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권?’
혹하는 얘기였기에 나는 잠시 눈을 빛냈다.
하지만 뭐, 내가 최우수 병사로 지목될 일은 없어 보였다. 우리 소대에서만 해도 나보다 뛰어난 병사들이 많았으니까.
검술은 아퀼라랑 베니가 잘하고, 힘은 산체스가 뛰어나고, 체력은 카론이 좋고….
게다가 뒤에 이어질 마물 토벌을 고려한다면 괜히 최우수 병사의 자리를 노리느라 체력을 허비하지 않는 편이 낫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이어진 대대장의 말에 다시 내 눈은 이글이글 타오를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사격 시합을 해 보도록 하지.”
…이것만큼은 질 수 없다.
다 뒤졌어, 이 XX들아!
* * *
나는 우리 중대에서는 내 사격 실력이 가장 나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사실 다들 재능은 뭐 고만고만했지만, 우리 중대에서 총을 쓰는 사람 중 짬을 가장 많이 먹은 건 나니까.
그러니 이제 중요한 일은 다른 중대의 병사들을 이기는 것이다.
이번 사격 훈련은 날아가는 원판 모양의 타깃을 쏴 떨어뜨리는 것으로 확인하기로 했다. 더 많은 원판을 떨어뜨린 사람이 최우수 병사가 되는 것이다.
“사루비아 님이 당연히 가장 뛰어나실 겁니다!”
달린이 언제나 그렇듯 눈치 빠르게 아부를 하기에 흡족해진 나는 다음에 그녀가 사고를 쳤을 때 1회 감면권을 선사해 주기로 했다.
지금 내 경쟁자는 16중대의 지휘사관 한 명과 17중대의 상등병 한 명. 16중대의 지휘사관은 10개의 원판 중 9개를 명중시켰다.
‘역시 지휘사관답게 솜씨가 좋아.’
순서가 무작위로 정해졌기 때문에 그의 다음이 바로 내 차례였다.
무조건 10개 전부를 명중시켜야 한다. 나는 이를 악물고 총을 꽉 잡았다. 마침내 원판이 하늘로 날아감과 동시에.
탕-! 탕-! 탕-!
작은 총성이 들리고, 잠시 후 나는 천천히 땅바닥에 떨어진 원판들을 확인했다.
“10개.”
전부 명중이었다!
나는 밝아진 얼굴로 총을 내려놓고 아퀼라와 카론에게로 달려갔다. 이대로라면 최우수 병사는 따 놓은 당상이었다.
“사루비아 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사루비아, 정말 멋졌어.”
카론이 내 팔에 매달리다시피 하며 내게 감탄했고, 아퀼라까지 나를 칭찬해 주는 가운데 나는 기분이 몹시 좋아졌다.
물론 아직 관건은 남아 있었다. 17중대 상등병도 10개 모두를 맞출 수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재시합을 하게 될 것이다.
17중대의 상등병과 내 눈이 마주쳤다. 보라색 머리를 하나로 높이 묶은 그녀가 나를 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자신감이 있는 모양이었다.
‘에휴, 요즘 애들은 버르장머리가 없어.’
평소처럼 그렇게 생각하며 가볍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문득 나는 저 여자 후임의 정체를 깨달았다.
‘…쟤가 바로 그 비올렛인가?’
베니의 검술 실력이 다른 중대까지 소문났듯이 저 여자 후임, 비올렛의 사격 실력도 상당하기로 유명했다. 하지만 그녀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그게 아니다.
내가 들은 소문에 의하면 비올렛은….
‘미친 승부 중독자!’
예전에 블루가 나한테 말하기를, 17중대에는 승부에 미쳐 있는 여자 병사가 한 명 있다고 했다. 그녀는 자신의 상대가 될 법하다고 생각하는 병사가 보이면 사사건건 경쟁해서 승부에서 이기고자 하는 미친X이라고 했다.
“17중대에는 승부에 집착하는 미친X이 있대.”
“그래? 우리 중대에는 그런 미친X이 없어서 다행이네. 후임들이 엄청 피곤하겠다.”
“…우리 중대 미친X은 사루비아 너….”
“지금 뭐라고 했냐?”
“하하, 아무것도 아니야. 으응, 우리 중대에는 사루비아 네 덕에 미친X이 없어서 참 다행이라는 거지….”
그래서 내 눈앞에 있는 상등병이, 바로 그 소문 속 미친X이라는 거지?
“하! 사루비아 님, 승부입니다! 사격은 무조건 제가 이깁니다!”
…게다가 그녀의 저 태도를 보자니 유감스럽게도 비올렛은 내게 꽂힌 모양이었다….
저 미친 승부 중독자의 눈에 한 번 든 이상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아, 나는 불안해졌다. 승부에 미쳐 있는 비올렛이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면 난 상대조차 안 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내가 대놓고 그녀를 방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만약 직접적으로 방해한다면 누군가가 내게 제재를 가하겠지.
물론 정상적인 군인이라면 애초부터 방해할 생각을 하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승부하겠지만, 여긴 국경방위군이었다. 약육강식의 세계지.
잠깐, 직접적으로 방해할 수 없다면….
‘그럼 간접적으로 방해하면 되는 거 아닌가?!’
약육강식의 세계에 걸맞는 훌륭한 방법이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패티! 매티!”
“예?”
비올렛이 총을 고쳐 잡는 사이, 그녀와 약간의 거리를 두고 선 내가 패티와 매티에게 손짓했다.
“패티, 매티. 너희 저번에 다친 곳은 괜찮냐?”
“아, 빨랫줄로 줄넘기하다가!”
“다친 곳 말씀이십니까?”
“예! 저희는!”
“괜찮습니다!”
“푸흡!”
패티와 매티의 말이 들렸는지, 비올렛이 웃음을 터뜨리며 허리를 꺾었다.
‘역시 뭐든지 쓸 곳은 있군.’
빨랫줄로 줄넘기하기, 둘이서 대사 나눠서 하기. 나는 이제 패티와 매티가 저지르는 기행들에 익숙해진 상태였지만, 다른 부대 사람들이 듣기에는 이만한 코미디가 없을 것이다.
“저번에 외부 근무에서 다친 곳도 괜찮지? 훈련하다가 덧날까 봐 걱정이 되네.”
“아! 독수리한테 물려갔다가!”
“저희가 발버둥 치는 바람에 떨어져서 나무에 걸렸을 때 말씀이십니까?”
“예! 나무에 걸린 덕에 크게 안 다쳤습니다!”
“제이슨이 저희를 구해 줬습니다! 역시 제이슨입니다!”
“크흐흑!”
이제 비올렛은 거의 울다시피 웃고 있었다.
그리하여 잠시 후 그녀가 총을 쏴야 했을 때도 그녀는 집중력을 상실했는지 일곱 개의 원판을 맞추는 데에만 성공했다.
‘뭐, 조금 비겁하긴 했지만….’
하지만 나는 패티와 매티의 저런 대화를 실제로 들으며 매일 총을 쏴야 했다고!
국경방위군은 역시 약육강식의 세계였다.
그날 나는 대대장으로부터 소원권을 얻었다. 비록 비올렛이 “크으윽…. 패배라니….”라고 중얼거리며 나를 무지하게 노려보긴 했지만 어쨌든 나는 원하던 목표를 달성했다.
“그래. 사루비아라고 했나?”
“네, 그렇습니다.”
“원하는 게 뭐지?”
…그러고 보니 소원권이라는 말에 반사적으로 눈이 돌아가기는 했지만, 뭘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정작 내가 원하는 게 뭔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경계 근무 휴가라도 달라고 할까?
“원한다면 내가 외출할 때 잠시 따라 나오게 해 줄 수도 있고, 외부인과 편지를 주고받게 하거나 잠깐의 짧은 면회를 허락할 수도 있네.”
‘외출이나 면회까지 된다고?’
대대장은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통이 컸다. 그가 인자한 눈으로 내려다보며 하는 말에 나는 진심으로 감동해서 그의 인격을 칭송했다.
“지금은 답하기 어려운가 보군. 어차피 유격 훈련이 많이 남았으니 그럼 훈련이 끝나고 다시 얘기하도록 하지.”
“예, 알겠습니다!”
나는 그동안 내가 원하는 일이 뭔지 고민해 보기로 했다.
어차피 내가 이 세계에서 만나고 싶은 외부 사람 같은 건 없다. 하지만 밖에 나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도 있겠지. 정말 행복한 고민이었다.
* * *
5일간의 유격 훈련 동안, 우리는 다른 부대의 인원들과 내무반… 아니, 숙소를 함께 사용하게 되었다.
부대에 있는 여자의 수가 워낙 적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었다. 다른 소대 인원들과 함께 쓰는 것 정도야 나쁘지 않았지만, 문제는 숙소에 다른 중대의 인원도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낯선 얼굴들 말이다.
지휘사관용 숙소는 따로 존재했기에, 다음 달에 지휘사관이 되는 내가 아마 이 숙소에서도 가장 기수가 높을 것이다. 그러니 딱히 눈치를 보지는 않아도 되겠지.
“사루비아 님, 훈련 수고하셨습니다!”
“어, 리지. 너도 수고했다.”
내 감마 소대의 동기 데미안의 맞후임인 리지가 내게 인사를 건네 왔다. 그밖에도 나는 베타 소대와 감마 소대의 여자 후임들과 잠깐 대화를 나눴다.
그때 베타 소대의 상등병 앨리스가 부대 한쪽을 흘끗 보며 말했다.
“그런데 사루비아 님, 혹시 저분이랑 싸우셨습니까?”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에 있는 건 비올렛이었다. 비올렛이 뾰족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뭐, 내가 좀 빡치게 한 것 같긴 한데.”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조금 비겁한 방법이기는 했다, 흠….
“하긴, 저분은 사루비아 님을 모르시니까.”
앨리스가 그렇게 말하자, 리지가 그녀와 묘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뜻이야?”
“저희야 뭐 사루비아 님이 어떻게 행동하시든 그러려니 하는데, 모르는 분은 저렇게 불만을 가질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저희처럼 공포가 존재하지 않아서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정말로 이해할 수 없어 내가 눈을 가늘게 뜨던 그때.
“…앞으로는 절대 지지 않겠습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의 비올렛이 내게 그렇게 말했다.
“…뭐?”
“승부에서 이기기 위해 그런 방법까지 사용하시다니, 제가 미처 생각해 본 적 없는 방법이었습니다. 앞으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부에서 이기도록 하겠습니다.”
“…누구랑 승부를 하는 건데?”
“당연히 사루비아 님 아니겠습니까?”
나는 깨달았다.
아무래도 X된 것 같다. 저 미친 승부 중독자의 눈에 단단히 찍혀 버렸다.
게다가 원래 그녀는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했는데, 나 때문에 ‘편법’이라는 걸 익혀 버린 것 같다.
“와, 사루비아 님 말고도 또 미치신 분이 있구나.”
“비올렛 님을 승부에서 이기시다니,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저분도 불쌍하네. 앞으로 거머리처럼 따라붙을 텐데.”
“내가 듣기로는 저분도 범상치 않은 것 같던데?”
우리 중대와 비올렛네 중대의 후임들이 뭐라 수군거리며 대화를 하는 가운데, 나는 두 손으로 내 머리를 감싸 쥐며 고통스러워할 뿐이었다.
왜 어딜 가나 자꾸 이상한 X이 달라붙는 거지? 정말 환장할 노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