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의 집착보다 내 탈영이 빠르겠다 101화 (119/233)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공간. 아퀼라가 검에 두른 불의 오러가 밝히는 곳에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처참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창문 한 점 없고 성인 남자 세 명이 간신히 바싹 붙어 누울 수 있을 작은 공간에, 어린아이들 여덟 명이 몸을 붙이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너희는….”

화려한 외양. 내가 6년간 국경방위군에서 보아왔던 분명한 아르콘의 외관.

갑자기 빛이 들어왔기 때문인지, 아이들이 놀란 얼굴로 우리를 올려다보았다가 눈이 부신지 고개를 돌렸다. 나는 빠르게 아이들의 모습을 눈으로 흩었다.

제대로 먹지 못한 듯 바짝 마른 몸, 허름하고 낡은 옷, 제대로 씻지 못했는지 떡진 머리카락, 그리고 피부에 나 있는 상처들….

실험을 당한 거든, 강제 노역을 한 거든, 확실한 건 그들이 오랜 시간 동안 학대받아 왔다는 것이다. 벽에 나 있는 손톱으로 긁은 듯한 흔적도 눈에 들어왔다.

‘저 소리였을까?’

우리를 부른 소리가 정확히 뭐였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어쨌든 아이들의 고통이 만들어 낸 소리일 게 분명하다.

‘카론….’

흑마술사에게 이용당했다고 해맑게 실토하던 카론의 모습이 떠오르자, 저절로 이가 바드득 갈렸다.

‘이런 거였다고?’

이런 잔악한 일을 겪었으면서도 그렇게 마냥 밝은 얼굴을 하고 내 지시를 따를 수 있었다고?

동시에 아르콘을 원하는 대로 쓰고 버릴 수 있는 도구로 대하는 이 세계에 대해 저절로 울분이 솟아올랐다.

‘이 XX XX들….’

내가 눈에 힘을 주고 금방이라도 입 밖으로 터져 나올 것 같은 욕설을 꾹 참고 있을 때, 아이들은 비로소 우리의 존재를 인지했는지 제각기 반응을 보였다.

“사,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흐윽, 흡….”

아이들은 우리에게 구조를 요청하거나, 울음을 터뜨리거나, 혹은 우리에게까지 두려움을 느끼는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좁은 방구석으로 도망치려 했다.

“얘들아, 괜찮아, 괜찮아….”

속으로는 열불이 끓었지만 아이들을 달래기 위해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상냥한 목소리를 냈다.

“괜찮아, 우리는 너희를 도와주러 왔어. 우리는 너희와 같은 이종족이야.”

“예?”

그제야 아이들의 눈이 내 화려한 머리색과 아퀼라가 두르고 있는 오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검은 치우는 게 좋겠다.”

“그래.”

아무래도 아이들이 검을 두려워하는 것 같아서 아퀼라는 검을 슬쩍 자신의 뒤로 감추고 오러는 유지한 채 빛만 남아 있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제야 아이들이 조금씩 진정하는 것 같기에 나는 조금씩 아이들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우리는 너희를 여기서 내보내 주려고 왔어. 같이 가자, 밖으로.”

“하, 하지만….”

가장 앞에 있던 여자아이 하나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는 마법이 걸려 있는데요….”

“아.”

맞아, 분명히 카론도 그랬다고 했다. 흑마술사에게 강제로 묶여서 그의 아래에서 노역을 했다고.

‘여기에 카론이 남아 있었어야 했나? 이 마법에 대해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아니, 어쩌면 이 광경은 카론에게 있어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지도 모른다. 카론의 도움을 받지는 못하더라도 역시 우리끼리 해결하는 편이 낫다.

“괜찮아. 우리가 그 흑마술사를 잡을 거고, 너희에게 걸린 주술도 풀어 줄게.”

“하, 하지만…. 그 사람은 완전 강한데….”

“우리가 더 세.”

아이들을 달래는 동안, 나는 다시 한번 아이들의 얼굴을 확인해 보았다. 여자아이 여섯, 남자아이 둘.

“…아.”

이전부터 들어 왔던 사실이지만, 아르콘의 경우 입대하기 전 여자가 남자보다 더 많이 죽기 때문에, 국경방위군에 입대할 때 남자의 성비가 더 높다고 했다.

그러니까, 밖에서 죽는다는 게 이런 식이구나….

아이들을 어떤 방식으로 끌고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아이들을 납치해 오기라도 했다면 더 힘이 약해서 납치하기 쉬운 쪽을 데리고 왔을 거니까, 이곳에 여자아이들이 더 많은 거구나. 국경방위군에 오기 전 사라진 여자아이들은 이런 식으로 이용당하다 죽었구나.

그 결론에 도달했을 때 나는 이제 정말로 화를 참기가 어려워졌다. 앞에 아이들이 있는데도 당장 총을 들고 흑마술사를 찾아내 그를 죽여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흐….”

내가 화를 참기 위해 색색거리며 숨을 쉬자 상황을 파악했는지 아퀼라가 내 머리를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나는 그의 품에 머리를 묻은 채 천천히 심호흡했다. 이시나가 지금까지 나에게 50번쯤 강조한 호흡 방법이었다.

심호흡의 효과인지 열기의 효과인지, 한참을 그러고 있었더니 좀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다시 아퀼라로부터 머리를 떼어 내고 어린 아르콘들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얘들아, 일단 올라가자. 지하실 위로 올라가는 게 금지된 건 아니지?”

“네….”

“그럼 가자.”

우리는 여덟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아까 우리가 있었던 아티팩트가 놓인 방으로 나갔다. 우리의 뒤를 따르는 아이들을 본 후임들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달린, 그래서 도대체 군 생활을 잘하는 방법이 뭐냐니까… 헉!”

“사, 사루비아 님! 어떻게 된 겁니까?”

…아무래도 달린이 어그로를 너무 잘 끌고 있었나 보군. 우리가 아이들을 구출하는 동안에도 눈길 하나 안 줬던 걸 보면.

몇 번이나 느낀 거지만 달린은 참 뛰어난 인재가 틀림없다. 어그로 끌기 부문에서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달린이 21세기 지구에 태어났다면 인플루언서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이런 거지같은 세계에서 재능을 낭비하고 있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흑마술사가 이용하고 있었던 아르콘들이야. 흑마술사를 잡으면 얘네한테 걸린 주술을 풀어 줘야 해.”

“아…. 저도 어릴 때 그 소리 많이 들었습니다.”

달린의 맞선임 아브라함이 여전히 충격이 가득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저희 부모님은 두 분 다 아르콘이신데, 어릴 때 저에게 납치당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어린 아르콘들은 신체 능력이 아무리 강해도 성인보다 똑똑하게 굴 수 없으니까….”

나야 어린 시절을 이 세계에서 보내지 않아서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이 세계의 어린 아르콘들에게는 꽤 빈번하게 일어나는 문제인가 보다.

‘이 XX 흑마술사들.’

진짜 잡기만 하면 XX해서 XX해 버리겠어….

제국 북부를 주름잡는 3대 흑마술사. 각각 사기, 테러 미수에 이어 이제는 납치라니, 정말 환장할 노릇이었다.

“우리는 얘네를 데리고 올라갈 테니까, 너희는 얘네가 있던 방을 뒤져 봐. 우리가 그 방 안은 미처 보지 못하고 왔으니까.”

“예, 알겠습니다!”

다섯 명의 후임들이 우르르 숨겨진 방으로 이동하고, 우리는 아이들을 이끌고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앞장서서 나오던 내가 가장 먼저 마지막 계단을 밟았을 때.

“…알아냈군.”

나는 흑마술사를 마주했다.

누가 보더라도 수상쩍은 검은 로브를 두른 자. 황제가 지나던 길에서 테러를 시도하던 그 흑마술사가 입고 있던 복장과 같은 것이다.

‘혹시 얘네끼리 옷 맞춘 거 아니겠지?’

합리적인 의심이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내 눈앞에 흑마술사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냈다는 사실이지.

“쥐새끼처럼 몰래 숨어들어 남의 물건을 훔쳐 가다니, 꼴에 동족이라고 동질감이라도 느끼나 보지?”

…나는 남자가 꺼낸 말에 좀 어이가 없어졌다. 아니, 지금 당장 흑마술을 사용해서 나를 공격해도 모자랄 판에 왜 나불나불대?

‘얘 혹시 설명하기를 좋아하는 타입인가?’

잠시만, 이건 꽤 그럴듯한 추측이었다. 오늘은 클리셰가 자주 발생하는 날인가 보다!

클리셰 같은 악당! 자신의 계획이 성공했다고 생각하고, 계획을 주절주절 떠들다가 결국 주인공에게 역으로 당하는 그런 악당 아닌가?!

“너 안 도망가고 뭐 하냐?”

“하, 네가 아무리 국경방위군이라지만 한 명 정도는 내 선에서 해결할 수 있지!”

“아하….”

아무래도 아퀼라가 여덟 명의 아이들 뒤에 있는 탓에 그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다.

다행히 아퀼라도 내 의도를 알아차린 듯, 굳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숨어 있었다. 역시 이제 우리는 말을 안 해도 서로의 속마음을 다 알 수 있다니까.

정보를 더 많이 얻어 내기 위해 나는 잠깐 흑마술사의 장단을 맞춰 주기로 했다.

“에휴, XX. 제대하기도 전에 흑마술사 때문에 죽을 줄은 몰랐네. 야, 그럼 대체 얘네한테 건 주술은 뭐냐? 이대로 죽으면 궁금해서 한이 남아 있을 것 같단 말이야.”

“큭, 그래. 어차피 죽을 놈이니 여흥으로 알려 주도록 하지.”

‘와….’

나는 그의 악당 클리셰다운 말에 진심으로 감탄하고 말았다.

역시, ‘3대 흑마술사’ 이런 네이밍을 가진 놈치고 진짜 똑똑하고 강한 놈을 보지 못했다. 흑마술사, 악당력 +30.

“그 아이들은….”

흑마술사가 오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치켜들고 말했다.

“그들의 혈액을 이용하여 계약을 맺어 놨다. 어차피 네 힘으로 그걸 해제할 수 있는 방법은 없어.”

계약 마법 때문인지 ‘계약’이라는 말만 들어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기분이었다.

“그걸 파괴할 수 있다는 방법은 안 알려 주겠다는 거지?”

“하핫, 나를 방심시켜 놓고 도망가려는 수작이겠지? 내가 그런 것도 모를 줄 알아?”

“그래, 알았어.”

나는 인자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지금 저 흑마술사로부터 더 알아낼 수 있는 건 없어 보이는군. 그렇다면…

“얘들아, 나와라.”

내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내 뒤에서 아퀼라 그리고 다섯 명의 후임들이 불쑥 튀어나왔다.

내 눈에 패티와 매티, 그리고 달린 같은 후임들은 참 어리바리해 보이지만 그들을 모르는 사람 눈에는 또 다르게 보이는 법이다.

“뭐, 뭐야! 분명히 혼자…!”

“아오, 누가 봐도 수상한 이 지하실에 내가 혼자 내려갔겠냐! 흑마술사들아, 제발 지능적으로 좀 굴자! 정신 차려!”

우리는 흑마술사에게 다구리를 놓았고, 역시 이번에도 폭력과 공포가 모든 것을 구원했다.

이번에야말로 훌륭한 클리셰 파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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