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의 집착보다 내 탈영이 빠르겠다 106화 (124/233)

#13. 흑막 캐가 “거슬리군.”을 시전했다

제대 D-898일.

“이시나 님, 그런데 제대하면 뭐 하실 겁니까?”

“글쎄. 구체적인 계획은 없는데, 아무래도 공부를 하지 않을까 싶어.”

“그럼 이시나 님은 어떤 학문을… 야, 그냥 제이슨! 네 동기들 신발 짝짝이로 신었다!”

“으악! 감사합니다! 패티, 매티, 제발!”

이전에는 후임들이 잘못하고 있을 때마다 당장 달려가 그들의 멱살을 잡았을 나였지만, 요즘에는 꽤 여유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왜냐하면 자이든과 밀피에 이어서 베니까지 이번 달에 상등병이 됐기 때문이다.

아, 그리고 이시나의 경우에는 석 달 뒤면 진급하여 다른 부대로 떠날 예정이었다.

그건 아퀼라와 나도 마찬가지였다. 즉, 우리의 제대일이 세 자리 수밖에 남지 않았다는 얘기지!

‘와, 세 자리 수밖에 안 남았다니 너무 행복해….’

…이전 세계의 대한민국에서는 원래 세 자리 수 복무일이 정상이었던 것 같은데, 내 기분 탓이겠지?

하여튼, 그런 이유로 요즘 나는 기분이 몹시 상쾌했다.

이시나도 늘 눈 밑에 드리워져 있었던 다크서클이 사라져 있었고, 아퀼라도 아주 개운하고 후련해 보였으며, 카론은 언제나 그렇듯 환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야, 자이든. 신병 관리를 더 잘하란 말이야, 어? 저번에 세 명이나 죽어나갔잖아.”

“…죄송합니다.”

상등병이라고 다 같은 위치일 수는 없다. 자이든과 나 사이에는 무려 일 년도 더 넘는 짬밥이 존재하고, 상등병이 된 이후에도 나는 자이든을 잘 눌러놓는 걸 잊지 않고 있지. 참 완벽한 날들이었다.

“야, 사루비아.”

“예?”

“요즘 애들 군기가 빠졌다니까. 일 똑바로 안 하냐?”

“…예, 시정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딱 한 가지만 빼면 완벽하다는 얘기였다….

몇 달 전에 새로 이 부대에 온 지휘사관 로산은 나에게 묘하게 까칠한 태도였다.

보통 지휘사관들은 다른 부대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이미 이 부대에서 5, 6년을 보낸 상등병들에 비해 지배력이 낮은 편이다.

그래서 지휘사관들은 별다른 찔을 부리지 않고, 대신 상등병들도 지금까지 그들이 먹은 짬을 인정해 그들을 최대한 존중하고 예우해 준다.

이게 이전 세계와 달리 ‘부조리를 저지르는 말년 병장’ 같은 게 존재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였다.

그런데….

‘대놓고 권력을 잡으려는 건가?’

현재 이 부대의 지휘사관은 둘. 케이엇, 그리고 로산이었다.

케이엇은 윈터와 제이가 있을 때는 평범하게 조용히 지휘사관 노릇을 했지만, 그들이 제대한 이후에는 가끔씩 후임들에게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뭐, 그 정도는 이제 왕고가 됐으니 그러는 거겠지 하고 넘길 수 있겠지만.

새로 온 지휘사관이자 남자 선임인 로산. 그는 왠지 모르겠지만 상등병들을 갈굴 일이 있을 때 대놓고 나를 콕 집어내고는 했다. 혹시 나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닌지 의문이 들 지경이었다.

로산이 자리를 떠나고 나서 내가 뚱한 표정을 짓고 있자, 이시나가 나를 토닥이며 설명해 주었다.

“저분은 네가 싫어서가 아니라, 그냥 네가 상등병들의 중심에 있어서 그런 거야.”

“잘 못 들었습니다?”

“로산 님은 상등병들이 확실하게 자신을 대우하도록 만들고 싶은 것처럼 보이거든.”

나는 그게 무슨 의미냐고 되물으려다가, 일단 머릿속에 소대 내 상등병들의 현재 위치를 그려 보았다.

기수가 가장 높은 건 이시나. 그렇지만 그는 얼마 뒤 진급해서 떠날 사람이므로, 가장 큰 권력을 갖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자이든, 밀피, 베니는 아직 상등병 초반이고. 카론은 나와 아퀼라의 말을 잘 들는다.

아퀼라는 상등병들 중 가장 많은 일을 도맡고 있었으므로 그가 가진 권력이 가장 크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보통 내가 하자는 대로 해 주는 경향이 있었다.

‘아하, 그래서군….’

로산은 상등병들의 기를 꺾어 놓기 위해 나를 콕 찍어 기 싸움을 하는 것이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나의 영향력이 가장 크다고 인정받은 것에 기뻐해야 할지, 말년에 얌전히 제대 준비나 할 것이지 왜 저러냐면서 욕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확실한 건…

“무슨 상황인지 잘 이해했습니다, 이시나 님….”

“…뭐?”

고개를 기울이며 나를 본 이시나의 얼굴에, 순간 불길함이 가득 담겼다.

“잠깐. 너 또 뭔가 하려는 건 아니지?”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 자이든 때처럼 또 뭔가 하려는 거 아니야?”

“예? 아니, 그럴 생각은 없고 그냥… 저도 어차피 반년 뒤면 진급이니까 조심해서 다니려고 말입니다.”

“조심이라니, 너와 정말 안 어울리는 말이지만, 그래.”

이시나가 어쩐지 애절한 눈빛을 보냈다.

“제발 조심해서 다녀. 이상한 짓 좀 하지 말고….”

“아니, 제가 무슨 이상한 짓을 했다고 그러십니까.”

나는 정말 억울했다. 내가 자이든 때처럼 다시 정치질을 하려는 걸로 착각하는 모양인데, 내가 이시나 같은 흑막도 아니고 사소한 불편함 때문에 그런 짓을 할 리 없었다.

* * *

오늘 경계 근무는 오랜만에 아퀼라와 함께 서는 날이었다.

사실 우리는 각자 후임들을 챙겨야 하는 위치이기 때문에 함께 근무를 설 일이 거의 없었는데, 이제 우리 아래로도 상등병들이 좀 생겼으니 이런 일도 가능해졌다.

“짜잔.”

내가 품에서 금색 손목시계를 꺼내자, 아퀼라의 시선이 손목시계로 이동했다.

“저번에 가지고 온 거구나.”

“응. 이게 있으면 훨씬 안전하니까!”

손목시계는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주변에 접근하는 마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근무에 조금 덜 집중하고 마음 편히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역시 너랑 있을 때가 제일 편하다니까.”

“나도 그래.”

나는 난간에 대충 몸을 기댄 채 하고 싶었던 말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시나 님이 진급하시니까 기분이 이상해. 그럼 2년은 더 지나야 다시 볼 수 있는 거겠지.”

“전역한 뒤에도 만나겠다며.”

“응. 어차피 나가 봤자 알고 있는 사람들도 없으니까.”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가, 무언가를 깨달은 내 얼굴이 순간 심각해졌다.

“정말 이놈의 국경방위군이 문제야. 이럴 때 선물이라도 준비하면 좋을 텐데.”

하다못해 생일에 케이크 하나 나오지 않는 이곳에서 무얼 바라겠냐마는.

“그러게…. 드릴 수 있는 게 없네.”

“그건 아퀼라 너한테도 마찬가지야. 우리가 진급하면 다른 부대로 흩어질 텐데,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게 없어.”

원작을 읽었기에 나는 아퀼라가 이 부대에서 지휘사관 생활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도 이 부대에 배정받을 수는 없으므로 우리는 필연적으로 헤어져야 할 텐데, 기껏해야 편지로만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건 생각만 해도 답답한 일이다. 우리는 6년 동안 매일 얼굴을 봤는데.

“괜찮아, 사루비아. 제대하면 그때부터 함께 있을 거잖아.”

“응…. 아니, 잠깐. 우리 이시나 님 얘기하고 있지 않았어?”

반쯤 넋을 놓은 채 아퀼라의 말에 동의하다가, 원래의 화제를 떠올린 내가 고개를 번쩍 들었을 때였다.

“어?”

느리게 움직이던 손목시계의 바늘이, 갑자기 숫자 하나를 가리키며 우뚝 멈췄다.

바늘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바로 숫자 ‘1’이었다.

‘근처에 마물 한 마리가 나타났나 보네.’

바늘이 정지해서 숫자를 가리켰을 때는, 그 숫자만큼의 마물이 근처에 나타났을 때라고 했다. 나는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총을 고쳐 잡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역시나 국경을 나누는 철조망과 바로 맞닿아 있는 곳에 거대한 뱀처럼 생긴 마물 한 마리가 나타난 것이 보였다.

“아퀼라, 저건 공격하는 게 좋겠지?”

“응. 국경을 넘을지도 모르겠네.”

탕-!

나는 익숙하게 방아쇠를 당겼고, 탄환을 맞은 뱀은 그대로 그 자리에 나동그라졌다. 국경 너머이기 때문에 우리가 마물의 시체를 처치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쓰러져 있는 마물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런데 저 마물은 언제 나타난 거야?”

“…….”

아퀼라는 내 질문에 답을 내놓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문제였다. 일단 실력을 쌓고 마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하느라, 나는 한 번도 근본적인 문제를 고민해 보지 않았다.

그러니까, 마물이 어떻게 탄생하는지와 같은 것들 말이다.

이번처럼 우리가 발견하지 못했던 마물이 갑자기 국경 근처에 나타나 있는 경우가 있었다. 그동안은 마물이 우리의 눈을 피해서 잘 접근했거니 싶었는데, 손목시계가 미동도 없었던 점을 감안하면 분명 원래는 근처에 마물이 없었다.

내가 방금 쏴 죽인 마물은, 어느 순간 국경 근처에 뿅 하고 나타났다는 소리였다.

‘…자연적인 번식 때문이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도 탄생하는 건가?’

나는 이 세계에 대해 모르고 있는 것이 너무 많았다.

* * *

그 후로 나는 마물에 대한 정보를 찾기 위해 중대 자료실에서 몇 권의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아퀼라와 카론이 나와 함께 옆에서 자료를 찾아 줬지만, 별로 쓸 만한 정보는 없어 보였다.

“에휴, 그냥 빨리 제대하고 밖에 나가야 더 많은 정보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역시 이 X 같은 곳의 해답은 제대밖에 없다….

이시나가 말한 대로 이 부대에서 반년 동안 얌전히 진급을 기다리고, 지휘사관이 된 후에는 적당히 자료를 찾으며 제대를 기다리면 될 것이다.

그렇지만 언제나 그렇듯 이곳에서 내 바람은 이뤄진 적이 없다.

“사루비아, 왜 또 빡쳐 있어?”

“아니, 달린이 먼저….”

“이제 네 담당도 아닌데 자이든이랑 밀피한테 맡기고 좀 진정하라니까.”

“예. …그런데 달린이 먼저….”

여느 때와 같이 내가 달린에게 분노하고 이시나가 나를 뜯어말릴 때, 뒤에서 최근 자주 들었던 목소리가 우리를 불렀다.

“야.”

“넷슴다?”

나는 고개를 돌려 로산과 눈을 마주쳤다. 와인색 머리카락을 눈이 가려질 정도로 기른 로산이 나를 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왜 그렇게 건방지게 굴어?”

“잘 못 들었습니다?”

“뭔데 선임한테 그렇게 버릇없게 구냐고.”

‘또 시작이군.’

나는 정말 가만히 있었는데 저쪽에서 먼저 싸움을 걸어왔다.

그가 내게 가까이 오라며 손짓했기에, 나도 불만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그에게 다가갔다.

그동안 상등병과 지휘사관 간 팽팽히 유지되어 오던 관계를 그가 깨 버린 이상, 나도 마냥 얌전히 굴 생각은 없었다.

그런 내 표정을 보자 그가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클레도어 산악대대는 원래 이렇게 위아래가 없나 보네.”

그가 보라색 눈에 힘을 주며 나를 노려봤고, 나도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우리 사이에 무거운 긴장감이 흐르고, 내가 그 이후로도 쭉 눈에 힘을 풀지 않자 그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더니 한 손을 들어 올렸다.

‘XX.’

아무래도 한 대 치기라도 할 기세였다.

이 부대에서 더 큰 권력을 가진 건 나다. 그러니 여기서 그에게 대놓고 반항하는 것보다는….

‘일단 한 대 맞아 주자.’

내가 한 대 맞은 뒤에는, 그의 힘을 꺾을 계획을 꾸미기 더 쉬울 것이다. 소대 내 싸움이 아니라 중대 내 싸움으로 확장시킬 수 있도록 다른 소대의 동기들과 다른 상등병들을 이용한다면….

“왜 그러십니까.”

내가 한 대 맞을 각오로 눈을 부릅뜨고 있을 때 이시나가 갑자기 나를 휙 잡아당겨 자신의 뒤로 끌고 왔다.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이었다.

‘어?’

내 앞에 선 이시나가 평소와 달리 굳은 얼굴로 로산을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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