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동기 블루는 이제 이시나 님을 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던데 말입니다.”
아퀼라가 미소지으며 말했다.
동기 블루에게 새로운 정보가 생길 때마다 사루비아에게 알려 주라고 지시한 건 바로 이시나였던 것이다.
그는 블루가 정보를 수월히 얻을 수 있도록 행정반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하하, 별거 아니었어.”
“뭐, 당연히 저희가 해야 할 일이었지 말입니다.”
“사루비아 님이 요즘 기분 좋아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이 순간 이시나와 아퀼라, 그리고 카론은 모두 즐겁게 웃고 있었다. 사루비아가 본다면 자신을 빼놓고 뭐가 그리 즐겁냐고 물을 법한 얼굴이었다.
그 와중에 이시나는 블루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이시나 님. 사루비아는 맞선임과 동기 중에는 역시 동기가 더 가까운 사이지 않겠냐고 했지만….”
“…했지만?”
“그래도 두 분 다 좋다고 하셨습니다.”
“흠, 어렵네….”
그가 원하는 건 단지 사루비아가 아퀼라보다는 자신의 말을 더 잘 듣는 것이었지만, 역시 그 일이 이루어지는 건 어려워 보였다.
그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아퀼라가 삐딱하게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 이시나를 향해 말을 덧붙였다.
“이시나 님, 처음에는 그렇게 계획에 참여 안 한다고 하셨으면서.”
“하지만 화가 나는 걸 어떻게 하겠어.”
이시나가 여전히 웃음을 유지한 채 말했다.
“저 쪼그마한 애 건드릴 데가 어디 있다고.”
“맞는 말씀입니다. 누구는 애 다칠까 봐 힘줘서 손도 잘 못 잡는데.”
“…잠시만, 손을 왜 잡아? 잡지 말라고!”
* * *
제대 D-822일.
시간이 흘러, 오늘은 마침내 이시나가 진급하는 날이었다.
“이시나 님, 어디로 배정받으셨습니까?”
“제40보병여단이야.”
“어, 옛날에 유리 님이 가셨던 그곳 아닙니까?!”
“그래, 맞아. 이제 유리 님도 제대하셨겠지만.”
부대원들의 옛 흔적을 찾은 듯한 기분에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내가 생각보다 부대원들을 많이 소중하게 여기고 있긴 했나 보다.
쿨민트아이스민간인 78기도 이제 잘 지내고 있겠지?
“이시나 님, 그곳에서도 잘 지내시길 바라겠습니다. 3개월 뒤부터는 꼭 편지하겠습니다!”
이시나의 부대 주소를 메모해 둔 내가 양 주먹을 꽉 쥐고 말하자, 이시나가 어쩐지 인자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사루비아, 내가 떠나기 전에 너에게 꼭 당부하고 싶은 것들이 있어.”
“그게 뭡니까? 참고로 저 이제 군화 끈도 완벽하게 묶고, 머리카락도 완벽하게 묶고 셔츠 깃도 잘 세우고 다니고….”
“응, 그런 거 말고.”
이시나가 옆에서 우리를 빤히 바라보던 아퀼라를 흘기더니, 나에게 가까이 서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루비아, 제발 위험한 짓은 하지 말고 얌전히 지내고….”
“예!”
“자꾸 카론 좀 꼬드겨서 너랑 같이 위험한 일 하게 만들지 좀 말고….”
“예….”
“그리고 화내는 횟수를 줄여 봐. 진심으로 네 건강이 걱정된다.”
“아니, 근데 달린이 먼저….”
“그놈의 ‘아니, 근데’라는 말도 좀 줄이고.”
“…….”
“무엇보다 마지막으로.”
갑자기 이시나의 눈빛이 비장해졌다.
“네 동기한테 너무 모든 걸 의지하지는 말고.”
“…음.”
“알았지. 명심하란 말이야? 제발 듣는 척이라도 좀 해 줘.”
“완전! 명심했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래…. 그럼 꼭 편지해.”
내게 수많은 조언들을 남긴 뒤, 이시나는 우리가 만들어 내는 길 사이에서 진급을 위해 떠났다.
맞선임이 떠난다니, 왠지 마음 한구석이 찡해지는 기분이었다.
‘이시나는 그래도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흑막은 아니었나 봐.’
그는 “거슬리군.”을 시전하고도 흑막 짓을 하지 않았다. 이건 완전한 흑막 클리셰 파괴였다. 참 놀라운 일이다.
하긴 이제 와서 원작을 따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동안 이시나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의심했던 게 조금 미안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중에 제대하고 만나게 되면 더 잘해 줘야겠다.’
이시나를 배웅하고 나서, 나는 내 옆에 있던 아퀼라와 카론을 돌아보았다.
“이젠 진짜 우리뿐이네.”
“그러게.”
“이시나 님이 아퀼라 너한테 너무 의지하지 말라고 하시네. 흠….”
그의 마지막 말을 아퀼라에게 전하니, 아퀼라는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짓다가 이윽고 이렇게 말했다.
“그럼 반대로 내가 너한테 의지하는 건 되지 않을까.”
“…정말 그렇네!”
그래, 내가 아퀼라에게 의지하지 않고, 이제 아퀼라가 나한테 의지할 수 있을 만큼 내 자신이 더 멋진 동기가 되어 주는 거다!
이렇게 한다면 이시나의 조언을 지키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니 이시나도 만족할 것이다!
#14. 그래서 로판에서 유격이 왜 나오는데요
“한 달째 푸딩이 안 나와서 기분이 별로야.”
“그랬어? 괜찮아, 내가 건의해 볼게.”
“고마워! 그리고 또….”
한창 아퀼라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누군가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기에 나는 입을 다물고 얼른 그의 곁에서 떨어졌다.
솔직히 내가 아퀼라의 팔을 이렇게 붙들고 있는 게 발각당한다면 영창감이라는 사실을 나 스스로도 모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시나 님, 죄송.’
이시나는 나더러 아퀼라한테 의지하지 말라고 했지만, 아퀼라는 내가 그에게 의지하는 걸 좋아하는데 뭐 어쩌겠는가.
어떻게 생각하면 아퀼라가 원하는 대로 내가 그에게 의지해 주는 게, 아퀼라가 나한테 의지하는 거나 다름없는 일 아닐까?
“사루비아 님, 아퀼라 님.”
이쪽으로 걸어오던 발걸음의 주인은 베니였다. 베니는 늘 내 충성스러운 후임이었기에 나는 긴장을 풀고 다시 아퀼라의 옆으로 슬그머니 이동했다.
“아, 베니. 무슨 일이니?”
“…이제부터 저를 ‘베니’가 아니라, ‘피아노 반주의 전문가 베니’라고 불러 주십시오.”
“뭐?”
“저는 결혼식 반주에 참 적합한 인재이지 말입니다. 어릴 적부터 유일한 취미로 피아노를 쳐 왔습니다. 특히 결혼식에 자주 쓰이는 곡들을 참 잘 칩니다.”
“그, 그래. 근데 그런 걸 왜 나한테 얘기하는 건데?”
“명심해 두도록 하지.”
떨떠름하게 반응한 나와 달리 아퀼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답했다. 베니가 흡족한 얼굴을 하더니 본 용건을 꺼냈다.
“이번에 새로운 대대장님이 부임해 오신다고 합니다.”
“대대장님이 바뀐다고?”
사실 대대장은 우리와 큰 상관이 없는 사람이기는 했다. 어차피 우리는 주로 소대나 중대 단위로 생활했고. 대대장은 가끔 행군을 할 때나 대형 마물 토벌을 나갈 때 만나는 사람이었다.
“그래. 하지만 우리한텐 큰 영향 없는 거 아닌가?”
내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기울이자 아퀼라가 나와 눈을 마주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부대 전체의 분위기가 바뀔 수도 있을 거야. 운이 안 좋다면 훈련이 빡세질 수도 있지.”
“아, 그렇구나!”
이곳에서 지내면서 ‘생각’이라는 걸 하지 않고 만사를 ‘폭력과 공포’로 해결했더니 잠시 잊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건 원작에도 나온 일이었지.’
기억을 되짚어보니 대대장이 바뀌는 것은 원작에서도 등장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묘사에 따르면 새로 바뀐 대대장은 의외로 참 인간적이고 좋은 사람이었다.
그러니 아마 부대의 분위기는 오히려 더 좋은 쪽으로 바뀌지 않을까? 우리의 걱정과 다르게 말이다.
* * *
대대장 부임식을 위해 세 중대가 한 곳에 모인 날, 대대장은 우리를 보며 인자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힘든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나를 찾아와도 좋다. 그 일로 인해 너희가 받는 불이익은 없도록 할 것이다.”
다행히도 원작에 나온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원작에서의 그는 부대원들의 생활을 최대한 살피려고 노력했고, 부대원들이 실수를 저질러도 큰 문제가 아니라면 너그럽게 넘어가 주기도 했다.
한 예시로, 원작 속에서 고통받던 제이슨이 이렇게 외쳤던 적이 있다.
“으아아악! 아돌브 제국 그냥 망해 버렸으면!”
그런데 하필 그 자리를 지나던 대대장이 그의 외침을 듣게 된 것이다….
징계를 받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영창에 끌려갈 가능성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놀랍게도 대대장은 그저 허허 웃으며 그를 용서해 주었다.
따라서 대대장은 말뿐인 간부들과 달리 정말로 좋은 사람이다. 힘든 일이 있다면 자신을 찾아오라는 것도 진심일 거고.
물론 진심으로 저 말을 믿고 그를 찾아가는 정신 나간 병사는 없겠지만 말이지.
잠깐, 이건….
‘떡밥이군.’
부대에 돌아가면 달린이 정신 나간 짓을 하지 않도록 잘 교육시켜 놔야겠다. 이제 이 정도의 역경에는 미리 대처할 수 있다, 하하.
“가끔 내가 너희한테 불합리한 명령을 내려야 하는 순간도 있을 거다. 그러나 나는 어떤 상황에서든 너희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겠다고 약속하겠다.”
대대장은 근엄하면서도 인자한 얼굴이었는데 마치 그가 겪은 세월이 그대로 느껴지는 인상이었다.
나중에 부대에 와서 듣기로 그는 아르콘이었다. 국경방위군의 장교들은 제국민과 아르콘이 섞여 있는 형태인데, 예를 들어 우리 소대장과 중대장은 아르콘이었지만 이전의 대대장은 완전한 제국민이었다.
이번엔 아르콘이 대대장으로 부임한 덕에 앞으로 부대 생활이 좀 더 나아질 것 같았다.
실제로 부임식 이후로 그는 국가에 건의하여 열악한 시설들을 모두 보수해 주었고, 몇십 년째 바뀌지 않고 그대로라는 전설이 내려오는 수통들도 바꿔 줬으며, 우리가 바느질해서 쓰던 헌 옷들도 모두 새것으로 바꿔 주었다.
그리고 부대의 생존율을 높이기 위해 지휘사관들이 더 적극적으로 훈련 지도에 참여하여 후임을 육성하도록 하였고, 경계 근무의 시간을 더 효율적인 방식으로 교대하도록 하였다.
부대가 실제로 개선되다니, 정말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이번에 대대장이 바뀐 이유가 아마 너희 소대 후임이랑 관련되어 있을 거라고 하더라.”
오랜만에 다른 소대 동기들과 함께하는 자리에서 베타 소대의 블루가 말해 주었다.
“우리 소대 후임이라면… 베니 말이구나!”
그제야 나는 모든 궁금증이 해결되는 기분이었다.
그래, 아무 이유도 없이 좋은 일이 일어날 리가 없지!
베니의 정체가 밝혀진 뒤로 윗선이 한참 시끌벅적하긴 했는데, 대대장이 바뀐 것이 그 일과도 관련되어 있는 모양이다. 어쨌든 우리의 생활은 더 나아졌으니 참 잘된 일이었다.
“예전에 말했듯이 베니는 참 좋은 후임이야.”
아퀼라가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쟤가 다른 사람과 관련해서 저렇게 미소를 짓는 일을 본 적이 몇 번 없는데.
“역시 베니는 피아노 반주를 위해 타고 난 후임이야.”
“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중에 알게 될 거야.”
내가 이상한 눈으로 아퀼라를 볼 때, 블루와 데미안 또한 자신들끼리 묘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어쨌든 우리는 화제를 바꿔 요즘 국가의 정세에 대한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밖에서 듣기로는 펠로니 제국과 관계가 별로 좋지 않다고 하더라. 서로 계속 도발을 하고 있다던데.”
내가 윈터의 부모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꺼내자, 블루가 박수를 짝 쳤다.
“아! 그래서였구나!”
“뭐가?”
“요즘 중대장님이 군사 문제와 관련해서 걱정이 많으신 것 같더라고. 혹시 국가적 갈등이 생겼을 때를 대비하기 위한 거였구나.”
“…별로 좋은 소식은 아닌 것 같은데.”
나는 그 말에 왠지 모를 불길함을 느꼈다. 이상하게도 정말 불길했다.
그리고 내가 이곳에서 불길한 예감을 느꼈을 땐 정말로 나쁜 일이 벌어졌다.
타다다닥-!
“불길해! 벌써 불길해!”
누군가가 이쪽으로 달려오는 소리를 듣고 나는 더욱 큰 불길함을 감지했다. 왠지 불길한 소식을 알리러 온 것 같아!
내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안절부절못하자 아퀼라가 뒤에서 나를 껴안듯이 붙들어 얌전히 있도록 만들었다. …빠르게 진정하는 데 효과가 있기는 했다.
“아, 데미안 님! 여기 계셨습니까?”
내가 얼굴만 아는 감마 소대의 후임 하나가 당황이 느껴지는 얼굴로 데미안을 불렀다.
“그래, 무슨 일이지?”
“저, 지휘사관들께서 의논할 일이 있다고 상등병들을 집합시키셨는데 말입니다….”
“XX, 또 누가 실수한 모양이지?”
데미안은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곧 이어진 후임의 말에 덜컥 행동을 멈추고 말았다.
“유격 훈련과 관련된 거라고 하던데 말입니다.”
“…뭐? 유격 훈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