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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집착보다 내 탈영이 빠르겠다 95화 (113/233)

카론이 제자리로 돌아온 뒤엔 이제 정말로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였다.

비록 에이프릴이 자신보다 덩치가 몇 배는 큰 흑마술사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검집으로 그를 좀 후려 패기는 했지만.

“크윽, 흑마술사에 묶여 있는 놈들 따위가! 너희가 얼마나 바보 같은 싸움을 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너희는 평생 끊이지 않고 나타나는 마물과 싸우며 살게 될 것이다!”

끌려가는 와중에도 그놈이 온갖 저주를 내뱉는 바람에 에이프릴이 바닥에서 짱돌을 주워들곤 19금적인 폭력을 행사하기는 했지만….

에이프릴에게 맞은 게 내가 아니라는 걸 다행으로 여기자….

쿵-! 쿵-!

백마를 탄 새로운 황제가 저 멀리서 위풍당당하게 행진하는 모습이 보였다.

수많은 병사들이 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고, 그들이 절도 있게 걷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걸음마다 땅이 울렸다.

‘쟤네 저 발걸음 맞추려고 엄청 고생했겠다….’

비록 저들은 아르콘이 아니라 아돌브 제국민이라지만, 왠지 그들에 대한 동정심이 피어올랐다.

저 XX 황제 XX, 쓸데없이 야망이 넘쳐서는. 그냥 황궁 밖으로 나오지 않으면 모두가 편하잖아.

과거 황태자를 봤던 때보다 약 4년이 지나 있었기 때문에, 황제는 이전보다 훨씬 성숙해진 얼굴이었다.

예전에는 호기가 넘치지만 아직 앳된 느낌이 강한 소년이었다면, 이제 황제는 더 여유가 있고 권위가 생긴 남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시간이 많이 지나긴 했구나.’

그는 심지어 오만하게까지 느껴지는 얼굴로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재수 없어.

늘 “하! 나를 무시하는 건가?!” 따위의 말만 할 줄 알았던 황태자가 저렇게 자라 있으니 왠지 낯선 기분이었다. 그때의 어린 황태자와 지금의 황제가 같은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긴, 그때는 훈련병이었던 사람들이 모두 상등병이 되어 있을 정도의 시간이니까.

아니, 그런데 왜 이 X같은 국경방위군은 8년 근무냐? 장난하냐, 진짜?

황제의 얼굴을 보자, 윈터가 슬며시 한쪽 손을 들어 자신의 뒷목을 쓸어 보았다가 얼른 정자세로 돌아왔다.

‘…그때 마비 침을 맞았던 걸 몸이 기억하고 있나 보군.’

나는 슬쩍 눈만 굴려 윈터와 황제의 모습을 번갈아 살폈다.

황태자와 대결할 무렵엔 막 청년이 된 자의 건강한 기운을 가지고 있었던 윈터는 이제 더 성숙하고 여유로운 느낌을 풍기고 있었고.

그 모습이 금발의 황제가 풍기고 있는 오만한 기운과 대비되어 보였다.

‘둘이 검술 대련을 하게 됐을 땐 정말 공포스러운 분위기였지….’

시간이 지나 이렇게 보니 그들은 꼭 한 소설의 남주인공과 서브 남주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절대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을 거다…. 황제랑 한 여자를 두고 대립해? 응, 윈터 영창.

그래도 원래 남주인공은 지위 순이라지만, 흑발과 금발의 대립이므로 아마도 윈터가 이기지 않을까.

아,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

나는 얼른 눈을 원위치하려다가, 나를 내내 지켜보고 있었던 듯하던 아퀼라와 눈이 마주쳤다.

황제와 비슷한 나이인 아퀼라는 황제가 황태자로 부대에 왔을 때는 아직 소년의 인상이 남아 있었는데, 그도 지금은 남자라는 느낌이 훨씬 강했다.

이전에는 내가 새침한 고양이 같다고 생각한 주황색 눈동자도 성숙하고 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고.

‘훌륭하게 성장했군.’

나는 내 동기의 긍정적인 변화에 좀 뿌듯해졌다. 왠지 얘가 내 동기라고 자랑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동안에도 황제는 말을 몰며 길을 지났다. 그때와 같이 재수 없게 느껴지는 새하얀 백마였다. 시선을 아래로 깔고 있던 나는 백마의 흰 다리가 내 눈앞을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다가,

탁-.

곧 얼마 안 가 말이 멈췄기 때문에, 차마 고개는 들지 못하고 당황한 눈으로 땅만 살필 수밖에 없었다.

‘뭐지? 또 뭐지? 그때처럼 헛짓하려는 거 아니야?’

저 XX 황제가 뭔가 조금이라도 ‘행동’한다면 우리는 그 말 한마디 한마디에 생사를 오간다는 것 정도야 이제 알고 있다.

모두가 긴장하여 땅만 보고 있을 때, 마침내 기다리던 황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전에 봤던 얼굴이군.”

“예, 예, 그렇습니다! 황제 폐하…!”

슬쩍 고개를 움직여 보니, 황제가 말을 걸고 있는 사람은 바로 중대장이었다. 중대장은 그때와 같이 금방이라도 뒤로 넘어갈 것 같은 얼굴로 황제와 대화하고 있었다.

“내가 옛날에 들렀던 부대인가 보군.”

“맞습니다! 기억해 주신다니 영광입니다!”

‘말투가 변했네.’

그 새침한 말투는 어디로 가고, 지금의 황제는 황제로서의 무게가 느껴지다 못해….

‘로판 남주 같은데.’

로판 남주 같은 딱딱하고 싸가지 없는 말투를 사용하고 있었다. 사회성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말투였다는 뜻이다.

물론 황제인 그의 위로는 아무도 없을 거고, 그가 사회성 없는 말투를 사용하든 말든 아무도 그에게 뭐라고 하지 못하겠지만 왠지 좀 열받는 기분이다.

설마 저 XX도 로판 남주인 건 아니겠지?

어릴 적에는 여주에게 새침하게 굴면서도 은근히 챙겨 주고 자신의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하는 미숙한 츤데레였는데, 여주가 떠났다가 돌아와 보니 갑자기 자기 아버지의 목을 따고 새로운 황제가 된 뒤 무섭게 집착하는 남주 역할인 건 아니겠지?

이곳이 로판 세계인 만큼 꽤 그럴듯한 해석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몰래 자신의 아버지의 목을 따고 황위에 오른 패륜아는 다행히도 아니었던 듯, 황제는 조금 풀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어때, 다들 그때보다 잘 지내고 있나?”

부대원들에게 하는 질문이었기에 중대장이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 기수가 가장 높은 윈터가 나섰다.

“예, 모두 임무를 다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너는 그때….”

윈터의 얼굴을 본 황제의 눈이 가늘어졌다.

“분명 예전에 나와 대련을 했었지.”

“예, 맞습니다.”

목구멍으로 침이 꿀꺽 넘어갔다. 설마, 설마 다시 윈터VS황제 구도가 반복되는 건 아니겠지?

내가 그 어느 때보다 간절히 신에게 기도하고 있을 때, 다행히도 황제는 윈터에게서 흥미를 잃은 눈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

대신, 이제 그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은 바로 달린이었다.

황제는 분명히 흥미가 있는 눈으로 달린을 보고 있었다.

‘뭐지? XX, 뭐지?’

제발 황제가 달린과 말을 한마디도 섞지 않았으면 좋겠다. 제발 달린이 고문관이라는 걸 황제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설마 여주 버프로 황제가 달린에게 반한 건가? 내 영향으로 원작이 뒤틀리며 황제가 달린에게 집착하는 건 아니겠지?

“훈련병인가?”

“예? 예….”

황제의 말에, 달린이 우물쭈물하며 대답했다. 나는 얼른 달린을 노려보았고, 그제야 달린은 몸에 힘을 주며 허리를 더욱 폈다.

“군 생활을 하면서 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사항이 있나?”

“예?”

…XX!

아무래도 달린에게 흥미가 있다기보다는 예전에 우리에게 그랬듯이 민심을 살피는… 뭐 그런 거 같은데.

민심 중독자야…. 제발 하나도 도움 안 되니깐 좀 얌전히 있으라고….

그때 우리야 눈치껏 “하하! 너무 좋습니다! 하하하!” 하면서 넘겼다지만, 상대는 달린이다.

그 어떤 대답을 내놓을지 모르는 상대인 것이다!

‘그리고 달린은….’

달린은 절대 저런 것에 돌려 대답하지 않는다. 누가 갈굴 때 “어? 일러 보지 그래?”라고 하면 진짜로 이르려고 튀어가는 애인데, 그녀라면 틀림없이 원하는 개선 사항을 곧이곧대로 말할 것이다.

모두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듯, 순식간에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모든 상등병들의 시선이 달린에게 쏠렸다.

그러나 그 시선을 받으면서도, 달린은 평소와 같이 순진무구해 보이는 얼굴을 유지할 뿐이었다.

“음…. 저는….”

마침내 달린의 입술이 떨어지자,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복무 기간? 단축? 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XX…!’

모두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드는데도, 달린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만 외부 근무가 별로인지? 모르겠어서? 다른 부대원들의 의견도 들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게 불만인가?”

불쾌한 듯한 황제의 목소리가 들리자, 달린이 웃는 얼굴을 해 보였다.

“제가 언제 불만이라고 했습니까~”

“…분명 그것들이 불만인 것처럼 말한 것 같은데.”

“제가 좀 솔직하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데, 오해를 많이 받아서 참 힘듭니다…. 제가 불만? 그런 게 있는 건 아닙니다.”

아까부터 실시간으로 썩어 들어가는 황제의 얼굴과, 그에 대비되는 달린의 환한 얼굴을 보며 나는 깨달았다.

역시, 달린 쟤….

‘기 XX 쎄….’

그렇지만 솔직히 말해 보라고 한 건 그였기에, 황제도 차마 뭐라고 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그는 즉위 기념 행진을 하고 있었기에, 이곳에서 시간을 지체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달린이 자신의 의견을 솔직히 말하면서도 불만은 아니라면서 한 발 뺀 상황이기에, 결론적으로 불만은 아무것도 없다는 대답을 받은 상황에서 황제는 찜찜한 얼굴을 했지만.

결국 그는 “참고하도록 하지.”라는 짧은 말만 남긴 후 행군을 계속했다.

마침내 황제 행렬의 마지막 사람까지 지나가고 난 뒤에야, 다리에 힘이 풀린 중대장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바, 방금 그 개념 없는 병사는 누구지?”

그렇지만 중대장이 그런 식으로 달린을 갈구려 들 필요도 없었다. 달린 때문에 십년감수했던 다른 선임들이 이미 그녀에게 몰려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이… 미친X이 뒤지려고!”

“개념! 개념 어디다 팔아먹었어!”

인성 파탄 85기가 눈을 부라리며 달린에게 다가가고, 나도 내 혈압이 오르는 느낌이길래 달린의 혈압도 함께 오르도록 만들어 주었다.

“에휴….”

상황이 어느 정도 진정되고 일이 마무리되는 듯했을 때, 우리가 잠시 잊고 있었던 사람이 다시 나타났다.

“사루비아, 오랜만이다?”

“에, 에, 에이프릴 님?”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내 동공이 마구 떨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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