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흑마술사가 허튼짓하지 못하도록 손목을 묶어 놓고 입까지 막아 놨을 때, 카론이 부대원들을 이끌고 도착했다.
부대원들은 마룻바닥에 쓰러져서 끙끙대는 흑마술사와 누가 봐도 수상한 지하로 이어지는 통로를 보고는 놀란 눈을 했다.
“사루비아, 아주 잘했군.”
바닥에 쓰러진 흑마술사의 상태를 확인하며 윈터가 내게 말했다.
“침착하게 판단을 잘 내려 줬어.”
“감사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내 시선은 카론에게 쏠려 있었다.
흑마술사와, 그에 의해 이용당해 오던 어린아이들. 그들을 눈앞에 두고 있으면, 다시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를지도 모르는 일이다.
“카론.”
“예?”
아니나 다를까, 꾀죄죄한 몰골의 아이들에게서 카론은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얼른 아퀼라의 팔을 툭툭 쳐서 신호를 보낸 뒤, 카론을 가까이로 불렀다.
“와, 다른 부대원들을 잘 불러오다니 멋져! 부대원들을 전부 불러오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구나! 너무너무 대단하다!”
내가 박수를 치기 시작하자, 아퀼라도 나를 따라 반사적으로 박수를 쳤다. 그러자 카론의 표정도 금방 밝아졌다.
‘…참 알기 쉬운 애야.’
어쨌든 이렇게 흑마술사 건은 모두 마무리되어 가는 듯했다. 그러니까 아직 남아 있는 문제 하나만 빼면….
“마법으로 묶여 있는 아이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건 우리가 흑마술사를 인계하고 나면, 전문적인 인력이 와서 해결해 줄 거다.”
아마도 상부 사람들이 남은 일을 해결해 준다는 것 같았는데, 솔직히 상부의 일 처리는 워낙 느렸으니 별로 신뢰가 가지 않았다.
그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흑마술사를 지켜보던 산체스가 입을 열었다.
“이런 건 원래 매개체를 파괴하면 됩니다.”
“매개체?”
“예. 계약을 푸는 방법은 두 가지가 존재합니다. 하나는 계약을 건 흑마술사가 스스로 해제하는 것이고, 두 번째가 바로 매개체를 깨는 것입니다.”
산체스는 두 번째 방법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보통 계약과 관련된 종류의 흑마술은 그 매개체가 되는 아티팩트가 존재하는 법입니다.”
그가 회색 수염을 쓸어내리며 덧붙여 말했다.
“제가 알던 흑마술사도 원래는 저에게 멋대로 계약 주술을 걸려고 했지만, 제가 아티팩트를 망치로 깨뜨린 후 그 망치를 들고 흑마술사에게 가서….”
“으응, 뒷이야기는 알 것 같으니까 그만 설명해도 돼.”
이제 보니 산체스가 입대 전 흑마술사를 알고 지냈던 건, 그가 흑마술사와 동료였던 게 아니라 그가 흑마술사를 협박하여 부려 먹었던 게 틀림없다…. 일반적인 아르콘과 흑마술사의 관계와는 정반대였던 거군.
생각을 마치고 나서, 나는 윈터의 눈을 마주치며 말을 꺼냈다.
“윈터 님, 저희가 지금 계약 마법을 깨는 게 어떻겠습니까?”
상부의 일 처리 속도를 고려하자면, 아이들은 앞으로 얼마나 오래 계약 마법에 묶여 있어야 할지 모른다. 만약 그동안 흑마술사가 탈출하기라도 하면 큰일이 벌어지는 거고.
내가 아까부터 한쪽에 서 있던 알타이르에게 눈짓하자, 알타이르도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을 거들었다.
“그래, 사루비아 말이 맞아.”
“알타이르 너는 어떤 이유로 찬성하는 거지?”
“사실 무슨 소리 하는지 안 들었는데, 어쨌든 사루비아는 내 생명의 은인이니까 맞는 말을 했겠지, 뭐.”
그 말에 윈터가 어이없는 얼굴을 했지만, 그는 이내 침착한 표정을 되찾고 아이들을 쳐다봤다. 마침내 결론을 내린 듯, 윈터는 다른 부대의 사람들이 있는 쪽으로 이동해 각 부대의 지휘사관들과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왔다.
“원칙대로라면 우리는 바로 여기서 손을 떼야겠지만, 상부의 작업 속도를 고려했을 때 지금 당장 우리가 마법을 깨는 게 좋겠군. 각 부대에서도 우리가 마법을 깨기 전까지 보고를 늦추기로 했다.”
그 말에 아이들을 애처롭게 여기던 부대원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 흑마술사가 스스로 마법을 해제할 리는 없으니, 우리는 매개체를 찾아 강제로 파괴한다.”
“흑마술사를 협박해서 풀어 주도록 할 가능성은 없겠습니까?”
사실 우리가 어디 있을지 모를 아티팩트를 뒤지는 것보다는 그냥 산체스가 망치를 들고 흑마술사를 XX해서 계약을 해제시키는 게 좋지 않겠는가.
그때 내 옆에 붙어 있던 카론이 자세를 낮추고 내 귀에 속삭였다.
“사루비아 님. 제 생각에 흑마술사는 절대 스스로 마법을 풀어 주지 않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저희가 협박한다고 해서 풀어 주면 흑마술사는 그냥 끌려가서 갇히게 되겠지만, 끝까지 풀어 주지 않고 버틴다면 기회가 있으니까 말입니다.”
“무슨 기회?”
“저희가 방심한 틈을 타, 아이들에게 자신을 풀어 주거나 저희를 공격해서 퇴로를 만들어 달라고 명령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아하.”
나는 매서운 눈으로 흑마술사를 내려다보았다. 지금 그는 우리에 의해 손발 하나 꼼짝할 수 없고 소리도 낼 수 없는 처지기에 아이들에게 명령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지만….
“흑마술사는 아이들을 원하는 대로 통제할 수 있는 거야?”
“흑마술사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계약자는 심한 고통을 느낍니다.”
이건 우리에게 걸린 계약 마법과 상당히 유사한 형식 같았다. 무언가를 지키지 않는다면 대가로 죽거나 고통을 겪는다.
그리고 나는 그 말을 전해 주는 카론이, ‘그 대가’를 겪어 봤으리라는 사실을 짐작했다.
‘아까부터 왜 속삭이나 했는데….’
예전에 자신을 괴롭힌 흑마술사를 만났을 때, 카론은 그에게 원한이 있고 복수하고 싶다고 했지만, 막상 그의 앞에서는 나에게 모든 복수를 맡겼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또 다른 흑마술사와 그에게 이용당한 아이들이 나타났는데도, 카론은 분노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에게 가까이 붙어 속삭여서 그들에 대한 정보를 전달했을 뿐이었지.
그러니까 카론은 아마도…
‘흑마술사를 두려워하는구나.’
평소에는 아무리 흑마술사를 원망하더라도, 막상 그의 앞에 서면 무의식적인 두려움을 느끼는 게 분명했다.
“카론.”
“예?”
“이리 와.”
결국 나는 카론을 품에 끌어안아 주었다.
정작 나는 화나서 속이 뒤집어질 것 같은데, 카론은 또 환한 얼굴이었다.
‘…에이프릴 파이팅.’
결국 내가 에이프릴을 응원하게 된 횟수가 이제 다섯 손가락을 넘기게 되었다…. 정말 환장할 노릇이었다.
* * *
우리가 1순위로 수색해야 할 곳은 정해져 있었다.
‘당연히 지하실이지.’
아까만 해도 수상한 흑마술 물품들이 가득 놓여 있었고 숨겨진 방이 있었는데, 또 숨겨진 무언가가 있을지 모른다. 흑마술사의 몸수색을 했을 때 나오는 건 전혀 없었기에, 산체스도 우리의 추측에 동의했다.
우리 부대원들 중 일부는 지하실을 수색하고, 남은 사람들은 흑마술사를 감시하고 있기로 했다. 다른 부대의 사람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의사에게 가기로 했고.
고개를 숙이고 깜깜한 지하를 확인한 윈터가 말했다.
“기다리고 있도록. 내가 내려가서 확인하고 오도록 하지.”
음, 혼자 가려는 건가?
그런 내 생각을 알아차린 듯 아퀼라가 나와 눈을 마주친 뒤 윈터에게 말했다.
“혼자 가실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평소에 서로를 꺼리던 둘이 함께 간다니, 의외의 일이다.
“사루비아, 기다리고 있어. 돌아올 테니까.”
…잠깐만. 이거 기분 탓인가?
‘…아냐. 이건 기분 탓이 아니야.’
“기다리고 있도록. 내가 내려가서 확인하고 오도록 하지.”
“사루비아, 기다리고 있어. 돌아올 테니까.”
‘이 XX들 단체로 공포 영화 클리셰를 밟고 있잖아!’
간신히 패티, 매티, 달린 조합을 살려 놨더니, 윈터와 아퀼라는 원작 남주들이면서 왜 스스로 데드 플래그를 밟는단 말인가?!
“잠깐만, 나도 같이 가!”
결국 나는 아퀼라의 소매를 붙잡으며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윈터 님! 최소 3인 1조이지 않습니까!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내 인생의 장르가 공포 영화로 바뀌기 전에, 내가 이놈들을 구제해 줘야 할 것 같았다….
* * *
“사루비아, 그건 군법 위반….”
“넷슴다.”
쳇, 역시 윈터는 눈치가 빠르군. 나는 슬쩍 붙잡고 있던 아퀼라의 팔을 놓아 주었다.
우리는 조금 전 살폈던 지하 공간을 다시 꼼꼼히 확인했다. 아까 그랬듯, 또 어딘가에 비밀 공간이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그렇지만….
“사루비아. 여기 수상해 보이는 인형이 있는데.”
“으악! 그거 빨리 버려!”
“사루비아. 혹시 이 거울이 비밀 통로일 가능성은 없어 보이나?”
“으악! 거울 계속 쳐다보지 마십시오! 뒤에서 뭐가 나타날지 모릅니다!”
자꾸 둘이 번갈아 가며 공포 영화 클리셰를 밟으려 들었기에 나는 그들을 말리기에 바빴다.
그러다가 우리는 조금 전 아이들이 갇혀 있던 방으로 다시 들어가게 되었다. 아까 전 후임들이 수색했다고는 하지만 그들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사루비아, 여기.”
“응?”
“이 너머도 비어 있네.”
처음에 그러했듯 아퀼라는 다시 벽 너머 빈 공간을 발견해 냈고, 그곳으로 이동하기 위해 우리는 익숙한 방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폭력과 공포가 우리 모두를 구원한다!’
아퀼라가 검집으로 벽을 후려침과 동시에, 벽이 무너지며 또 다른 방이 드러났다. 우리가 벽을 함부로 때려 부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윈터는 우리에게 뭐라고 하지 않았다.
“여기는….”
대신, 그의 시선은 방 안에 있는 것들에 꽂혀 있었다.
작은 방을 가득 메우고 있는 선반들. 그리고 선반에 놓인 서류들.
“비밀 서류인가?”
그 서류들은 잘 분류되어 있었는데, 이렇게까지 깊은 곳에 숨겨 놓은 걸 보면 흑마술 아티팩트보다 훨씬 중요한 것들이 분명했다. 혹시 흑마술을 사용하는 방법이라도 적혀 있는 건가?
“아무래도 저게 수상합니다.”
그때, 아퀼라가 선반의 한 곳으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곳에는 새빨간 종이가 있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저 색깔은….
‘피, 피?!’
바로 그 순간, 조금 전 흑마술사가 나와 대치했을 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들의 혈액을 이용하여 계약을 맺어 놨다.”
‘혈액!’
만약 저 종이를 적신 혈액이 아이들의 것이라면, 저게 계약 마법을 위한 매개체일지도 모른다!
“역시 저게 맞는 것 같습니다.”
나는 가장 먼저 방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 종이를 챙겨 와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휘익-.
어디선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미친…!”
내가 있던 자리 바로 오른쪽의 벽에, 화살이 꽂혀 있었다!
그렇지만 분명히 방 안에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내가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아퀼라는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나를 황급히 일으켜 자신의 쪽으로 끌고 왔고 윈터의 다급한 목소리도 들려왔다.
“함정 마법이다!”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 보니, 왼쪽 벽면에 새겨진 기이한 문양이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저, 저게 뭡니까?!”
기하학적인 금빛 무늬는 누군가가 방 안에 침입한 것을 인식한 듯 우리가 있는 쪽을 향해 무기들을 날리고 있었다.
검은 연기로 만들어진 화살과 표창들이 아슬아슬하게 우리를 빗나가서 벽에 꽂힌 뒤 스르르 사라졌다. 비록 연기이지만 만약 저것들에 맞는다면 큰 부상을 입을 것이 분명해 보였다.
“이, 이런 미친 흑마술사 XX. 쓸데없이 꼼꼼해서는!”
그래, 이렇게 중요한 물건들을 숨겨 놓은 방이라면 침입자에 대비하는 주술을 하나쯤 걸어놓은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일단 저 종이만 챙겨서 방을 빠져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상황이 급박하니 저절로 목소리도 커졌다.
“제가 종이를 챙기겠습니다!”
나는 날아드는 화살을 피하며 방 가운데 있는 종이로 다가갔다. 그동안에도 아퀼라와 윈터는 나에게 날아오는 화살을 검으로 쳐내며 나를 돕고 있었기 때문에, 자세를 낮추고 잘 움직인다면 무사히 화살을 피할 수 있었다.
휘이익-!
그 순간,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수많은 화살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꺄악!”
나는 황급히 자세를 낮춰 바닥에 엎드렸고, 나에게 날아오던 화살을 막아 주던 아퀼라와 윈터도 더 이상 나에게 접근하지 못하고 간신히 화살을 피할 뿐이었다. 아무래도 방 가운데까지 들어와서 그런 것 같았다.
‘가능할까?’
화살이 쏟아지고 있는 벽면은, 우리의 왼쪽에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정면에 있는 종이를 향해 계속해서 접근해야만 했고.
“사루비아, 거기 가만히 있어! 내가 갈 테니까!”
아퀼라가 그렇게 외치며 간신히 화살들을 피하며 내게로 다가왔지만, 앞으로 조금만 더 간다면 내가 저 종이를 손에 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만일 아퀼라도 나와 함께 선반에 접근할 수만 있다면 필요한 건….
“아퀼라.”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 짧은 순간에도 아퀼라는 내가 의미하는 바를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할게.”
“고마워!”
우리는 동시에 선반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