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이 잠시 멍청한 얼굴로 자신의 귀를 후비적거렸다.
“내가 잘못 들었나? 뭘 한다고?”
“유격 훈련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뭔 소리야?”
블루는 자신의 손을 들어 뺨을 때리며, 이게 현실이 맞는지를 확인하기 시작했고.
한편 나는 너무 놀라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다.
“사루비아, 괜찮아?”
아퀼라는 놀라서 내 상태를 살피느라 반응할 시간도 없었다.
“사루비아, 내 눈 좀 봐 볼래, 응?”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우리는 좀 진정할 수 있었다.
…아니, 그런데 로판에서 유격 훈련이 왜 나오는데요.
‘지금 장난하나, XX.’
그래, 여기가 로판 세계이기는 하지만 이미 로맨스는 날아간 것 같으므로, 그렇다면 그냥 판타지 세계라고 생각을 해 보자.
…하지만 판타지 세계에서도 주인공이 유격 훈련 따위를 받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포칼립스 쪽도 마찬가지다. 아포칼립스 세계에서는 몬스터와 싸워 포인트를 얻거나 레벨 업을 하거나 게이트를 닫지, 군에 입대하여 유격 훈련을 받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이미 이 세계에서 계속된 행군과 얼차려 등으로 인해 군대에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유격 훈련’이란 단어를 들은 순간 도저히 이성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유격 훈련을 받지 않았다. 듣기로는 국경방위군이 아닌 다른 군에서는 유격 훈련을 받는다고 했는데, 우리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일이었다. 아마 우리에게는 마물을 잡는 게 주요 일과였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동안 우리가 국경방위군에서 주로 해 왔던 훈련은 신체 자체를 단련하기 위한 것과, 마물을 상대하기 위한 전투 진형 정비였다.
그러나 유격 훈련에서는 ‘마물’이 아닌 ‘사람’과 전투할 경우에 대비한 훈련을 한다. 사람이 파 놓은 장애물을 극복하고, 작전 수행을 위한 다양한 방법을 연습하는 훈련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유격을… 잠깐만.
“국가 정세!”
“응?”
“지금 전쟁이 터질 걸 대비해서 유격 훈련을 하는 거잖아!”
떡밥을 이런 식으로 회수하다니, 도대체 내 인생은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 거지?!
진짜 펠로니 제국과 전쟁을 하는 거라고?
하지만 원작에서 전쟁 얘기는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는데! 일단 이 국면이 그저 도발에서 끝나기를 간절히 믿어 보자.
“아오, XX….”
후임 관리에서 거의 손을 뗀 이후 욕이 많이 줄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화가 끓어올라서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부대로 돌아가서 후임들에게 유격 훈련에 관한 소식을 전달하고 훈련을 준비할 생각을 하니 정말 눈앞이 캄캄했다. 나 하나도 건사하기 힘들 것 같은데, 후임들까지 챙겨야 한다니.
그렇지만 나에게는 후임들을 이끌 책임이 있는 것이다…. 결국 나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전달하기 위해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좋아, 완벽해.”
그 시각, 달린은 청소를 마친 여자 숙소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입대한 지 시간이 꽤 흘렀으니, 실수투성이였던 달린에게도 이제 숙소 청소쯤은 껌이었다.
그녀가 이제 되었냐는 눈으로 베니를 쳐다보자 베니가 꼼꼼하게 숙소 구석구석을 살폈다.
“음, 마룻바닥 틈에 먼지가 남아 있는데.”
“예? 그, 그걸 어떻게 닦습니까?”
“사실 거긴 안 닦아도 되긴 해. 가끔 사루비아 님이 기분이 안 좋으신 날에는 그곳까지 검사하지만.”
“사루비아 님은 늘 기분이 안 좋으시지 않습니까…?”
“아냐. 달린 네가 아직 사루비아 님을 덜 알아서 그런데, 평소에는 대개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 않은 상태이셔. 진짜 기분 나쁜 날은 따로 있지.”
베니는 과거 에인젤이 살아 있었을 때, 숙소에서 허공을 보며 혼자 욕을 내뱉던 사루비아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 숙소 분위기는 정말 살벌했었지.’
왠지 아련해져서 베니는 자신의 코 밑을 쓰윽 쓸었다.
평소의 사루비아가 사실은 기분 좋은 상태였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 달린과 지나가 벌벌 떨고 있을 때, 새로 들어온 신병 티아는 혼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아, 티아. 너는 사루비아 님에 대해 아직 잘 모르지.”
그녀의 표정을 알아차린 달린이 의기양양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설명을 시작했다.
453기 신병 티아는 구불구불한 파란 머리카락에 하늘색 눈을 가진 청초한 인상의 신병이었다. 생긴 것처럼 성격도 순수하고 착한지라 달린과 지나는 그녀를 나름 챙겨 주고 있었다.
“사루비아 님은… 좀 미쳐 계셔.”
“그렇지.”
지나가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좋은 분이셔.”
이번에는 지나가 이상한 눈으로 달린을 쳐다봤다.
“아아, 그렇습니까….”
티아가 선임들의 말에 어떻게 대답할지 몰라 어색하게 맞장구를 치던 그때.
쾅-!
요란한 소리를 내며 숙소의 문이 벌컥 열렸고.
그 문 너머로 들어오는 사루비아의 모습을 본 순간.
‘왜 또 저런 표정이지?’
익숙한 표정을 발견한 베니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고.
‘…바로 저거다.’
달린과 지나, 티아는 베니가 말한 ‘사루비아가 기분이 좋지 않은 날’이 언제인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셰퍼드 하나 발령. 셰퍼드 하나 발령!’
베니가 급히 후임들에게 눈으로 경고 태세를 보냈으나, 안타깝게도 그녀의 노력은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다.
“XX, 가뜩이나 유격 훈련 때문에 XX 빡치는데 장난하냐? 요즘은 애들이 왜 이렇게 빠졌어?”
왜냐하면 이미 사루비아의 분노는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얘들아! 마룻바닥 틈에 먼지가 있잖아아악!”
베니는 자신이 상등병이 된 것에 그 어느 때보다 감사하며, 자신의 후임들에게 애도를 표했다.
* * *
여전히 믿기지 않는 현실이었지만, 우리는 군장을 챙겨서 유격장으로 떠났다.
유격 훈련은 보통 대대 단위로 이루어지는데, 대대장도 유격 훈련 소식을 갑자기 전달받은 듯 난감해하면서도 우리를 애써 격려해 주었다.
하지만 그가 우리를 격려하든 말든 우리는 금방이라도 탈영하고 싶은 얼굴로 군장을 쌌고.
유격장으로 가기 위해서는 국가방위사령부의 군인들이 쓰던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했는데, 당연하지만 우리는 걸어가야 했다. 비어 있는 경계 초소는 다른 부대에서 파견 근무를 나와 주기로 했다.
“정말 이건 말도 안 돼.”
유격 행군을 하며 내가 카론에게 한 말이었다. 지난번에 했던 행군보다는 덜 힘들었지만, 어쨌든 이것도 ‘행군’인 이상 편할 리는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내가 이제 상말이라는 사실이었다.
“산체스, 믿겠다.”
“예, 걱정 마십시오.”
산체스는 모든 후임을 혼자서 실수도 없이 챙기는 기행을 보여 주었고 덕분에 나는 내 행군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런데 대체 유격 훈련에서는 뭘 하는 거지?’
내가 유격 훈련이 정확히 어떤 훈련들로 구성되어 있는지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음, 그래도 텔레비전의 군대 예능에서 나왔던 이미지를 떠올려 보자면….
‘…흙바닥에서 구르던데?’
XX, 오랜만에 탈영하고 싶군….
그때 유격장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었다.
“야, 얼마 안 남았으니까 정신 놓지 마라!”
앞쪽에 서 있던 내가 그렇게 외치고 유격장 너머의 모습을 본 순간.
“XX.”
후임들이 정신을 놓는 것보다 내가 정신을 놓는 게 더 빠를 것 같았다.
왜냐하면 내 눈앞에 있는 건 바로….
“레, 레펠*…?”
(*레펠: 높은 위치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오는 장치.)
유격장 안, 기둥에 연결되어 있는 세 개의 레펠이 보였다…. 물론 저게 무슨 용도인지는 뻔했다. 우리가 기어 올라갈 용도겠지, XX.
남들이 로판에 빙의했을 때 밧줄을 타고 내려온다면 보통 다음과 같은 이유였다.
‘성에 갇혀 학대받는 영애가 되어서 커튼으로 밧줄을 만들어 타고 내려와 도망치는 거지.’
그런데 왜 내 밧줄 타기는 그처럼 로맨틱해질 수가 없단 말인가?
나는 오늘도 눈물을 흘리며 내게 닥친 로맨틱하지 않은 역경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XX.
* * *
그래, 다시 생각해 보니 원작에서도 유격 훈련이 등장하기는 했다.
그렇지만 ‘네미집’에서는 ‘유격 훈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당연하지, 그건 로맨틱하지 않잖아.
원작에서는 대대 단위의 훈련이 있었다는 말만 있었고, 거기서 달린이 레펠 훈련을 하던 중 손바닥이 까졌다는 내용이 나온다. 참고로 그녀가 레펠 훈련을 하는 자세한 과정은 나오지 않았다. 로맨틱하지 않기 때문이겠지.
어쨌든 아퀼라는 달린의 까진 손바닥을 보며 무척 속상해하고 친히 약을 발라 준다. 그리고 그녀가 빠르게 회복할 수 있도록 다른 일들을 모두 대신해 주었다.
…갑자기 또 열 받는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이제 내 분노의 이유를 찾지 않기로 했다. 내가 이곳에서 분노하는 게 하루 이틀인가, 뭐.
“야, 아퀼라.”
“응.”
“만약 후임 중 부상자가 발생하면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아?”
“그건… 상태를 확인하고 의무관에게 맡긴 후 소대장님께 보고해야겠지.”
“그래. 딱 거기까지야. 알겠어?”
“알겠어….”
아퀼라는 영문을 모르는 눈치였지만 그냥 잘 일러두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남들이 곧 닥칠 훈련에 긴장하고 있을 때, 나는 홀로 원작 ‘네미집’의 전개를 떠올렸다.
사실 원작의 ‘훈련’ 파트에서 중요한 건 훈련 그 자체가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훈련 뒤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유격 훈련이 막 끝나고 병사들이 숙소로 돌아가던 길에, 사고로 인해 국경의 철조망이 파손되고 그 너머에 있던 마물들이 산으로 대거 몰려오게 된다. 훈련으로 인해 가뜩이나 지쳐 있던 병사들은 넘어온 마물들을 해치우기 위해 진땀을 뺐다.
한편 달린은 자신의 능력을 성공적으로 사용하며 발전하게 되고…. 뭐, 대충 그런 달린의 각성 전개였다.
‘그러니까 훈련이 아무리 힘들어도 정신을 놓으면 안 되는 거지.’
훈련에서 모든 체력을 다 써 버린다면 이후에 있을 마물 토벌에서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즉 이 유격 훈련에서 중요한 것은 적당한 수준의 체력을 남겨 놓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모든 일이 내 뜻대로 진행될 리 없었다, XX.
훈련은 지옥이었다.
우리는 굴렀다. 비유적 표현이 아니다. 정말로 땅 위에서 굴렀다는 소리다.
그 후에는 피티 체조 천 개를….
“1,000!”
“1,000!”
“마지막 구호! 마지막 구호, 이 미친놈들아! 내가 너희를 이번만큼은 진짜 죽여 버리겠어!”
아퀼라가 나를 붙들어서 말리지 않았다면 패티와 매티를 거의 죽일 뻔한 사고가 있었긴 했지만, 어쨌든 그렇게 훈련은 계속해서 진행되었고….
“자, 이제 국경방위군 체조 1번부터 18번까지 진행한다.”
‘이런 XX.’
왜 마물에 의해 죽거나 총기 사고로 인해 죽었다는 국경방위군 군인은 있어도 체조를 하다가 죽었다는 병사는 없는 걸까?
“귀랑 어깨 더 멀리!”
“고관절! 고관절을 더 쓰란 말이야!”
“갈비뼈를 차례로 닫도록!”
…대, 대체 갈비뼈는 어떻게 닫는 거지? 그리고 왠지 전생에 운동을 할 때 저런 말을 들어 본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그 와중에도 나는 내 몸뿐만 아니라 다른 후임들의 몸까지 함께 챙겨야 했다.
“티아아아아! 정신! 차려! 신병이 벌써부터 빠져 가지고는!”
특히 신병 티아를 철저하게 관리하며, 식사 시간이 되기 전까지 우리는 체조를 하며 미친 듯이 굴렀다. 팔다리가 끊어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최악이야….”
내가 흙투성이가 되어 자리에 주저앉은 채 중얼거리자, 아퀼라는 말없이 내 뺨에 묻은 흙을 닦아 주었다.
“머리카락 색 좀 봐 봐.”
내가 끝이 갈색으로 변한 머리를 보며 인상을 팍 찌푸리자, 아퀼라는 또 담담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괜찮아. 귀엽잖아.”
“응….”
그러나 지금 내가 얼마나 흙투성이가 되었는지를 신경 쓸 때가 아니긴 했다. 왜냐하면 식사 후에도 훈련이 예정되어 있었으니까.
식사 후 우리가 흐느적거리며 연병장에 모였더니, 대대장이 우리를 둘러보고는 허허 웃으며 말했다.
“다들 꼴이 말이 아니군. 그렇게 힘들었나?”
“아닙니다!”
“당연히 힘들 텐데, 나도 이해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지….”
대대장이 인자한 미소를 얼굴에 띠었다.
“앞으로의 훈련마다, 매일 최우수 병사를 한 명씩 뽑겠다. 그리고 소원권을 하나씩 지급하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