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슬리는 게 여럿이라면, 전부 해결하면 되잖아.”
“하나도 벅차니까 그렇지….”
아퀼라와 내가 무의미한 대화를 주고받고 있을 때, 아까부터 뒤에서 우리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던 듯하던 이시나가 끼어들었다.
“사루비아, 뭔진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 너는 좀 인내심이라는 걸 길러 볼 필요가 있어.”
“인내심… 그건 제가 이미 국경방위군에서 많이 기른 거 아닙니까?”
“후임들에게 욕을 박는 횟수를 지금보다 절반으로 줄이면….”
“아니, 근데 그 XX들이 먼저….”
“제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좀 들어 보려고 하는 건 어떨까?”
“예….”
이시나의 잔소리가 또 시작될 것 같기에 대충 대답하고 넘기려던 나는 문득 무언가를 깨달았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 체계를 바꾸는 것에 대해 복잡하게 생각할 건 없었다. 우리에게 걸려 있는 이 계약 마법을 파괴하기만 하면 국경방위군의 기반도 무너지게 되겠지.
그리고 그 계약 마법에 관련되어 있는 건 황실과 흑마술사. 마침 둘 다 내가 거슬려 하던 대상들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그 마법을 깰 수 있는 방법이 뭔지 모르긴 하지만….
‘일단 황궁에 쳐들어가는 거야!’
황제의 모가지를 따든, 황제의 모가지를 따겠다고 협박해서 마법을 해제하든! 어쨌든 황제는 그 답을 알고 있을 거다!
계약 마법을 깰 방법을 황제에게서 직접 들으면 되는 거다!
“와! 역시 이시나 님! 아이디어 뱅크!”
“…왜? 또 왜? 아이디어 뱅크라는 건 무슨 뜻이야?”
“감사합니다. 도움이 되었습니다.”
요즘은 일이 바빠서 흑막 속성을 자제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역시 사람의 본질은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다. 역시 아무리 내가 머리를 굴려 봐도 원조 흑막인 이시나를 따라갈 수는 없군.
“오늘도 한 수 배워 갑니다. 더 정진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쯤 되면 내가 네 장단에 맞춰 줘야 할지 헷갈리는 지경이야.”
흠, 제대 후 계획이 정해졌다.
이시나의 말대로 제대만 하면 곧장 황궁에 쳐들어가 황제를 협박하든 모가지를 따든 해서 황제의 이야기를 들어야겠다.
“…사루비아? 그런데 너 혹시 위험한 생각 하고 있는 건 아니지? 눈빛이 이상한데? 내가 웬만하면 같이 해 주겠는데, 왠지 조금 불안하거든.”
“국경방위군에서 마물과 싸우는 것보단 덜 위험할 것 같습니다!”
“아니, 그것보다 위험한 게 어디 있는데. 대체 뭔데…?”
이시나가 당황하고 있을 때, 아퀼라가 그 어느 때보다 믿음직스러운 태도로 내 손을 붙잡았다.
“사루비아. 나는 네가 하려고 하는 그 일을 함께해 줄 테니까 걱정 마.”
“아퀼라…! 감동적이야. 그런데 너 혹시 황궁 구조 알아? 아니면 황궁에 아는 사람 있어?”
“없지만 노력해 볼게.”
“뭔 소리야? 황궁 얘기가 왜 나와? 사루비아, 대체 뭘 하려는 건데?”
이시나는 이제 더욱 불안해진 듯했지만, 어쨌든 완벽한 계획을 짠 나는 뿌듯해졌다.
그래, 제대만 하면!
그대로 황궁에 쳐들어가는 거다!
#12. 로판에서 공포 영화 클리셰가 발동될 때
제대 D-1184일.
“그건 군법 위반으로 오해받을 수 있는 행위다.”
아퀼라에게 얼마 전 옆 소대의 정신 나간 후임이 한 실수에 대해 늘어놓고 있던 나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설마 하는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내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고, 역시나 윈터가 차가운 눈으로 우리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또야?’
이제 제대가 3개월도 채 남지 않았는데도 윈터는 여전히 우리를 쫓아다니며 원칙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는지 감시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우리가 자주 듣는 잔소리는 불건전한 이성 교제 행위로 오해받을 시 어쩌구였고.
“아, 오셨습니까~.”
그렇지만 나는 불만을 표출하는 대신 환하게 웃으며 윈터를 반겼다.
“지금까지 마흔일곱 번 이상 말했듯이, 너희는 오해받지 않도록 간격을 유지하는 게 좋을 텐데.”
“아, 그냥 후임들 얘기 좀 하고 있었습니다. 부대 관리는 정말 중요한 일이지 않습니까. 그나저나 윈터 님, 제대가 얼마 안 남지 않았습니까?”
나는 재빠르게 윈터의 제대 이야기로 주제를 돌렸다.
정상적인 사고 능력을 가진 국경방위군의 일원이라면 자신의 얼마 남지 않은 제대 얘기를 꺼냈을 때 그 일에 흥분할 수밖에 없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다.
윈터 또한 내가 꺼낸 ‘제대’라는 단어에 반응하며 아주 미묘하게 표정이 풀렸다.
“그래, 이제 89일 남았지.”
“와, 정말 축하드립니다. 정말 너무너무 부럽습니다. 마음만 같아서는 제대 선물이라도 드리고 싶지만, 여기서 준비해 드릴 수 있는 게 없어서 너무 아쉽습니다.”
이게 다 알타이르에게 배운 처세술이다.
알타이르는 사회성 없는 자신의 두 동기 대신 선임들에게 열심히 샤바샤바하곤 했고, 난 옆에서 잘 배워 두었다. 윈터가 나와 아퀼라에게 더 이상 잔소리를 하지 않는 걸로 보아 효과가 있는 전략인 듯했다.
‘역시 군 생활은 알타이르 반만 따라 해도 된다니까.’
선임들에게 아부하기, 후임들에게 꼰대 짓 하기, 자신의 동기에게 밀려 늘 2인자가 되는 것으로 부대 내에서의 존재감 죽이기. 모두 알타이르에게 전수받은 훌륭한 군 생활의 기술들이다. 나는 내가 살려 낸 알타이르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표했다.
“그래, 곧 제대지.”
윈터가 무거운 기색이 담긴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제대라….”
그 순간, 아퀼라가 입을 열었다.
“제대 정말 축하드립니다.”
나는 놀란 눈으로 아퀼라와 윈터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퀼라가 웬일이지? 속성이 반대되는 탓에 평소 아퀼라와 윈터는 서로를 꺼리는 듯했는데….
이 부대에서 아퀼라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나는 그의 목소리에 담긴 감정을 정확히 읽어 낼 수 있었다.
‘쟤 목소리 완전 진심이잖아.’
하긴, 아무리 사이가 안 좋아도 남의 제대는 진심으로 축하해 줄 수 있겠지. 나도 자이든이 제대한다고 하면 진심으로 축하해 줄 의향이 있다.
한편 아퀼라의 축하 인사에 윈터는 떫은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글쎄….”
윈터가 느릿느릿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지만 내가 제대한다면 잃게 될 것이 있으니, 제대가 마냥 기쁘지만은 않군.”
“예?”
제대를 꺼리는 군인이라니, 저게 뭔 개소리지?
도저히 성립하지 않는 문장이었으나, 놀랍게도 윈터는 진심인 것 같았다. 그는 나와 아퀼라에게 할 말이 있는 듯 우리를 번갈아 보았다가, 입을 꾹 다물고 심각한 고민에 빠진 얼굴을 했다.
반대로 아퀼라의 얼굴은 점점 밝아져 갔다.
타다닥-!
어색한 침묵이 계속되고 있을 때, 누군가가 이곳으로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막내 지나였다.
“아, 저, 전달 사항이 있어서 말입니다….”
아마 윈터를 찾으러 온 듯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몸을 움찔하긴 했지만, 지나는 애써 고개를 돌리고 윈터에게 말을 꺼냈다.
“이번에 외부 근무가 있는데 한 소대만 차출되면 될 것 같아서, 가위바위보로 대충 결정하라고 중대장님께서 그러셨습니다….”
“너는 선임한테 말할 때 차렷 자세 안 하냐?”
“죄, 죄송합니다.”
나는 지나를 째릿 노려보며 그녀를 갈굴 준비를 했지만 정작 윈터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지나를 갈구는 일은 나중으로 미뤄 둘 수밖에 없었다.
“그래, 알겠다. 지금 바로 가도록 하지.”
“예.”
“근무에 대해 자세히 들은 게 있나?”
“흑마술사 체포와 관련된 일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카르반으로 나간다고 합니다.”
“카르반?”
어쩐지 윈터는 흥미가 깃든 목소리로 지나에게 되물었다.
“카르반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지역인지까지 들었나?”
“에고트 마을 쪽이라고 하셨던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말 똑바로 안 하냐?”
“죄, 죄송합니다.”
윈터에게 실수를 하지 않도록 후임을 도와주는 나, 정말 멋진 선임인 것 같다.
‘그나저나….’
나는 아퀼라의 팔을 손가락으로 톡톡 찌르며 물었다.
“카르반이 어디야?”
나는 하다못해 내가 있던 고아원이 어떤 지역에 위치하는지도 모르는데, 이 세계의 지명 같은 것을 알 리가 없었다.
내가 그에게 이 세계에 관한 것을 자주 묻고는 했기 때문에 아퀼라는 익숙하게 대답해 주었다.
“제국의 도시들 중 우리와 가장 가까이 있는 곳. 전통적으로 학문이 발달했고 유서 깊은 가문들이 많이 모여 있어.”
“아하. 그럼 에고트는?”
“카르반에 있는 마을들 중 하나로만 알고 있는데.”
“음, 그렇구나.”
그때, 윈터가 갑자기 힘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지나에게 지시했다.
“가위바위보 같은 건 할 필요 없다. 이번 근무는 우리 소대가 지원하는 걸로 하지.”
“예?”
그의 말에 내 눈이 동그래졌다.
물론 외부 근무를 하면 바깥 공기도 쐴 수 있고, 운이 좋다면 밖의 물건을 사거나 싸제 음식도 먹을 수 있는 좋은 기회지만 솔직히 귀찮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외부 근무를 몇 번 나가고 나니 나도 이제 질려서 그냥 앞으로도 계속 부대 생활이나 하고 경계 근무나 서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그 귀찮은 걸 왜 자원해?’
그렇지만 모든 일에 완벽한 윈터가 알아서 최적의 결정을 내렸거니 싶어서, 나는 그에게 이유를 캐묻지 않았다.
* * *
“이게 빠져가지고 발 질질 끌면서 걷네.”
“죄, 죄송….”
“너는 대체 ‘죄송’이라는 말을 몇 번씩 하는 거야?”
여느 때와 같이 친절하게 후임들을 지도하는 멋진 선임 역할을 하며 에고트 마을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서 우리가 만난 건 생각지도 못한 얼굴들이었다.
“알타이르 님이랑 유리 님 아냐?”
“예, 분명합니다!”
카론도 내 말에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는 것을 보니,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건 아니었다.
그 마을에는 이미 몇 개 부대의 사람들이 도착해 있었는데, 그중에 알타이르와 유리도 있었던 것이다!
알타이르는 외부 근무에서 이미 한 번 마주친 적이 있었지만 유리는 그녀가 진급하고 나서 완전히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들은 곧 제대할 테니 앞으로 아예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우연히 만나다니….
아니, 잠깐. 윈터라면 우연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윈터 님, 설마 알고 계셨습니까?”
“흑마술사 수색이라는 특수성을 고려했을 때, 우리 한 소대만 나간다는 것은 이미 다른 부대에서 충분한 인력을 차출했다는 얘기지. 그래서 주변 부대의 위치를 고려하여 계산했을 때 48.25%의 확률로….”
“우와.”
나는 성의 없는 목소리로 감탄해 준 뒤 알타이르와 유리에게 인사했다. 우리 부대를 알아본 듯 그들도 이미 각자의 부대에서 슬쩍 이탈해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알타이르 님, 유리 님!”
알타이르는 자신감 있어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었고, 유리는 검은 머리카락을 하나로 높이 묶고 윈터처럼 딱딱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둘 다 변한 것 없이 이전과 그대로였다는 소리다.
“야, 여기서 다들 만나게 된다니 반갑다~? 이대로 쓸쓸하게 제대할 줄 알았는데.”
알타이르가 쾌활한 어조로 말을 붙였고.
“여기서 이 지겨운 놈들을 만나게 될 줄이야. 오랜만이다.”
유리는 쿨하고 민트하고 아이시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유리야 원래 늘 쿨한 사람이었지만, 이번의 유리는 정말로 윈터나 알타이르를 만난 게 그리 반갑지 않은 얼굴이었다. 왜인지 그녀의 얼굴은 피로로 잔뜩 찌들어 있었다.
‘진짜 피곤해 보이는데.’
“대체 몇 번째 외부 근무인 거야? 귀찮아 죽겠네.”
“아, 최근에 외부 근무를 자주 나오셨습니까?”
“그래, 진짜 한 달 단위로 나왔다, XX.”
우리 부대는 그래도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유리의 부대가 위치한 쪽에서는 외부 근무를 자주 나와야 했던 모양이다.
유리가 어두운 기색을 풀풀 풍기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자, 알타이르가 유리를 위로해 주려는 듯 그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내가 듣기로는 최근 흑마술 수색 특수군 쪽에 일이 많다고 하더라고. 내부에서 대대적인 개혁이 있나 보던데?”
“…내부 개혁?”
“그래, 이런 식의 흑마술사 체포는 원래 그쪽 일이잖아. 그런데 요즘 그쪽은 자꾸 윗선에서 물갈이가 일어나느라 내부가 전혀 통제 안 되고 복잡하다고 하더라고~.”
“그 썩어 있는 집단이 웬일이래?”
“그러게, 참 신기한 일이다. 어쨌든 그 덕분에 우리가 대신 그쪽 일까지 하고 있는 거지.”
알타이르의 설명을 들으며, 나는 에이프릴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 갑자기 아련해진다….
“네가 왔을 때쯤 흑마술 수색 특수군은 지금보다 더 좋은 곳이 되어 있을 거거든….”
잠깐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 말이 왠지 이번 개혁과 관련 있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혼자서 군의 개혁까지 이끌어 낼 수 있을 리가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