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 너는 또 왜 끼어들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로산이 고개를 기울였지만, 이시나도 물러서지 않았다.
“…손은 내리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뭐?”
“맞선임인 저도 건드린 적 없는 애입니다, 로산 님.”
‘…어?’
그래, 정말로 단 한 번도 일어날 거라 생각해 보지 않은 일이었다.
‘이시나가 지금 선임한테 대들고 있는 거야?’
나에게 제발 선임 말을 잘 들으라고 매번 강조하고, 특히 지휘사관들과 문제를 일으키지 말고 반년 동안 얌전히 있으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하던 이시나가?
“야, 너는 맞후임이 이렇게 버릇없이 구는데 교육도 제대로 안 시켜? 지금 보니 너부터가 잘못됐네.”
이제 로산의 분노는 이시나에게까지 옮겨 간 것 같았다. 그는 나에게 그랬듯이 손을 들어 올릴 기세로 이시나에게 다가섰으나, 이시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 꿋꿋이 서 있었다.
지금까지는 잘 깨닫지 못하고 있었는데, 원작 남주3이라는 특성 때문인지 이시나는 로산에 비해 전혀 약해 보이지 않았다.
이시나를 위협하기 위해 얼굴을 맞댔던 로산이 변함없이 싸늘한 이시나의 얼굴에 움찔했을 정도였다.
“예, 제 잘못입니다. 사루비아는 앞으로도 계속 버릇없게 내버려 둘 거지 말입니다.”
‘…뭐지?’
보통 저럴 때는 내가 버릇없게 군 게 아니라 원래 친한 사이라고 해명해야 하는 거 아니야…?
두 명의 선임들이 대치하는 상황에 차마 끼어들지 못하고 내가 어색하게 눈알만 굴릴 때, 이시나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로산 님은 저희 부대로 온 지 얼마 안 되시지 않았습니까.”
“뭐?”
“부대 운영은 저희가 잘 하겠습니다.”
이제 나는 이시나가 하는 말들에 입이 쩍 벌어질 지경이었다.
‘저건 대놓고 시비 터는 거 아니야?’
믿기지 않게도, 이시나가 이 싸움에 불을 붙이고 만 것이다…! 뭐지? 결국 흑막 특성을 억누르지 못하고 지금 발현시키려는 건가?
“이게 지금 뭐라고…!”
로산이 금방이라도 이시나의 멱살을 잡을 듯한 표정을 했을 때, 우리가 대치하는 모습을 보고 주변에서 다른 부대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 개입할 수 있을 만큼 짬을 먹은 상등병들과 지휘사관 케이엇이었다.
“야, 로산. 살살 좀 해. 내가 오래 있어 봐서 아는데 이 부대는 군기가 좀 빠져 있다니까?”
케이엇이 실실 웃는 얼굴로 로산의 어깨 위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그러나 어딜 봐도 정말로 그를 만류하는 태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의 앞에서 이 부대의 군기가 빠졌다며 로산을 부추기고 있는 거였지.
로산과 케이엇의 건방진 태도를 보며 나는 그들이 부대를 장악하기 위해 정말로 우리를 꺾어 놓으려 한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XX, 강제로 정치물 2탄 찍게 생겼네.’
“케이엇 님, 말년에는 누구보다 몸조심해야 하는 점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심지어 이 와중에도 이시나는 내가 처음 보는 대단히 싸늘한 얼굴로 지휘사관들과 대치를 이어 가고 있었다….
그때 몰려왔던 상등병들 중 한 명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러는 이시나 님도 진급이 얼마 남지 않으신 건 마찬가지 아닙니까.”
이런 일이 있으면 역시나 빠질 리가 없는 자이든이었다! 자이든이 특유의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이시나를 보고 있었다.
‘저 XX가 진짜….’
상등병이 되더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왔나. 이전에는 내 앞에서 찍소리도 못했는데, 상등병이 되고 공식적으로 후임들을 관리할 권력을 쥐게 되면서 다시 자신감을 되찾은 게 틀림없었다.
이제 상황은 더 복잡해졌다.
그러니까 케이엇과 로산은 그들의 권력을 위해서 우리를 밟아 놓으려는 거고, 마침 자이든도 상등병이 됐으니 우리를 밀어내고 앞으로 자신이 주도권을 잡으려 하는 거지.
자이든의 저 뻔뻔한 얼굴을 보자니 아마 그가 지휘사관들과 힘을 합칠 가능성도 있어 보였다.
‘이런 정치질은 황실 같은 데서 하는 거 아니냐고.’
황태자파랑 1황자파도 아니고, ‘지휘사관+상초vs상말’이라니, 이런 괴상한 정치질을 내가 로판 세계에서 해야 한단 말이야?
“무슨 일이십니까.”
심지어 이제 아퀼라도 내 팔을 붙들고 지휘사관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카론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면서 그냥 내 옆에 와서 서 있었다.
누가 봐도 파벌이 제대로 갈린 상황이었다.
‘어떻게든 이 대치 국면을 끝내야 한다.’
물론 나는 나름 정치질에 자신이 있긴 하지만, 아무런 준비도 없이 지금 이 상태로 지휘사관들과 맞붙으면 당연히 우리가 진다. 왜냐하면 저들은 우리 위의 고참이고, 자칫하면 우리가 하극상을 하는 게 될 수 있으니까!
그러니 일단 이 상황을 빠져나가고 훗날을 위한 계획을 세워 두는 게 필요한데….
그리고 나는 마침 저 멀리서 이 상황을 구경하고 있던 달린과 눈이 마주쳤다.
‘달린!’
이 순간 난 그 어느 때보다도 달린이 반가웠다.
내가 눈을 부릅뜨고 달린을 보며 뭐라도 해 보라는 신호를 보내자 내 신호를 알아차린 듯 달린의 얼굴이 환해졌다.
이윽고 달린은 이쪽으로 쫄래쫄래 뛰어오더니 로산과 케이엇을 향해 외치기 시작했다.
“로산 님, 케이엇 님! 그거 아십니까?”
“뭐야?”
”아르콘의 놀라운 능력에 전 대륙이 경악하고 아돌브 제국민이 분노하며 대륙 사람들이 아르콘이 되고 싶어 난리 난 이유!”
“뭐, 뭐?!”
“뭔진 모르겠지만,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어!”
조금 전까지 나를 노려보고 있던 로산과 케이엇이 뭣에 홀린 듯 순식간에 달린에게 주의를 빼앗겼다.
‘…뭐지?’
왠지 주어만 바꾼다면 전생의 너튜브에서 참 많이 봤던 제목인 기분…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역시 달린은 어그로의 제왕이야.’
달린이 미친 듯이 어그로를 끄는 동안 나는 얼른 이시나와 아퀼라, 카론을 데리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달린에게는 상으로 1회 갈굼 인내권을 선사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 * *
자리를 빠져나오자마자,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이시나에게 이유를 묻는 것이었다.
“이시나 님, 왜 그러셨습니까…?”
“하하….”
조금 전의 싸늘한 태도와 달리, 이제 이시나는 평소의 여유롭고 부드러운 태도로 돌아와 있었다. 사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정말 흑막 같았다….
“어차피 곧 가시는 분이, 그냥 조금만 참으시지….”
“하지만 사루비아, 그걸 어떻게 참니.”
하긴, 이렇게 이시나에게 뭐라 해도 이미 우리 손을 떠난 일이다.
우리는 대놓고 저들과 척을 졌고, 이제 둘 중 하나가 패배하지 않으면 끝나지 않는 파워 게임이 시작된 것이다….
‘아오, 지휘사관이면 그냥 얌전히 지내다 갈 것이지.’
그렇지만 사실 저들이 저렇게 구는 이유가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상등병으로서 자신의 부대에서 힘을 가지고 있다가 다른 부대로 와 지휘사관이 되며 자연스럽게 힘을 잃는 과정을 받아들이기 어려웠겠지.
‘아마 케이엇은 그냥 한번 로산을 부추겨 보는 것일 테고.’
그간 후임들에게 장난을 치는 케이엇의 태도가 묘하게 찜찜했는데, 그도 마음 한구석에는 권력에 대한 열망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번에 권력욕이 많은 지휘사관인 로산이 새로 온 것은 그에게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로산이 지배력을 획득한다면 그에게 나쁠 건 없고, 로산이 실패하더라도 케이엇은 어차피 조금만 시간을 죽이다가 제대하면 되니까.
흠…. 이 상황에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시나가 방금 전 지휘사관들과 대놓고 싸우기는 했지만, 평소처럼 돌아온 그의 얼굴을 보자니 그는 일을 더 벌일 마음이 없는 듯했다.
“휴우….”
그때 이시나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난 재빨리 아무 생각도 없는 척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이시나 님, 저 정말 아무 생각도 안 했….”
“거슬리네.”
“예?”
그러나 이시나는 내 말은 들리지 않는 듯, 우리가 떠나온 자리를 돌아보며 묘한 표정을 했다.
“그래, 거슬려….”
저건 진짜로 흑막 같은 대사인데, 내 착각인가?
“역시 떠나기 전 부대를 좀 정리해둘 필요는 있겠지.”
…착각이 아니었다.
마지막 대사에 담긴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리는 없었다. 내가 로판을 얼마나 많이 읽었는데.
‘난 그냥 얌전히 있어도 되겠네.’
드디어 이시나의 흑막 특성이 발동되나 보다!
* * *
하지만 놀랍게도 이시나는 그 발언 이후로 아무것도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이시나 님, 요즘 뭐 꾸미는 일 없으십니까?”
“나한테 뭘 기대하는 거야, 대체?”
…흠, 하긴 흑막이 자신의 계획을 동네방네 떠들고 다닌다면 그것도 흑막답지 않은 일이긴 했다. 원래 흑막이 하는 일은 눈에 보이지 않게 일어나는 법이지.
그렇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건 지휘사관들 측도 마찬가지였고, 그랬기에 오히려 부대 내에는 외줄 위를 타는 듯한 팽팽한 긴장이 서려 있었다.
‘뭐, 이시나가 알아서 하겠지.’
이번만큼은 진정한 흑막 이시나에게 모든 것을 믿고 맡겨도 될 것이다.
나는 그동안 계속 마물이 탄생하는 방법에 대한 자료를 찾아 중대 자료실을 뒤졌고, 혹시나 지휘사관들과 있을 파워 게임을 위해 후임과의 관계를 잘 다져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달린. 지난번 네 어그로는 아주 훌륭했다.”
“헤헤….”
“그걸로 네가 저번에 훈련 때 낙오한 건 봐주겠다.”
“정말입니까? 감사합니다!”
“하지만 실수로 내 동기한테 물을 엎지른 건 용서 못 한다, XX야!”
“그, 그게…!”
내가 익숙하게 달린을 갈구기 시작하자 우리 소대 건물에 막 도착한 내 베타 소대의 동기 블루가 당황해서 입을 헤 벌렸다.
“사, 사루비아? 나는 괜찮아….”
그제야 나는 달린을 놓아준 뒤 블루에게 다가갔다. 나를 찾아왔다가 달린에 의해 실수로 물벼락을 맞은 블루는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 있었다.
“미안하다, 블루. 후임 교육은 내가 똑바로 해 놓을게.”
“괜찮다니까…. 아 맞다, 사루비아. 그러고 보니 그 소문은 진짜냐?”
블루는 자신이 물에 쫄딱 젖은 것보다는 다른 일에 더 관심이 있는 듯해 보였다.
“요즘 너희 소대 분위기 안 좋다며? 새로 온 지휘사관이랑 싸웠다고 들었는데.”
“넌 그걸 대체 어떻게 안 거야?”
하긴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 원래 군대에서는 모든 소문이 다 퍼져 나가는 법이고, 게다가 내 동기 블루는 대단한 소식통이었으니까.
“뭐, 나도 거기까지밖에 못 들었어. 결국 네가 못 참고 들이박은 거 아냐?”
“내가 아니었는데?”
“아, 그럼 아퀼라? 하긴, 걔가 너 대신 싸우기라도 했나 보지?”
“아퀼라도 아니거든?”
“그럼 누군데?”
블루가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듯하기에, 나는 지휘사관 로산과 싸운 인물이 누구인지 그에게 정확히 알려 주기로 했다.
“이시나 님.”
“…뭐? 네 맞선임? 그 착하신 분 말이야?! 거짓말!”
“진짠데.”
“아니, 대체 왜…! 그럼 보나 마나 로산 님이라는 분이 잘못했나 보네.”
블루가 단박에 그렇게 단정 지을 정도로 이시나의 중대 내 평판은 상당히 좋았다. 그는 모두에게 착하고 인자한 선임으로 알려져 있었으니, 그런 이시나가 로산과 싸웠다는 소문을 들으면 누구라도 로산 쪽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대체 왜 싸운 건데?”
“아, 그쪽에서 자꾸 먼저 우리한테 시비를 걸잖아. 딱 봐도 우리 기를 꺾어 놓고 새로 온 부대에서 한탕 해 먹으려는 것 같은데….”
“잠깐, 사루비아.”
블루가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보았다.
“그럼 너랑 원래 별다른 일은 없었다는 거야?”
“그래! 내가 먼저 잘못한 건 없었다는 거야!”
“…그렇다면 나에게 짐작 가는 바가 있는데.”
“뭐?”
로산이 그저 권력 때문에 우리를 고깝게 여기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