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살펴보니 에이프릴은 평범한 갈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 틈에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갈 수 있는 복장인 걸 보면 위장용인 것 같았다.
그녀가 원피스를 입고 있는 모습은 아주 낯설었지만 그녀의 얼굴만큼은 이전과 다를 게 없었다.
색이 맑고 반짝거리는 긴 금발, 자연을 담아낸 듯한 연두색 눈, 소녀처럼 어려 보이는 얼굴.
“아, 안녕하십니까….”
아까 내가 황제의 얼굴과 윈터, 아퀼라를 보며 시간이 흐른 만큼 모두의 얼굴도 변했다고 생각했었는데….
에이프릴만큼은 시간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사람 같았다.
‘뭐지? 시간조차 피해 가는 건가?’
그리고 그래서 더 무서웠다. 내가 예전에 알고 있던 그 상냥한 얼굴 그대로였다….
아니, 저건 상냥한 얼굴이 아니라 내면의 무언가를 참고 있는 얼굴이지. 나는 이제 안다….
나는 도움을 구하는 눈으로 다른 사람들이 있는 쪽을 쳐다봤지만, 그동안 나에게 지대한 충성심을 보이던 카론마저도 내 눈길을 피했다….
아니, 저거 캐붕 아니냐? 내가 지금까지 카론의 남주력을 평가한 적은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 카론 네 남주력은 –40이다.
“말 편하게 해도 되는데.”
나는 어떻게든 시선을 회피해 보려고 했지만, 그런 내 태도를 일부러 모른 척하는 건지는 몰라도 에이프릴은 방긋방긋 웃는 얼굴로 말했다.
“이제 내가 네 선임도 아닌데, 뭐.”
“하하, 제가 어떻게 그렇겠습니까….”
“네가 그러고 있으니까 내가 아직도 제대 안 한 사람 같잖니?”
그게 말을 편하게 하라는 협박임을 깨달은 나는 그녀에게 말을 놓으려고 시도해 봤으나….
“아, 알겠… 알겠사와요….”
“…뭐야?”
“말을 편하게… 해 보겠…사와요….”
“…….”
XX, 내 온몸이 거부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하하하!”
물끄러미 나를 보던 에이프릴은 내 말투가 웃겼던 듯 소리 내어 웃었다….
웃기냐? 이게 웃기냐고….
“뭐야, 너 벌써 상등병이야?”
내 옷에 달린 견장을 확인한 듯 에이프릴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고 보니 용케 안 죽고 여기까지 왔네? 하, 사루비아 네가 이렇게 짬을 먹다니.”
“하, 하하….”
그녀의 앞에서 나는 한 명의 훈련병에 불과했다. 정말 막 입대한 시점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그래, 그때 또 누가 있었더라~?”
에이프릴이 흥미를 담은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고, 다른 상등병들도 긴장한 얼굴이 되었다. 인성 파탄 85기까지 시선을 피하는 모습에 에이프릴에 대해 모르는 일등병들과 훈련병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하….”
이시나도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에이프릴의 시선을 넘기려 했고.
“오….”
마침 카론을 발견한 에이프릴이 감탄했다.
“쟤 되게 컸다. 네 맞후임이었던 애 맞지?”
“예….”
“너희가 이렇게 짬을 먹은 거 보니까 진짜 이상하다, 호호.”
에이프릴은 특유의 친절해 보이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가, 아퀼라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다시 한번 감탄했다.
“오….”
그녀가 나와 아퀼라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왜 그러…시나요….”
…이제 내 말투는 점점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아냐, 좀 재미있어서!”
에이프릴이 진심으로 재미있다는 얼굴이었기 때문에, 나는 좀 불안해졌다. 저 미친X이 기분 좋을 때 나한테는 좋은 일이 일어난 적이 한 번도 없는데.
마지막으로 그녀는 윈터가 아직 이곳에서 지휘사관을 하고 있다는 것에 감탄한 후, 본론을 꺼냈다.
“뭐, 별건 아니고. 아까 그 흑마술사는 내가 잘 잡아서 본부로 넘길 거야. 너희도 수고했다?”
“아, 역시 흑마술사가 맞았습니까? 이 지역에 3대 흑마술사인가 뭔가 하는 이상한 놈들이 있다고 듣긴 했습니다.”
“에이프릴 님은 흑마술 수색 특수군으로 가신 겁니까?”
나에 이어 윈터가 그렇게 물었고, 에이프릴은 모두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아까 그 녀석, 황제를 해치려고 했던 것 같더라.”
황제를 함부로 입에 담는 그 모습에, 순식간에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내가 카론에게 눈짓하자 카론은 얼른 일등병들과 훈련병들을 저 멀리로 떨어뜨려 놨고, 윈터는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황제 폐하를 왜….”
“뭐, 뻔하지. 흑마술을 탄압하니까.”
그녀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양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손에는 미리 만들어 놓은 저주 토템이 들려 있더라고? 그걸 이용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내가 알아서 잘 파괴했어.”
“그 흑마술사는 어디에 제압해 놓고 오신 겁니까? 혹시 도망치는 건 아닙니까?”
“글쎄.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아?”
그녀가 음흉한 미소를 지었기 때문에, 분위기는 다시 숙연해졌다.
그래… 어련히 잘 제압했겠지…. 불쌍한 흑마술사….
“흑마술사가 제 생각보다 이 제국에 훨씬 많은 것 같습니다.”
‘3대 흑마술사’인가 뭔가 하는 놈들 중 벌써 둘이나 만났다.
흑마술 수색 특수군에 있는 에이프릴은 아마도 산체스보다도 흑마술사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에이프릴을 만난 김에 흑마술사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내가 깨고 싶은 이 계약 마법에 대해 힌트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내 질문에, 에이프릴은 오묘한 초록색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며 대꾸했다.
“아무래도 그렇지. 아주 예전에는 제국 단위로 흑마술이 이루어지기도 했잖아.”
“아, 그렇습니까?”
“특히 아르콘들이 살던 땅을 지배하기 전까지만 해도 흑마술이 굉장히 보편적으로 사용됐거든. 우리가 편입된 이후에야 제국이 강해졌으니까 흑마술을 탄압하고 있는 거고.”
에이프릴은 그 어두운 이야기를 너무나도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에이프릴….
“심지어 지금 우리한테 걸린 마법도 흑마술로 건 마법이었는데, 이제 와서 흑마술을 쓰지 말라니 흑마술사들은 빡칠 만도 하지?”
“아하….”
“그런데 너 이런 기본 지식도 모르니?”
에이프릴이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바라봤기 때문에, 그녀 앞에서 나는 다시 몸을 움츠리며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게요. 제가 배운 게 없어서, 하하….”
“웃음이 나와?”
“시정하겠습… 아니, 죄송….”
“그냥 정말 웃기냐는 뜻이었는데.”
에이프릴 앞에서 내가 한없이 작아지는 모습을 보다 못한 이시나가 끼어들었다.
“하하, 모를 수도 있죠, 뭐. 그러다가 애 울리겠습니다.”
나는 이시나에게 감동했다. 세상에… 그동안 뭐만 하면 흑막캐라고 의심했는데, 이렇게 내 편을 들어주다니.
진심으로 이시나에게 감격한 내가 그의 뒤쪽으로 몸을 숨겼다. 정면에서 에이프릴을 상대하는 건 너무 힘든 일이었다.
내가 이시나의 뒤에서 에이프릴을 흘끔거리고 있자, 그 모습이 불쌍했는지 윈터도 나를 도와주었다.
“사루비아도 꼭 알아야 할 건 제가 잘 가르쳐 주고 있으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윈터 너 많이 컸다?”
“…….”
윈터도 에이프릴에게는 역시 지는군…. 남주력 마이너스… 아니, 이건 에이프릴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므로 깎지 말자….
“내가 없는 동안에 재미있는 일들이 많이 있었나 봐….”
에이프릴이 그렇게 중얼거렸고, 진심으로 재미있어 보이는 그 목소리에 몇몇 사람들이 몸을 움찔했다.
그러다 그녀는 중대장을 발견한 뒤 자리에서 한 발자국 물러났다.
“뭐, 이제 나는 이곳 소속도 아닌데 너무 간섭했나 보네. 난 이만 간다.”
“사, 살펴 가세요….”
“혹시라도 흑마술 수색 특수군으로….”
“아, 아니, 괜찮습니다….”
“나 이거 진심인데?”
에이프릴이 입꼬리를 올려 예쁘게 웃어 보였다.
내가 입대 첫 날! 보았던! 바로 그 미소였다!
‘미, 미친….’
이제 나는 몸을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지만, 에이프릴은 개의치 않고 예쁜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었다.
“네가 왔을 때쯤 흑마술 수색 특수군은 지금보다 더 좋은 곳이 되어 있을 거거든….”
왠지 의미심장한 말이었지만, 나는 그 의미를 알고 싶지 않았다. 그냥 에이프릴과 더 가까워지고 싶지 않아….
“하, 하하…. 저는 정말 사양하겠습니다.”
그녀의 모습을 보자 흑마술 수색 특수군 쪽에는 절대 얼씬도 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더욱 깊어졌다, 음.
* * *
그녀와 헤어지고 우리는 부대로 돌아갔다.
몇몇 후임들은 아까 우리를 긴장시켰던 에이프릴의 정체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사루비아 님, 아까 그분은 누구….”
“네 짬밥에 그런 호기심 갖게 돼 있냐?”
“죄, 죄송합니다.”
물론 말해 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지만.
정말 파란만장한 하루였다. 에이프릴 그 미친X을 만난 데다가, 황제 그 XX XX를 만났다니…. 게다가 미친 흑마술사 XX도 만났고….
‘다 거슬린단 말이야.’
우리에게 걸려 있는 계약 마법이 흑마술에 의한 것이고, 어린 아르콘들이 흑마술사에게 착취당하는 등 지금까지 흑마술사 때문에 입은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닌 만큼 흑마술사가 거슬리는 건 당연했고.
흑마술사가 자신들을 탄압하는 황제를 공격하려 한 것에는 박수를 보내 주고 싶을 만큼 황제도 거슬렸다.
‘그러니까 황실이 흑마술을 토사구팽했다는 거지? 흑마술을 이용해 우리를 지배하게 됐으면서, 이제는 우리를 이용해 흑마술을 지배하려 들고.’
정말 짜증 나는 일이었다.
나는 황제, 그리고 그에 대립하고 있는 흑마술사 모두가 싫었다. 역시 내가 제대 이후 무언가를 한다면, 황실과 흑마술사 모두를 박살 내고 싶은 기분이었다.
XX, 세상에 왜 이렇게 싫은 사람이 많은 거지?
“에휴….”
내가 한숨을 푹푹 내쉬자 주위에 있던 후임들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에휴….”
내가 다시 한숨을 쉬자, 아까부터 옆에서 내 눈치를 보고 있던 아퀼라가 물었다.
“사루비아, 왜 그래. 에이프릴 님 때문에?”
“아, 맞아…. 그분도 있었지. 하지만 그것 때문은 아니야.”
그러고 보니 남주진들 중 기수가 제일 낮은 카론까지 상등병이 됐으니 이제 모두 가오가 좀 생길 줄 알았는데. 아까 다들 에이프릴 앞에서는 어쩔 줄 몰라 하던 걸 떠올리면 역시 남주들의 가오는 아직 모자랐다.
아무래도 제대하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가오를 되찾지 못할 것 같았다. 역시 만악의 근원은 국경방위군이었다.
“그냥, 거슬리는 게 있어서.”
“뭔데? 사람이야?”
“왜? 사람이면 어쩌게?”
“네가 원한다면 누구라도 해결해 줄게.”
나는 아퀼라의 주황색 눈이 진지한 빛을 띠고 있는 걸 바라보다가, 피식 웃으며 한쪽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그럼 에이프릴 님도 해결해 줄 수 있어?”
“…그건….”
“물론 농담이야….”
역시, 남주진 전원 가오 –10.
역시 내가 아는 사람들 중 가오가 제일 높은 건 에이프릴 아닐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의 남주력이 제일 높을 것 같은데?
“뭐, 농담이고 그냥…. 거슬리는 게 하나가 아니어서.”
지금 내 머릿속에 떠올라 있는 건 흑마술사와 황제의 모습이었다.
흑마술사야 비록 고생해야 하긴 하겠지만 힘으로 제압한다 들어도, 황제를 제압할 수 있는 방법은 도통 생각나지 않았다.
정말로 황제의 모가지를 따 버린다면, 나는 제국 전체를 등지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