평생의 소원이 고작 마물의 제거 정도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국경방위군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자에게는 또 다른 법이다. 마물에 의해 목숨을 잃은 수많은 동료들을 봐 왔고, 마물만 아니었다면 여기서 이러고 있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늘 했을 것이다.
내가 황제와 흑마술사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것처럼 그는 마물에게 뿌리 깊은 증오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죽는 순간 ‘소원 마법’이라는 게 발동되어 마력이 폭발하며 마물들은 죽었고, 그 여파로 철조망까지 찢겨 나간 거겠지.
“그런데 우리는 왜 이런 얘기를 처음 듣지? 우리랑 관련된 건데.”
“어쨌든 금지되어 있는 흑마술의 여파이니까 알리지 않은 거 아닐까. 행보관님이 알고 있던 거는 오랜 시간 동안 군대에 있으면서 드물지만 비슷한 일을 목격한 적이 있어서일 거고.”
“그런가.”
나는 아퀼라의 말을 수긍했다. 하긴 행보관님이 먹은 짬밥이 어느 정도인데.
물론 우리랑 깊이 관련된 마법인데도 알려 주지 않은 황실은 괘씸하기 짝이 없었지만, 황실이 우리 인생에 도움이 된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뭐 그렇다 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