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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집착보다 내 탈영이 빠르겠다 108화 (126/233)

“내가 행정반에서 들었는데, 로산 님은 제39보병여단 출신이라고 하셨어.”

“제39보병여단이라면… 설마…!”

왜 이렇게 익숙한 부대인가 했는데, 순간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이름이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에이프릴!’

제39보병여단은 바로 에이프릴이 진급한 부대였던 것이다!

‘그럼 로산은 에이프릴과 2년간 군 생활을 함께 했겠군.’

그 미친X이 다른 부대에 간다고 한들 얌전히 지낼 리가 없었다. 누가 조금이라도 자신을 무시하거나 거슬리게 군다면 곧장 지옥을 선사했을…

잠시만.

“설마 그거 때문인가? 나한테 화풀이하는 거야?”

“음, 나는 너희 부대가 아니었으니 잘 모르겠지만. 에이프릴 님이야 워낙 유명했잖아?”

베타 소대에까지 악명이 퍼져 있었다니, 정말 대단하다, 에이프릴….

‘어쨌든 그래서 로산이 나를 거슬려 하던 이유가, 에이프릴에게 당한 만큼 나에게 갚아 주려고 해서 그랬던 거라고?!’

상등병들 중에서 유독 나를 건드리던 것도, 권력 같은 것 때문이 아니라 다 에이프릴에 대한 원한 때문이란 말이야?

“아니, 근데 베니도 있고 달린도 있고 지나도 있는데 왜 하필 나지? 따지고 보면 나보다는 달린이나 베니가 에이프릴 님의 키에 더 가까운데.”

“사루비아, 정말 모르겠어?”

블루가 어쩐지 측은함이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이 부대에서 그 에이프릴 님과 성격이 가장 비슷한 건 아마도….”

“뭐?”

“…아냐, 됐다.”

블루는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가, 어쨌든 자신이 한 이야기를 잊지 말라고 나에게 당부해 두었다.

“그가 너에게 되갚아 주려고 한다는 거 잘 기억해두고. 그리고 또 재미있는 얘기 있으면 나한테 전해라~.”

누구보다 부대 내 소식에 관심이 많은 블루는 그렇게 자신의 소대로 떠나갔고, 나는 그대로 생각에 잠겼다.

‘그런 이유였다는 거지….’

그동안 로산이 ‘부대의 기강이 해이하다’ 운운하던 건 다 명목상의 이유였을 가능성이 높았다.

비록 로산에게 대든 건 이시나라지만 블루의 말에 따르면 그는 이시나가 아닌 나를 더 거슬려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으므로, 역시 주변의 조언대로 당분간 행동을 조심하기로 마음먹었다.

‘마물 정보나 좀 찾아보려고 했는데 그 타이밍에 이런 일이 생기다니.’

처음에는 머리가 복잡해서 글자가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요즘은 머리가 좀 개운해진 상태였다. 왜냐하면 얼마 전 이시나가 보인 태도를 고려했을 때….

‘어차피 로산 처리는 이시나가 해 줄 것 같으니까!’

그냥 그동안 하던 대로 마물에 관한 정보 조사나 열심히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며칠 뒤, 나는 마침내 자료실에서 내가 원하던 정보가 담긴 책을 발견해 낼 수 있었는데, 그건 정말 의외의 물건이었다.

‘마물 도감.’

마물 도감에는 정말 각 마물에 관한 실용적 정보만 나와 있었기에 나는 오히려 그 책에서는 마물의 기원과 역사 같은 근본적인 정보를 찾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제 보니 뒤에 짧게 붙어 있는 부록 페이지에 마물의 탄생에 관한 내용이 있었던 것이다.

『필자는 마물이 탄생하는 경우를 두 가지로 분류했다.

하나는 번식의 경우이다. 그들은 일반적인 생물이 그러하듯 교배를 통해 알 혹은 새끼를 낳는다.

두 번째는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경우이다. 그들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자리에서 어느 순간 갑자기 탄생한다.』

‘역시 자연적으로 생겨나기도 하는 게 맞았어.’

내가 그날 본 건 허상이 아니었다!

‘마물 도감’인 만큼 이 책의 필자는 마물을 많이 상대해 본 사람일 거고, 나와 같은 아르콘일 가능성도 높을 것이다.

굉장히 중요한 내용이 이어질 것 같은 예감에 내 심장은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필자는 마물이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시기와 장소를 연구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다음 장은 찢겨 나가 있었다.

“…뭔데?”

아무리 봐도 한쪽이 비어 있었다. 누가 일부러 찢어 낸 흔적이었다.

‘대체 누가?’

그 내용을 일부러 찢어 갔다면, 그 사람도 그 내용이 가지고 있는 중요성을 틀림없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내용을 알지 못하게 된 상황에서 나는 좀 허탈해졌다. 뒷 내용을 알지 못하니 답답해서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에휴, XX.”

역시 일이 이렇게 잘 풀릴 리가 없지.

‘그냥 직접 마물 관측이나 해 봐야겠다….’

이 글의 필자가 연구했던 대로 나도 자연적으로 나타나는 마물이 많이 있는지 틈나는 대로 확인해 보기로 했다. ‘마물의 수를 알려 주는 손목시계’가 나를 도와줄 것이다.

어차피 곧 경계 근무 시간이니까 굳이 귀찮게 숙소에 들렀다 나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조금 전부터 이쪽을 얼쩡거리고 있던 달린을 발견했다.

“달린. 내 관물대에서 손목시계 좀 가져와.”

“예, 알겠습니다!”

달린은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뛰어갔고, 나는 자리에 서서 가만히 그녀를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 후, 내 눈앞에 나타난 건….

“달린?”

“사, 사루비아 님…. 그게…. 죄송합니다….”

팔을 잡힌 채 질질 끌려오는 달린과, 그녀를 잡고 오는 로산, 그리고 로산의 오른쪽 손에 들려 있는 손목시계였다.

그 광경을 본 순간, 오랜 시간 동안 군 생활을 하며 쌓아 온 내 직감이 경고등을 울렸다.

‘X됐다.’

아무래도 흑마술 아티팩트를 들킨 것 같다. 그야말로 X됐다.

심지어 들킨 상대가 로산이라니.

과연 내가 어떻게 얼마나 X될지 상상도 가지 않아서 더욱 X된 것 같다.

‘보나 마나 달린이 실수한 거겠지….’

달린을 믿었던 내가 바보였다…. 아니, 그런데 진짜 요즘에는 실수를 좀 덜 했는데!

더 이상 달린에게 분노할 기운도 없는 내가 넋 나간 얼굴을 하고 있을 때, 로산이 내 앞에서 손목시계를 짤랑짤랑 흔들어 보였다.

“이봐. 이 물건은 뭐지? 네 개인 물품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개인 물품입니다….”

“글쎄, 내가 보기엔 흑마술 아티팩트 같은데?”

솔직히 그 물건은 흑마술 아티팩트라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흑마술 아티팩트처럼 생기긴 했다.

전체적으로 금색이긴 하지만 어쩐지 오싹하고 검은 빛을 반사해 내는 시계, 반쯤 깨져 있는 시계 표면, 그리고 왠지 모르게 사악한 기운까지 느껴지는데….

국경방위군에서 오래 살아남았을 만큼 똑똑하다면 틀림없이 그게 흑마술 아티팩트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하. 군법을 어기고 흑마술 아티팩트를 부대 내에 반입해?”

그가 나를 보며 눈을 번뜩였다.

“너도 이게 얼마나 큰 문제인지는 알고 있겠지?”

“…….”

솔직히 말해서 여기서는 대답을 해도 X되고 대답을 하지 않아도 X되는 상황이었다.

결국 나는 침묵을 지킨 채 고개를 숙이고 땅바닥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가 하고 있는 말을 인정하는 것과 다름없는 태도였다.

“이건 내가 너에게 어떤 처벌을 내려도 할 말이 없어. 안 그래?”

로산은 나를 제대로 괴롭히겠다고 경고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의 말대로 그게 최선이기는 했다. 차라리 그의 선에서 끝나는 게 낫지, 만약 간부들의 귀에 들어간다면 나는 백 퍼센트의 확률로 영창에 가게 된다.

‘로판에서 영창이 웬 말이냐고!’

차라리 황제 시해 미수로 감옥에 투옥되면 가오라도 있지, 금지 물품을 반입했다가 영창에 가는 건 너무 가오가 없지 않은가!

나 자신, 여주력 –30.

로산이 내 머리채를 쥐어뜯든 내 뺨을 때리든 거기서 끝났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이어질 말을 기다리고 있을 때, 누군가가 내 옆으로 다가와 섰다.

“로산 님.”

“어?”

내가 모를 수가 없는 목소리였다.

놀라서 고개를 들었지만 아퀼라는 이미 나를 대신하여 로산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건 제가 가지고 있던 물건입니다.”

“뭐?!”

로산과 마찬가지로 나도 ‘뭐?!’라고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나는 눈치를 챙기고 간신히 그것을 입 밖으로 내지 않는 데 성공했다.

아퀼라는 로산에게 보이지 않도록 등 뒤로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열중 쉬엇 자세로 있었기에 마찬가지로 등 뒤에 있었던 내 손에 그의 손이 닿았다.

그는 내 손을 가볍게 붙잡았다가 뗐는데, 내게 가만히 있으라고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았다.

‘아니, 커버 쳐 줄 게 따로 있지….’

물론 나도 사람인데 까마득한 훈련병 시절에 이곳에서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던 건 아니다. 그리고 아퀼라는 나를 대신하여 종종 총대를 매 주었다. 언제나 내가 먼저 나설 틈도 없이 빠른 속도였지.

그렇지만 이번 일은 다르다. 이번 일을 대신 커버 쳐 줬다가는 대신 선임에게 털리는 게 아니라, 대신 영창에 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퀼라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는 목소리로 빠르게 말을 이었다.

“사루비아는 그게 흑마술 아티팩트인 줄도 몰랐을 겁니다.”

“하, 내가 그런 뻔한 거짓말에 속아 넘어갈 줄 아나….”

로산이 비열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방금 전에 분명 개인 물품이라고 자기 입으로 말했는데. 이거 딱 봐도 네가 대신 뒤집어쓰려는 것 같은데.”

그가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오더니, 손가락을 세워 아퀼라의 어깨를 툭툭 쳤다.

“어디서 헛수작질이야? 이게….”

그가 이전에 나에게 그랬듯이 다시 손을 들어 올리려고 했고, 아퀼라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그대로 맞아 줄 기세여서.

결국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외칠 수밖에 없었다.

“그거 제 시계 맞습니다!”

“사루비아.”

아퀼라가 그러지 말라는 듯 내 이름을 불렀지만 나는 그의 눈을 빤히 바라봤다. 안심하고 가만히 있으라는 뜻이었다.

물론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일단 지금 이 자리에서라도 아퀼라를 진정시켜야….

“…알았어.”

‘…이해한 건가?’

그러나 내 걱정과 달리 아퀼라는 너무나도 금방 얌전해졌다. 그는 다시 평소의 무표정으로 돌아와 가만히 내 옆에 서 있을 뿐이었다.

“로산 님. 그건 제 시계가 맞습니다. 그리고….”

이러기는 싫었지만, 역시 그쪽이 나을 것 같다.

“간부님들께 알리십시오.”

“…뭐?”

“간부님들께 알리셔도 상관없으니까, 그렇게 하십시오. 그다음에 내려지는 징계를 받겠습니다.”

로산은 내 말에 당황한 모양이었다.

당연하지. 이 일을 핑계로 나를 갈구려고 했는데, 정작 나는 차라리 영창에 가겠다고 말하고 있는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러나 나는 더 이상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퀼라를 끌고 자리를 빠져나왔다. 우리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달린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달린, 대체 어쩌다 들켰냐….”

“빨리 오려고 뛰어오다 보니 제 발에 제가 걸려서 넘어졌는데, 그때 제 손에서 시계가 날아갔습니다. 그런데 하필 제 앞에 로산 님이 계셔서….”

“넌 일단 먼저 숙소에서 머리부터 박고 기다려라.”

“예….”

달린을 숙소로 보낸 뒤, 인적 없는 소대 뒤 건물에서 나는 아퀼라를 마주 보고 섰다. 내가 그의 손을 잡고 끌고 오는 동안에도 그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뒤따라 왔다.

마침내 주변에 사람이 없어진 뒤에야, 아퀼라의 입에서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말 영창을 가려는 건 아닐 테고, 방법이 있는 거지.”

“응. 생각해 놓은 방법이 있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너무 부담 갖지 마, 사루비아.”

아퀼라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천천히 말했다.

“혹시 일이 잘못돼서 영창에 가게 된다면, 나도 따라가도록 할게.”

“…뭐?”

“이왕 영창에 간다면 다른 죄목으로 가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지.”

그렇게 말하는 아퀼라는 너무나도 진심처럼 보여서, 나는 일순간 아연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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