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의 집착보다 내 탈영이 빠르겠다 110화 (128/233)

‘에이프릴.’

그래, 그녀가 군법 책을 읽는 모습을 보며 나는 정말 그녀가 미쳤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이 쪽지를 끼워 놓은 게 윈터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유 첫 번째. 윈터는 빈 페이지를 읽을 이유가 없다. 둘, 윈터는 절대로 책을 찢는 행위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에이프릴이 빈 페이지에 쪽지를 끼워 놓은 탓에 윈터는 책을 꼼꼼히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쪽지를 발견하지 못했겠지.

물론 에이프릴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끼워 놨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내 직감은 보통 틀리지 않는 편이다.

‘대체 에이프릴은 어디까지 알고 있었던 거지?’

이 세계가 어딘가 이상하다고 했던 그녀의 말은 단순한 추측이 아니라, 사실 수많은 근거 채집을 바탕으로 내린 결론이었던 걸까?

그녀는 내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똑똑똑-.

내 상념을 깬 건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나는 문에 가장 가까이 있던 지나에게 눈짓했고, 달린의 맞후임인 지나는 잽싸게 달려가 문을 열었다.

“왔냐, 블루?”

베타 소대의 내 동기, 블루가 나를 보며 대충 손을 들어 인사했다. 내가 기다리고 있던 인물이었다.

“드디어 소식이 나왔나 보네?”

블루는 언제나 나에게 빠르게 소식을 전해 줬으니 아마 이번에는 내 징계 결과에 대해 알리러 온 게 분명했다. 역시 정보에 밝은 동기를 두면 정말 큰 도움이 된다.

“하아….”

영창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기가 어려운지 블루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그래, 네 처벌이 결정 났어.”

“그래?”

“너 왜 이렇게 태평하냐? 걱정도 안 돼?”

“그냥. 일단 말해 봐.”

블루가 의심스럽게 나를 봤지만, 그는 일단 설명을 시작했다.

“우선 영창 열흘에….”

이 세계에서 ‘영창’이라는 말을 듣고 있자니, 정말 빡친다. 원래 로판에 빙의하면 기껏해야 자택 근신 정도가 끝 아니었냐고.

“그리고 아무래도 부대원들의 기강이 해이하다는 데 중대장이 크게 실망해서, 지휘사관들이 좀 더 부대 일에 개입하는 걸로 정리되었어.”

“흠.”

하긴 내가 영창에 가면 로산은 나를 직접적으로 괴롭히지 못하게 된다. 대신 내가 영창에 갔다 온 이후에도 나를 건드릴 수 있도록 그런 수작을 쓰려는 거겠지.

“좋아, 블루. 알려 줘서 고마워.”

“대체 뭘 어떻게 하려고 그렇게 태평한 건데?”

“괜찮아. 곧 해결될 테니까….”

뭐, 물론 나는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아직 나에게는 이용할 수 있는 와일드카드가 남아 있었으니까.

맨 처음 로산이 나와 기 싸움을 시작했을 때부터 나는 그를 꺾어 놓을 수 있는 여러 방법들에 대해 고민했었다.

‘가그네 때랑 같은 방법은 안 돼.’

가그네라는 선임의 파워를 꺾기 위해 나는 다른 선임들의 힘을 이용했었다. 그러나 이번의 지휘사관들의 경우에는 내가 이용할 수 있는 그 위의 선임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내가 직접적으로 지휘사관과 싸울 수는 없으니까….’

그러다가, 나는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었지.

‘…잠깐, 정말 내가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이 없나?’

그래, 나에게는 이용할 수 있는 윗사람이 있었다. 그것도 가그네 때와는 비교될 수 없을 만큼 스케일이 큰.

이런 내 생각을 알지 못할 블루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나를 흘끗거리며 이만 자신의 소대로 돌아가 보겠다는 말을 전했다.

“잘 가, 블루. 알려 줘서 고맙다.”

“그래, 사루비아…. 아, 맞다.”

블루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양 가벼운 어조로 물었다.

“그런데 내가 궁금한 게 있는데.”

“응?”

“너는 아퀼라가 좋아, 이시나 님이 좋아?”

“뭐?”

나는 잠시 잘못 들은 게 아닌지 의심했지만, 블루의 얼굴은 너무나도 태연해 보였다.

“…그건 뭐 아빠가 좋냐 엄마가 좋냐 같은 질문이야?”

“아, 그냥 궁금해서 그래. 빨리 대답해 봐.”

“그래도 맞선임과 동기라면 역시 동기 쪽이 더…. 물론 둘 다 중요한 사람들이지. 난 제대 후에도 계속 연락할 거야. 그런데 이런 질문은 도대체 왜 하는 건데?”

“어어, 그냥 요즘 선임과 동기와 후임의 차이점 같은 걸 조사해 보고 있다고나 할까. 그럼 난 이만 가 본다! 잘 있어라!”

내가 뭐라 말을 얹기도 전에 블루는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도대체 이런 질문은 왜 하는 거지?

…아니,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 나는 빨리 이 영창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나는 숙소 문을 다시 열고 들어가기 전에 크게 심호흡했다. 그리고…

“아이고!”

“사, 사루비아 님?”

“하, 정말 인생이 너무 힘들다.”

내가 마치 술에 꼴은 사람처럼 비척비척 걸어 들어가 침상에 풀썩 누우니 주변에 있던 후임들이 놀란 눈을 했다.

나는 슬쩍 고개를 들고 주변을 살폈다. 베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보고 있었고, 달린과 지나는 나를 직접적으로 바라보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몸은 내 쪽을 향해 있었다.

“베니, 인생이 너무 힘들다…. 하아….”

“예, 예?! 흑마술 아티팩트 건 때문이십니까?”

“그래. 난 아무래도 영창에 가게 될 게 틀림없어….”

그 말에 달린의 손이 덜덜 떨리는 걸 보아 내가 영창에 가게 될 시 본인에게 닥칠 미래를 직감한 모양이었다. 당연히 내가 영창에 갔다 오면 달린을 가만두지 않겠… 아니,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

“휴우, 베니…. 정말 인생이 너무 힘들어….”

“사루비아 님….”

내가 지금까지 후임들에게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는 기운 없는 얼굴을 하고 있으니 베니도 슬슬 내가 걱정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괜찮으십니까? 뭐 어떻게 다른 방법이 없는 겁니까?”

“무려 중대장님의 결정인데 나한테 무슨 힘이 있겠니. 하…. 심지어 영창에 가면 제대도 그만큼 늦어질 텐데…. 난 정말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어, 어떻게 그런….”

이제 베니도 안절부절못하고 숙소를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처한 상황의 불쌍함을 강조하기 위해 다시 한번 ‘늦어지는 제대’를 언급했다.

“제대가 늦춰지다니…. 이게 말이 되니…?”

“그러게 말입니다…. 정말 말도 안 됩니다….”

“제대가 늦어지면 나는 이 X 같은 국경방위군에 더 처박혀 있어야 하겠지…. 신선한 바깥 공기여, 안녕…. 고아원에서만 살다가 이곳에 끌려온 건데 역시 나는 사회로 나갈 운명이 아닌가 보다…. 사회가 나를 버린 걸까…?”

“사루비아 님….”

‘…이쯤이면 넘어올 줄 알았는데, 넘어오지 않는군.’

그렇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머리에 있는 말들을 모두 쥐어 짜내야 한다.

“하…. 제대가 늦어지면 나는 싸제 음식도 먹지 못하고, 눈이 내리는 것도 군대에서 봐야 하고, 신년맞이 불꽃놀이 축제도 보지 못할 거고….”

“정말 말도 안 됩니다.”

“그리고 저번에 아퀼라랑 함께 가기로 한 허브 축제도 기한을 놓쳐서 가지 못할 거고….”

“정말 말도 안 됩니다!!”

“…어, 어?”

“어떻게 그런 일이! 안 됩니다! 안 됩니다! 안 됩니다!!”

…베니가 나를 불쌍하게 여기도록 만들려는 거였는데, 베니는 지금 나를 불쌍해하기보다는 무언가에 격분한 것 같았다.

그녀는 갑자기 호탕한 장군처럼 목소리를 높이더니 같은 말을 반복하여 외치고 있었다.

“사루비아 님! 그런 일은 꼭! 막아야 합니다!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으응. 그, 그렇지.”

“기다리십시오! 제가 기필코 그 문제를! 해결하고 오겠습니다!”

“베, 베니…?”

“모두 비켜!!”

달린과 지나가 우왕좌왕하다가 베니를 피해 몸을 날렸다. 베니는 그대로 숙소의 문을 확 열어젖히고 한 마리의 용맹한 호랑이처럼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정말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계획대로 된 거겠지?’

내 계획은 베니가 나를 불쌍하게 여겨 자신의 아버지의 정체를 밝히고 아버지 찬스를 써서 나를 구제해 주는 것이었다.

이전에 베니가 힘들어할 때 내가 도와준 이후로 베니는 나를 잘 따르고 있었으니까 한 번쯤은 나에게 도움을 되돌려 줄 거라고 생각했다.

베니의 호의를 이용하는 건 어떻게 보면 좀 치사한 행동이라고도 할 수 있었지만, 나는 베니의 인격을 믿고 있었다. 그녀는 참 올곧은 사람이니까. 원작에서도 베니는 달린이 친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자신의 정체를 밝혔었지.

베니가 내 생각보다 몇 배는 흥분한 것 같긴 하지만, 어쨌든 그녀가 무언가 해낼 것 같긴 해서 나는 가만히 그녀를 기다렸다.

* * *

중대장의 맞은편에는 지휘사관 로산이 앉아 있었다.

그는 로산과 차를 마시며, 요즈음 부대의 일들에 대해 논의하는 중이었다.

“중대장님, 제가 있던 부대에서는 말입니다…. 상등병들이 자신의 업무에 대해 대단히 꼼꼼하게 보고를 하고는 했습니다.”

“음, 그거 좋군.”

중대장은 아까부터 로산이 내놓는 아이디어들이 참 마음에 들었다.

무려 자신의 부대에 흑마술 아티팩트를 반입한 병사가 있을 정도로 기강이 해이해져 있었기 때문에, 그는 부대원들에게 몹시 실망한 상태였다.

그러나 새로운 지휘사관 로산은 부대의 기강을 잘 잡아 놔 줄 것처럼 보였다. 그러므로 당분간 상등병들의 정신 교육을 다시 하면서 지휘사관들에게 후임 관리를 맡기는 게 좋을 것이다.

그렇게 그가 여유로운 오후를 보내고 있던 그때….

“중대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중대장실의 문을 쾅 하고 열고 들어오는 소리에 중대장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곳에 서 있는 건 알파 소대의 상등병 베니였다.

중대장이 알기로 베니는 초반에는 부대에 적응하기 힘들어하여 자신과 상담을 하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부대에 잘 녹아들었고 뛰어난 검술 실력으로 인해 엘리트로 꼽히는 인물이었다. 후임들을 잘 챙기면서 선임들에게는 깍듯한 탓에, 부대 내 평판도 아주 좋아서 중대장도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다.

“이봐, 무슨 일이 생긴 거지?”

평소의 그 예의 바른 베니가 이렇게 갑자기 중대장실에 무단 침입했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중대장은 화를 내지 않았다.

베니의 성격을 고려했을 때, 무언가 큰일이 생겨서 베니가 알리러 온 게 분명했다. 그것도 엄청나게 큰 문제일 게 틀림없다!

베니는 숨을 몰아쉬더니 중대장에게 가까이 걸어온 후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닙니다. 다만 입대한 지 시간이 많이 지나 가족이 보고 싶어, 아버지께 편지를 보내고 싶습니다.”

“뭐, 뭐?!”

갑자기 가족에게 편지를 보내고 싶다고 중대장실에 침입하는 병사라니.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중대장이 벙찐 채 입을 벌렸다.

“마침 아버지도 국경방위군에서 장교로 근무하시는 중이니, 중대장님이 편지를 보내는 걸 도와주실 수 있을까 해서 말입니다. 아버지께 편지를 보낼 수 있겠습니까?”

“도대체 무슨 소리… 잠깐, 뭐라고?”

베니의 황당한 발언에 그녀를 질책하려던 중대장은 문득 아버지가 장교라는 그녀의 말을 듣고는 말을 멈췄다.

“아버지가 장교라는 사실은 왜 지금까지 말하지 않았던 거지?”

“아버지가 밝히지 않고 군 생활을 하기를 권장하셨습니다만, 오늘은 아버지가 너무 뵙고 싶어 견딜 수가 없습니다.”

“누, 누구시길래….”

왠지 중대장은 불안해졌다. 군 생활을 하며 쌓아 온 그의 직감은 틀린 적이 없는 법이었다.

“예. 저희 아버지는 제303특공사단의 사단장으로 근무하고 계십니다. 편지를 보낼 수 있겠습니까?”

“사, 사단장님이라고?! 잠깐, 그렇다면….”

“소장이십니다.”

“으악!”

중대장은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지금까지 자신이 굴리던 병사들 중 하나가 투스타의 딸이었다고? 아버지가 장성급 장교였다고?!

“아, 알았다! 한 시간 뒤에 편지를 보낼 수 있게 해 줄 테니, 그, 그때 다시 오도록….”

“예, 알겠습니다.”

베니는 자신의 목적만 전한 뒤 깔끔하게 자리를 떠났다.

중대장은 덜덜 떨리는 다리로 그 자리에 서 있다가, 그제야 자신의 맞은편에 지휘사관 로산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하지만 그가 제안했던 것들은 중대장의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투, 투스타의 딸을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중대장님?”

“중대장은 나 자신에게 실망했다!”

“예, 예?”

“당장 가서 간부들을 전부 불러와!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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