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시나는 별안간 고개를 번쩍 들더니 윈터에게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큰 보폭이었다.
“윈터 님!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습니까!”
“무엇이 말이지.”
“어떻게 애를… 다짜고짜 윈터 님의 부모님이 계신 곳에 끌고 가서….”
“저… 이시나 님…. 제가 궁금한 게 있어서 따라간 거지 말입니다.”
“사루비아, 비 오니까 들어가 있어. 윈터 님! 부모님한테 눈도장부터 먼저 찍어 두시려는 겁니까?!”
“이시나,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아니, 자기편도 없이 대뜸 부모님 앞에 데려다 놓으면, 애가 얼마나 긴장했겠습니까? 지금 애 기죽여 놓으시려는 겁니까?!”
‘뭐지?’
결국 이시나의 말대로 슬쩍 자리를 피해 뒷걸음질을 치다가, 나는 저 멀리 있는 알타이르와 유리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얼른 그쪽으로 달려갔다.
“알타이르 님, 유리 님!”
“어, 사루비아!”
알타이르가 환한 얼굴로 나를 반겼다가, 내가 그들의 옆에 서기가 무섭게 질문을 던졌다.
“사루비아, 너 윈터랑 함께 매개체를 파괴했다며?”
“예, 저희 둘이 한 건 아니고, 아퀼라도 함께였습니다.”
“역시 아퀼라가 큰 산이군…. 그나저나 사루비아, 윈터랑 생각보다 잘 지내는 모양이네?”
“불편할 게 뭐 있겠습니까. 윈터 님은 믿음직한 분이신데.”
그 말에, 알타이르와 유리가 미묘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동기가 칭찬받는 모습이 오글거리게 느껴지는 건가?
“지금은 잠깐 윈터 님의 집에 다녀왔습니다. 찾고 있는 정보가 있었는데, 윈터 님의 부모님이 알고 계셔서 말입니다.”
“어…? 지, 집에 다녀와…?”
부대로 떠나야 할 시간이 된 것 같아서, 나는 얼른 그들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남겼다.
“알타이르 님, 유리 님! 전역 미리 축하드립니다!”
“어, 어, 그래….”
“가능하다면 제대하고 보자….”
쿨민트아이스 78기의 제대라니, 나도 입대한 지 시간이 참 많이 흐른 것 같다. 제대하는 사람들이니까 앞으로는 쿨민트아이스민간인 78기라고 해 줘야지!
* * *
사루비아가 떠난 자리, 알타이르와 유리가 오묘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우리가 좀 틀렸나?”
“적어도 사루비아에게 좀 특별한 선임이기는 했던 모양이야.”
“…역시 윈터. 뭐든 잘하는군.”
“관계 진전을 해 보라고 했더니, 이렇게 빠를 줄이야.”
“FM 선임과 후임의 관계에서 갑자기 부모님까지 뵙고 오다니.”
“내 동기지만 참 대단하긴 해….”
* * *
흑마술사의 집에 도착했을 때, 나를 기다리는 건 생각지도 못했던 소식이었다.
“아퀼라가 흑마술사의 다리를 부러뜨렸다고?”
“음, 그렇습니다….”
베니가 어쩐지 뜨뜻미지근한 태도로 답했고, 나는 그 말에 윈터에게 한소리 듣고 있는 중인 아퀼라를 바라봤다.
물론 흑마술사는 우리를 분노하게 만든 악인이긴 했지만, 그래도 흑마술사에게 멋대로 보복하는 건 문제가 될 수 있었다.
“다음부터는 좀 더 원칙을 준수하도록.”
“시정하겠습니다.”
윈터에게 한참 동안이나 훈계를 듣고 나서야 아퀼라가 풀려나기에, 나는 얼른 아퀼라에게로 달려갔다.
“아퀼라!”
윈터의 앞에서 굳어 있었던 그의 얼굴이 조금 풀리는 게 보였다.
“그동안 카론은… 잘 돌봤나 보네.”
묘하게 밝은 카론의 모습을 보니 흑마술사로 인한 트라우마를 느끼는 상태는 아니었다.
“그런데 흑마술사의 다리는 왜 부러뜨린 거야?”
“…그냥, 저지른 일이 많으니까.”
“그래?”
나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다가, 곧 배시시 웃는 얼굴로 아퀼라의 눈을 마주쳤다.
“잘했어.”
그건 진심이었다. 감옥에 가두는 것 정도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래?”
내가 그런 말을 할지 몰랐던 건지, 아퀼라가 되물었고.
“응, 잘했어.”
내가 다시 한번 그렇게 속삭이고 나서야, 아퀼라의 얼굴은 완전히 밝아졌다.
“정말 어쩌지, 사루비아.”
“응?”
아퀼라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의 기분이 풀린 것 같았기에 나는 구태여 더 캐묻지 않았다.
* * *
부대에 도착한 뒤에는 비가 좀 그쳐 있었다.
그러나 이미 우리는 걸어오는 동안 비에 쫄딱 맞아 흠뻑 젖어 있는 상태였기에 다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몸을 말렸다.
평소의 나는 머리카락에서 물기가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닦아 내는 정도였지만, 오늘은 거울로만 봐도 내 입술이 파랗게 질려 있을 정도였기 때문에 머리카락을 완전히 말려야만 했다.
그리고 지금 뒤에서 마른 수건으로 내 젖은 머리카락을 닦아 주고 있는 건 아퀼라였다.
“에취!”
“추워?”
“아니, 지금은 안 추웠는데 아까 추웠어서 그래.”
꼼꼼히 머리카락을 말려 주고 있는 아퀼라와 대화를 하는 동안에도, 이시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매의 눈으로 우리를 감시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말투는 여전히 다정하긴 했다.
“사루비아, 감기에 걸렸니?”
“그냥 비를 맞아서 그런 것 같은데, 아마 금방 괜찮아질 겁니다.”
윈터의 성에서 몸을 녹이기는 했다지만 역시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하긴 그 성은 묘하게 추웠어….’
윈터의 가족이 내뿜는 한기로 인해 담요를 두르고 있었음에도 별로 따뜻하지는 않았지….
인간 핫팩 아퀼라와의 접촉이 절실했지만 이시나가 나와 아퀼라에 대한 감시를 멈출 생각을 하지 않길래, 나는 슬쩍 눈치를 보다가 이시나에게 말을 붙였다.
“그런데 그냥 아퀼라랑 있으면 몸이 금방 따뜻해질….”
“안 돼.”
“예…. 그런데 혹시 군법이 그런 건 알고 있지만 말입니다….”
“안 돼.”
“예….”
사실 그냥 아퀼라를 껴안고 있으면 그냥 한기가 가신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시나가 기겁하며 내 목덜미를 붙들고 떼어 냈기에 나는 강제로 아퀼라와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시나 님, 그런데 아시다시피 정말 불순한 의도는 없으니까, 누가 오해하고 신고만 하지 않는다면 저희가 영창 갈 가능성도 없고….”
“사루비아, 제발 내 말을 좀 들어 봐. 지금 너는 경계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 이게 다 너를 위한 거라니까….”
“예….”
예전에 이시나가 나를 진심으로 자신의 사람으로 받아들였을 때는 참 감격했는데…. 지금 보니까 자신의 사람이 워낙 적어서 그런 건지, 이시나는 걱정이 좀 많은 것 같다.
* * *
제대 D-1096일.
오늘은 마침내 윈터가 제대하는 날이었다.
“윈터 님, 민간인으로 진급 축하드립니다.”
“사루비아, 진급이 아니고 전역이다.”
“아, 예….”
역시 윈터에게 군대 농담 따위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우리가 윈터의 전역식을 위해 준비하고 있을 때, 그는 오묘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기만 했다.
‘하긴, 8년 동안이나 있었으니까.’
물론 이 X같은 국경방위군을 떠나는 건 당연히 기뻐할 일이지만, 그래도 8년 동안 있었던 곳을 떠난다고 생각하면 조금이라도 허전한 마음이 들기는 할 것이다.
아직 나로서는 전역자의 입장이 잘 상상되지 않아 빤히 윈터를 바라보고 있자니, 부대 풍경을 눈에 담는 일을 마친 윈터가 내게로 걸어왔다.
“사루비아.”
“예?”
그러더니 그가 나에게 내민 것은 편지 봉투였다. 갑자기 무슨 일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지만, 나는 일단 그 봉투를 받아들었다. 조금 묵직한 것도 같았다.
“그 안에 내가 사는 곳의 주소가 있다.”
“아.”
“그러니 필요하면 편지를 보내도록.”
지휘사관이 된 이후부터는 외부와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데, 그때의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윈터도 나름 나를 친하게 여겼던 건가?’
나와 군 생활을 5년이나 같이 했고, 나는 자신의 절친한 동기를 구해 줬고, 그래서 자신의 라인으로 인정하고 챙겨 주기도 했고….
돌이켜 보면 이 부대에서 윈터와 가장 친한 후임이라면 당연히 나였던 것 같다.
늘 쿨하고 민트하고 아이시한 윈터가 후임에 대한 정을 가지고 있었다니, 왠지 감동적이었다.
“예, 그러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그 봉투 안에 넣어 둔 물건은 네가 필요하다면 써도 된다.”
“예…?”
봉투 안에 뭘 넣어 놨다는 거지? 그러고 보니 주소가 적힌 종이만 있다고 하기에는 봉투가 좀 무겁긴 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지휘사관들의 전역식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얼른 제자리를 찾아 설 수밖에 없었다.
“차렷! 윈터 님께 경례!”
지휘사관 제이가 그렇게 외쳤고 우리는 그의 말에 따라 검을 들어 올려 윈터의 제대를 축하해 주었다.
그 길을 걷는 윈터를 보며 나는 지금까지 제대해서 떠났던 몇 명의 지휘사관들을 추가로 떠올려 봤다. 하지만 역시 윈터만큼 나와 가까웠던 사람이 전역한 적은 없는 것 같다.
“밖에서 잘 사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나는 혼자 그렇게 중얼거리며 윈터에게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하, 이제 윈터가 없다면 이 부대에서 ‘신뢰의 아이콘’ 역할은 누가 맡게 되는 거지?
“…후임들을 잘 육성해야겠다!”
그러고 보니 신뢰의 아이콘은 개뿔. 얼마 전에도 훈련에서 낙오한 놈들이 있는데 그놈들이나 털러 가야겠다!
* * *
후임들을 열심히 털고 난 뒤, 나는 그제야 윈터가 주었던 편지 봉투를 열어 보았다.
그 안에는 윈터의 깔끔한 글씨체로 그의 주소가 적힌 종이가 있었다. 내가 예전에 글공부를 하며 보아 왔던 익숙한 글씨체였다.
“난 아무리 연습해도 이렇게는 안 되던데….”
종이를 빼낸 후 편지 봉투를 들여다보다가 나는 뭔가 익숙한 물건을 발견했다.
“…어?”
봉투 안에 있던 그것은 분명히 열쇠였다.
얼마 전 윈터가 자신의 집에서 가져왔던, 그의 집 금고를 열 수 있는 황금빛 열쇠.
“…이게 왜 나한테 있지?”
자기 집 재산에 접근할 수 있는 물건을 나한테 왜 줘?!
나는 기껏해야 나에게 제대한 후 차비로 쓰라고 동전이나 좀 두고 갔을 줄 알았다!
‘잘못 넣어 놨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황에서 윈터가 나에게 자신의 집 금고 열쇠 같은 걸 선물로 줄 개연성이라고는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그 어느 때보다 당황하여 열쇠를 높이 들고 햇빛에 이리저리 비춰 보며 내 눈을 의심할 때, 이시나와 아퀼라가 어쩐지 즐겁고 후련한 얼굴로 이쪽으로 걸어왔다.
“휴, 한 명이 해결됐으니 이제 마음이 좀 개운하네.”
“저도 참 개운합니다.”
“너까지 없어지면 더 개운할 텐데…. 사루비아?”
내가 들고 있는 열쇠를 발견한 이시나가 그게 뭐냐고 묻는 눈빛을 보냈다. 마침 이 상황에 대해 누군가의 조언이 필요했는데 늘 나에게 적절한 해답을 주고는 했던 이시나가 오다니 참 잘된 일이었다.
“이시나 님! 이것 좀 보십시오!”
“그게 뭔데?”
“윈터 님이 본인의 집 금고 열쇠를 저한테 주고 가셨는데, 도대체 영문을 모르겠….”
“아악!”
그러나 이시나가 또다시 본인의 뒷목을 부여잡으며 비틀거렸기 때문에 나는 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이, 이시나 님? 괜찮으십니까?”
“으윽, 네 고혈압보다 내 고혈압이 빠를 줄은 몰랐는데…. 아냐, 이미 예견된 일이었어.”
“왜, 왜 그러십니까?”
“이놈이나 저놈이나 진짜…. 카론!”
아까부터 이쪽을 얼쩡거리던 카론을 발견한 이시나가 그에게 손짓했다.
“넷슴다?”
“사루비아한테서 저 열쇠 좀 가져와 봐.”
“이시나 님, 왜 그러십니까…?”
“카론, 저 열쇠는 사루비아한테 위험한 물건이니까 뺏어야 해.”
“아! 알겠습니다!”
내가 어리둥절해하며 그들을 만류했지만 결국 이시나는 카론을 시켜 내게서 열쇠를 뺏어갔다.
“사루비아, 당분간 열쇠는 압수다.”
“어차피 밖에 나가지도 못하는데…. 그런데 진짜 그 열쇠를 저한테 왜 주신 것 같습니까?”
“바로 그 생각을 하면 안 돼. 이 열쇠를 보면 자꾸 그런 고민을 할 것 같으니까, 열쇠는 압수야.”
“아니, 대체 왜….”
나는 도움을 요청하는 눈으로 아퀼라를 봤지만, 아퀼라는 진지하게 이시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루비아, 선임의 말은 따르는 게 좋겠어.”
“야, 네가 언제부터…! 너 분명 윈터 님이랑은 사이도 별로…!”
이제는 배신감에 말문이 막히는 지경이었다. 나는 정말 억울했다.
‘잠깐만, 이거 혹시 남주들이 나를 두고 경쟁하는 로판 전개….’
“사루비아 님! 큰일입니다! 방금 패티와 매티가 빨랫줄로 줄넘기를 하다가 사고를…!”
“아오, 그거 미친 XX들 아니야?! 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아오, XX!”
로판 전개는 개뿔, 로판에는 ‘고문관’ 같은 게 나오지 않는다는 설정을 잊은 내 잘못이지, 에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