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국경방위군 선정 단두대가 잘 어울리는 남성 1위 황태자
제대 D-1278일.
물론 원작은 대부분 로맨스에 관한 것이었지만, 그래도 난 그곳에 나왔던 정보를 바닥까지 알뜰하게 긁어모아 잘 활용하고 있었다.
흑마술 아티팩트를 통해 얻어낸 원작의 기억이 선명하게 내 머릿속에 존재했다. 전생의 ‘나’에 대한 기억을 잊은 만큼 빈 용량이 생겨서 그런 것도 같고.
그래서 나는 원작에서 패티와 매티가 불을 지를 뻔했던 걸 아슬아슬하게 막고 대신 그들의 근육에서 불이 나도록 만들어 줬고, 달린이 토벌을 나갔다가 동굴에 갇힐 뻔했던 걸 막고 대신 그녀의 머리를 바닥에 가둬 줬고….
물론 그들이 사고를 치면 나까지 피해를 입을 게 뻔하니 구해 준 거긴 하지만, 후임들의 사고를 막는 나는 정말 멋진 선임인 것 같다. 대단해, 사루비아!
‘좋아, 당분간 사건은 없었던 것 같은데.’
이맘때쯤 원작에서는 아돌브 제국의 새로운 황제가 즉위한다. 기존의 황제가 노환으로 사망하고, 황태자가 황위를 물려받게 된다는 소리였다.
그래, 예전에 우리 부대에 방문했던 황태자 그 XX XX 말이다.
‘그 XX XX가 황제가 된다니, X같군….’
그 XX 때문에 내가 고생한 걸 생각하면 당장 모가지를 따 버리고 싶기는 하지만, 어쨌든 원작에서는 황제가 즉위한 기념으로 국경방위군의 무기가 모두 새것으로 교체되었다.
거기다가 나라에서 특별 보급품으로 간식들을 잔뜩 보내 주기도 했다. 그곳에서 ‘단 것을 좋아하는 달린’에 아퀼라가 ‘사루비아’를 겹쳐 보는 장면이 나왔으므로 똑똑히 기억한다.
“감히 나를 겹쳐 봐? XX 빡치네.”
“사루비아, 또 왜 그래?”
“아, 이시나 님. 그냥 누가 저를 다른 사람한테 겹쳐 보면 얼마나 거지 같을지 상상을 좀 했습니다.”
“사루비아…. 제발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분노하지 말아 줘.”
어쨌든 황태자 그 XX XX가 황제가 되는 것과는 별개로, 나는 간식을 먹을 수 있게 되겠지. 이 X같은 곳에서는 먹는 것만이 몇 안 되는 낙 중 하나였다.
“사루비아…. 그렇게 쓸데없는 생각 할 시간에 중대장실 좀 다녀와 줄래? 이따가 중대 훈련 건과 관련된 일이야.”
“아, 넷슴다.”
이시나의 심부름에 따라 중대장이 있을 본부 건물로 향하며,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아르콘에게 맺어진 이 계약 마법을 파괴할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흠, 아무리 그래도 에이프릴이 있을 곳으로 가는 일은 피할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데.
계약 마법을 파괴하려면 흑마술사를 죽여야 하나? 아니, 처음 이 계약 마법을 시행한 흑마술사는 이미 죽었을 텐데. 이미 몇백 년도 지난 일이고, 흑마술사라 해도 불로불사할 수는 없으니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중대장실 앞이었다. 나는 노크를 한 후 안으로 들어갔다.
“아, 알파 소대에서 왔나. 가는 길에 서류 좀 알파 소대장에게 전달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중대장은 나에게 줄 서류를 전달하기 위해 책상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이건 새로 들어온 거고… 잠시만….”
그가 책상을 뒤지면서, 위에 있던 서류 몇 장이 떨어졌다. 나는 얼른 그것을 주워 중대장에게 건넸다.
“여기 있습니다.”
“아, 그래. 고맙군….”
성의 없이 대답하던 중대장이, 가장 위에 있는 서류에 적힌 내용을 보고는 말을 멈췄다.
“이건….”
그가 보고 있는 서류는 새로운 황제의 즉위에 따른 즉위식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래, 그러고 보니 즉위식이 있겠군.”
그는 새삼스레 깨달았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리고는, 서류의 다음 장을 휙 넘겼다. 그곳에는 국경방위군의 무기 교체와 여러 시설 정비에 관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걸 본 중대장의 표정이 밝아졌다.
“이번 황제 폐하께서는 나라를 지키는 데 관심이 많으신가 보군. 그래, 그래야 나라가 부강해질 수 있지.”
하긴, 나라를 지키는 데 얼마나 관심이 많으면 저번에 국경방위군까지 찾아왔겠냐….
차마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한 내 얼굴이 어두워지자, 중대장 또한 저번에 고생한 일을 떠올린 듯 헛기침을 하고는 대화 주제를 바꿨다.
“뭐, 그래도 간식도 보내 주겠다니 우리 부대원들에게도 잘된 일이군.”
그렇게 말하며 중대장은 그다음 장을 넘겼다가.
“…어?”
“어?!”
중대장의 입에서 놀란 목소리가 나왔고, 나도 내 앞에 중대장이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얼빠진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아, 아니, 이건….”
종이에 적힌 내용에 경악한 중대장의 목소리는 덜덜 떨리고 있었고.
“에에~? 거짓말…!”
나는 마치 전생에 보았던 애니메이션 캐릭터 같은 말투를 사용하고 말았다.
중대장과 병사가 한마음이 되다니, 이게 말이 되냐?
하지만 정말로 이건….
“우, 우리가 왜….”
중대장이 들고 있는 종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황제가 즉위를 맞이하여 국가를 순방할 것이니, 황제가 지나는 길을 따라 병사들은 길을 정비해 놓고 길을 따라 경비할 것.
“이, 이런….”
‘XX, XX, XX, XX.’
중대장은 계속해서 현실을 부정했으며, 나는 마음속으로 욕 한 바가지를 쏟아내었다.
XX, 분명히 약 4년 전에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황태자, 아니, 이제 황제가 된 이 XX XX는 내 인생에 도움이 되는 날이 없지?
아니, 그보다도 원작 달린 이 XX는 왜 황제 때문에 본인들이 개고생을 한 건 서술하지 않고, 남주들과 로맨스를 한 것만 서술한 거야?
돌아가면 어떻게든 이 세계에 있는 달린에게라도 트집을 잡아야겠다.
* * *
그러나 아직 우리에게 희망은 남아 있었다.
물론 황제의 명을 따르는 건 아주 중요한 일이었지만, 국경을 지키는 것 또한 우리의 일이다. 우리가 모두 마을로 나간다면 그 잠깐 동안에도 마물로 인해 국경은 위험해질 수 있고, 그러므로 누군가는 남아서 이곳을 지켜야 했다.
“알파 소대, 베타 소대, 감마 소대 중 한 곳만이 이곳에 남는다.”
중대장의 그 말에 각 소대 사이에서는 불꽃이 튀었다.
어느 소대가 남을지는 각 소대의 지휘사관들이 가위바위보를 하는 것으로 결정하기로 했다.
그 말인즉슨, 우리 소대에서는 윈터가 나선다는 의미였다.
“윈터 님, 제발…!”
윈터를 둘러싼 상등병들이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한 눈으로 윈터를 쳐다봤다.
하, 윈터는 소설 남주고 무엇이든 잘한다는 설정이었으니까, 가위바위보도 이길 수 있겠지? 상등병들 사이에 끼어 있던 나 또한 애절한 눈으로 윈터를 올려다보았다.
윈터와 내 시선이 마주쳤다.
“혹시 가위바위보를 이길 비기라도 있으십니까…?”
나는 윈터의 능력에 대한 거대한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이 신뢰는 그가 나를 고스트그룸의 배 속에서 꺼내 준 뒤 더욱 강해졌지.
사람의 기척을 읽고 땅의 진동을 읽는데, 사람 마음 정도는 읽을 수 있지 않을까?
내 말에 윈터는 진지한 눈으로 가위바위보를 준비하고 있는 두 소대의 지휘사관들을 살폈다.
“먼저, 베타 소대의 잭은….”
와, 역시 윈터. 뭔가 계획이 있었구나.
“평소에 늘 ‘남자는 어떻게 해야 한다.’라는 식의 말을 달고 사는 점을 고려하면, 이번에도 주먹을 낼 확률이 높지. 단 한 번으로 승부가 결정 나는 시합이니, 이럴 때일수록 주먹을 내려고 할 거다. 그리고 감마 소대의 마리아 님은 특별한 규칙이 없으시지만, 이럴 때는 확률을 고려하여 내가 무엇을 내는 게 가장 유리할지 계산해 보면 된다.”
윈터의 말에, 평소에 윈터를 꺼리는 아퀼라마저도 그에게 무한한 신뢰의 눈빛을 보냈다.
“만약 마리아 님이 주먹을 내신다면 난 보자기를 내어 승부에서 이길 수 있다. 마리아 님이 가위를 내실 때 내가 주먹 혹은 보자기를 낸다면 승부를 다시 해야 하므로 한 번의 기회가 더 생기지. 마리아 님이 보자기를 내실 때 내가 가위 혹은 보자기를 낸다면 마찬가지로 기회가 더 생긴다. 그러므로 보자기를 내는 게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다.”
“역시 윈터 님…!”
다시 한번 ‘역시윈터’가 재현되는 광경에, 상등병들 모두가 진심으로 존경 어린 얼굴로 윈터를 보며 감탄했다.
“윈터 님! 꼭 이기고 오십시오!”
“윈터 님은 해내실 수 있을 겁니다!”
“윈터 님, 믿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윈터는 모두의 응원 속에 가위바위보를 시작했고.
“가위, 바위, 보!”
잭이 가위를 내는 바람에 윈터의 계산은 모두 틀렸고, 결국 잭은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잭은 주먹만 낸다면서, XX….’
윈터, 남주력 –1,000점….
* * *
결국 우리 소대는 황제를 맞이하기 위한 눈물 나는 준비를 시작했다.
우선 옷은 뻣뻣하게 다리고 칼각을 잡았고. 황제가 지나갈 때의 인사를 위해 밤을 새 연습했다.
오늘만큼은 나도 총 대신 허리춤에 검을 차고 있는 상태였다.
“오늘 실수하면 죽인다, XX들아.”
산 아래로 내려가며, 내가 으르렁거리듯이 말하자 후임들은 긴장한 기색이었다.
오늘은 정말 대대장도 예민하고, 중대장도 예민하고, 소대장도 예민하고, 모든 선임들이 예민한 날이었다.
“이제 여기를 정리하면 되는 겁니까?”
“그래.”
우리는 사람이 많은 큰길로 이동했고, 바닥에 있는 자갈을 전부 골라내기 시작했다.
“개미! 개미 한 마리도 기어가서는 안 돼!”
“장난해? 자갈은 전부 치우랬잖아! 네 눈엔 이게 자갈이 아니라 뭐로 보이는 거냐?”
그나마 나는 일을 하는 쪽에서 일을 시키는 쪽으로 변했다는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저 나무에서 자꾸 나뭇잎들이 길로 떨어지잖아!”
“그, 그럼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나무를 베면 보기 흉하고… 모든 나뭇잎들을 털어 버려도 보기 흉하기는 마찬가지겠지, 흠.”
“사루비아, 그렇다면 나무를 뽑는 게 어떨까?”
이시나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건넨 제안에, 내가 눈을 반짝이며 긍정했다.
“역시 이시나 님, 정말 좋은 생각이십니다! 얘들아, 와서 나무 좀 뽑고 흙 좀 다져 볼래?”
그 말에 후임들의 얼굴이 썩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