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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집착보다 내 탈영이 빠르겠다 109화 (127/233)

뭐지? 이게 원작 남주의 전우애?

‘…아니면 그냥 로판 전개?’

하지만 이게 로판 전개라고 믿기에는, 상황이 별로 로맨틱하지 않았다….

―네가 있는 곳이라면, 지옥까지도 따라가 줄게.

이것이 일반적인 로맨틱한 대사다.

―네가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설령 시궁창이라도 따라가 줄게.

―네가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저 깊은 바다 아래라도 함께할 수 있어.

―네가 있는 곳이라면, 불구덩이라도 따라가 줄게.

이런 것들도 참 로맨틱한 대사다.

―네가 있는 곳이라면, 영창까지도 따라가 줄게.

이건 로맨틱하지 않다…. 로판 대사에 영창이 왜 나오냐? 장난하나?

하여튼, 이게 로판 전개인가에 관한 고찰은 답이 너무 뻔하니 그만두고.

“며칠만 기다려 줘 봐. 영창에 가기 전에 내가 모든 걸 해결할 테니까.”

난 정말로 영창을 피할 수 있는 비장의 수단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아퀼라를 때리려는 모습을 보고 나는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었던 것 같다.

이시나가 먼저 흑막 짓을 하기를 기대하는 것보다 역시 내가 다른 방법을 써서 일을 해결하는 편이 낫겠다.

그나저나 아퀼라가 그 상황에서 나를 말리지 않고 내 말을 믿어 준 게 고마워서, 나는 그를 보며 미소 지었다.

“아까 내 말이 이해 안 됐을 텐데, 잘 참았어.”

그러나 아퀼라의 입에서 나온 건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니야.”

“응?”

“네 눈빛을 보니 확실한 방법이 있는 것 같아서.”

“…아.”

지난번 흑마술사의 집에서 함정을 피하며 함께 고생했을 때 이미 깨달은 사실이기는 하지만, 역시 아퀼라도 나를 잘 알고 있구나.

내가 상대를 생각하고 있는 만큼 상대도 나를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것은 늘 즐거운 일이다. 나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가, 그의 팔을 가볍게 토닥였다.

“뭐야, 언제부터 이렇게 날 잘 알았어?”

“그러는 너는?”

“글쎄…. 하긴, 죽을 위기를 같이 넘긴 게 몇 번인데 그런 걸 따지는 것도 의미 없겠지.”

아퀼라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내가 조금 전에 그러했듯 나를 보며 미소를 지어 주었다. 평소에 감정 변화를 잘 보이지 않던 그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사루비아, 그나저나 달린이 너를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아, 맞다! 내가 그냥 그 XX를!”

* * *

달린을 조지겠다며 달려간 사루비아의 뒷모습을 보는 아퀼라의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는 달릴 때마다 흔들리는 저 산호빛 머리카락이 꼭 깜찍한 여우 꼬리 같다고 생각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날 잘 알았어?”

사루비아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아퀼라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게…. 언제부터 너를 이렇게 잘 알고 있었을까.”

그러나 아퀼라의 얼굴은 이내 평소와 같이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그가 주변에 누군가가 있는 것처럼 말을 꺼냈다.

“이제 나오시지 말입니다.”

그리고 그 말에 수풀 속에서 이시나가 스윽 일어났다. 그의 머리카락에는 나뭇잎들이 붙어 있었지만 그의 초록색 머리와 어우러져 꽤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는 곤란한 얼굴로 머리카락에서 나뭇잎들을 떼어냈다.

“들으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이시나 님은 왜 여기 계셨습니까?”

“너희가 이곳에 자주 온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 너희끼리 놔두면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잖니?”

이시나는 그렇게 말하며 미소를 지었지만, 마냥 친절해 보이지만은 않는 얼굴이었다.

이시나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아퀼라는 다시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카론, 너도 나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번에 모습을 드러낸 건 카론이었다. 카론은 이시나가 있던 자리의 옆에서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넌 또 왜 왔어?”

“이시나 님이 숨어 계시는 게 재미있어 보여서 따라해 봤습니다!”

“이시나 님, 얘를 좀 말릴 생각을 하셨어야…. 아니, 이게 아니라.”

정신을 차린 아퀼라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방금 얘기 들으셨습니까? 사루비아가 흑마술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걸 로산 님께 들켰지 말입니다.”

“뭐? 흑마술 아티팩트는 또 왜 가지고 있었던 거야?! 내가 진짜….”

이시나가 결국 자신의 뒷목을 부여잡았지만, 아퀼라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사루비아 스스로 해결할 계획이 있는 모양이지만 전 로산 님을 가만히 둘 생각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모를 텐데도, 카론은 아퀼라의 말이 맞는다는 듯 마냥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로산 님이 사루비아 님을 괴롭히는 겁니까?”

“그래.”

“그러면 복수해야 합니다!”

카론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고 아퀼라가 그와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며, 이시나는 그들 사이에서 기운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다 하다 이젠 흑마술 아티팩트라니, 어쩜 이렇게 다방면으로 말을 안 들을까.”

* * *

“그런데 이시나 님, 혹시 뭔가 계획을 꾸미는 게 있으십니까?”

“나한테 대체 뭘 기대하는 거냐니까…?”

혹시나 해서 잘 캐물어 봤지만, 이시나는 절대 자신의 계획을 발설하지 않았다. 이런 점이 더욱 흑막다운 거겠지만.

사실 그가 어떻게 계략을 짜든 간에 나는 내 나름의 계획이 있으니 상관은 없었다. 나는 그대로 여자 숙소에 들어와 몸을 눕혔다.

“흠.”

사실 요즘의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숙소에서 가만히 보내고 있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로산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바로 보고를 올렸고, 그다음 날 나는 중대장실에 불려 갔다 와야 했다.

아마 내가 아무리 부정했더라도 중대장은 ‘사루비아가 흑마술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었다’라는 로산의 말을 믿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계급이 더 높으니까.

중대장은 그날 나에게 화를 내거나 얼차려를 주는 대신 숙소에서 가만히 대기하라고 했다. 자세한 징계 결과가 나오면 알려 주겠다는데 일단 영창은 확정이라고 한다. 과연 며칠 동안 있게 될지가 문제였지.

‘원래 로산은 중대장에게 부대원 전원 관물대 수색을 건의할 거라고 협박했었는데.’

협박과 달리 실제로 관물대 수색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그 시계 말고 딱히 걸릴 물건은 없지만, 괜히 귀찮아질 수 있으니 수색이 없는 건 다행이었다.

그리고 내가 대기하고 있는 동안 로산이 나를 찾아와서 괴롭힐 거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그는 나를 찾아오지도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나는 대기하는 동안 일도 하지 않고 비교적 평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아오, 심심해….”

나는 누운 채로 손을 휘젓다가, 마침 근처에 책 한 권이 놓여 있길래 그것을 끌고 왔다.

그것은 군법 책이었다.

얼마 전 달린이 “사루비아 님, 영창 입창을 막을 방법이 있는지 찾아보겠습니다!”라면서 가져왔던 책인데, 그녀는 앞 장을 한 줄 읽은 뒤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그대로 포기했다.

“에휴.”

최근 마물에 관한 정보를 찾느라 책들을 하도 많이 읽은지라 활자만 보면 속이 울렁거리는 기분이었지만, 가만히 있는 게 더 지루했으므로 결국 나는 책을 대충 폈다.

‘윈터가 아닌 이상 누가 자발적으로 군법 책을 읽겠냐….’

역시 법률적인 용어를 이해하는 건 어려운 일이어서 나는 그 내용을 제대로 읽지 않고 책을 대충 넘겼다. 거의 600쪽에 달하는 책은 정말 엄청난 두께를 자랑했다.

의미 없이 책장을 넘기는 일만 반복하자니, 마침내 빈 페이지가 나왔다. 책의 내용이 끝난 모양이었다.

그렇게 비어 있는 몇 쪽의 페이지를 넘기다가….

“…어?”

빈 페이지 사이에 웬 쪽지 하나가 끼어 있었다.

무엇인지 알 수 없었으나 나는 우선 그것을 꺼내 펼쳐 보았다. 지금 보내 꽤 큰 종이를 작은 쪽지로 접은 듯했다.

마침내 쪽지가 펼쳐지고 드러난 것은….

“잠깐만, 이건….”

『그러나 필자는 자연적으로 마물이 발생하는 경우의 징후를 발견하지 못했다.

마물은 무작위로 발생하며, 그것들이 발생하는 시간과 장소들의 공통점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자연적으로 탄생하는 마물’에 관한 내용이었다!

‘대체 이게 왜 여기 있어?’

누가 이 쪽지를 접어서 여기 끼워 놨는지 도통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일단 허겁지겁 책의 내용을 읽었다.

『자연적으로 탄생하는 마물은 모두 국경 밖에서 발생한다.

국경방위군에서 근무한 이들 중 자연적으로 마물이 탄생하는 경우를 목격했다는 병사를 총 열세 명 만날 수 있었다.

따라서 마물의 자연적인 발생은 상당히 흔한 경우로 추정된다.

그러나 주목할 점은, 이종족이 마물이 존재하던 영토에 살던 시기에는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마물’에 관한 기록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단순히 해당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지만, 마물이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이 오래되지 않았다고도 추정할 수 있겠다. 물론 정확한 것은 더 연구를 해 봐야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니까 마물이 자연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게, 이종족이 제국으로 편입한 후의 일이라는 거지?’

왜일까? 마물이 악한 기운으로 이루어진 존재고, 최근 제국이 점점 오염되고 있다거나 그런 걸까?

물론 어떤 추측을 하더라도 이 국경방위군에 갇힌 이상 내 가설을 직접 확인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겠지만.

그때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그래서 이 쪽지를 여기 끼워 둔 건 누구지?’

국경방위군에서 군법 책 따위를 읽는 사람은 없었다. 기껏해야 군법을 모두 알고 있는 윈터 정도가 유일… 하지 않구나.

나는 군법 책을 자의로 읽었던 사람을 한 명 더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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