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달린은 이제 입대할 때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묘하게 자신감을 얻은 듯한 그녀의 얼굴이 그 증거였다.
“그래서 이제 군 생활은 좀 잘할 수 있겠냐?”
내가 그렇게 묻자, 달린이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
“예. 생각해 보니 군 생활은 별로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너 미쳤니?”
“밖에서야 할 수 있는 게 없었지만, 오히려 군대는 저한테 맞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계속 군인을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뭐, 뭐라고?! 말뚝 박겠다고?!”
“예, 일단 그것도 고려하는 중입니다!”
…내가 자신감을 너무 북돋워 줬나 보다….
‘아,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었지.’
갑자기 달린의 과거를 짐작하게 되고 달린이 나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감정을 알게 돼서 잠시 굳어 있었는데, 하마터면 중요한 일을 잊어버릴 뻔했다.
“달린… 생각보다 나를 싫어하지 않는구나….”
솔직히 지금까지 달린이 저지른 실수들은 자존감 문제가 아니라 그냥 원래 좀 개념이 없는 애인 것 같고….
앞으로도 여전히 개념 없는 실수를 할 거고, 다만 ‘자신감 있는 상태로’ 개념 없는 실수들을 하게 될 것 같긴 하지만….
“그래서 이 미친X이 검을 잃어버려?!”
달린이 나를 생각보다 좋아하고 있었든 말든 내 알 바냐?
이 자식이 쓸데없는 말로 내 정신을 현혹시켜? 내가 이러면 넘어갈 줄 알았냐?
내가 갑자기 “아, 사실은 이런 사연이 있었구나!” 하는 놈처럼 달린을 봐줄 리가 있겠냐고!
“일단 머리부터 박고 시작하자.”
“아, 아니… 저는 사루비아 님이 좋….”
“그러든 말든 알 바냐고, XX야!”
* * *
“야, 털리고 왔냐?”
너덜너덜해져서 걸어오는 달린을 보며, 제이슨이 물었다. 사루비아가 분노한 얼굴로 달린을 털러 달려가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에, 훈련병들은 이미 눈치껏 숨을 죽이고 있던 상태였다.
“예….”
달린이 억울한 얼굴로 눈을 축 늘어뜨렸다.
“그런데 전 진짜 사루비아 님이 좋은데, 왜 사루비아 님은 그걸 아시면서도 계속 저를 굴리시는 겁니까?”
그녀의 말에, 베니의 얼굴에는 어이없다는 기색이 떠올랐다.
“달린, 사루비아 님께서 그런 걸 신경 쓰실 것 같아?”
“예?”
“보통은 자기 좋다는 사람 앞에서는 마음이 약해지는 법이지만, 사루비아 님은 인성이 파탄 나셔서 그런 건 신경 쓰시지 않는다고….”
* * *
달린을 한바탕 굴리고 나서, 나는 다시 달렸다.
왜냐하면 달린의 과거에 대해 생각하고 나서 하게 된 이 결심을 얼른 누구에게라도 이야기해야 했으니까.
그리고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을 때, 내가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은 바로 이시나였다.
“이시나 님! 이시나 님! 이시나 님!”
“사루비아, 왜? 무슨 일이야?”
목덜미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어진 카키색 머리카락을 꽁지머리로 묶은 이시나가, 내 목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의 앞에 멈춰 서서 비장한 얼굴로 선언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저 결심했습니다.”
“뭐를?”
내가 지금까지 보고 들어왔던 아르콘의 삶들. 그리고 보호자 없는 예쁜 아르콘으로 살아왔을 달린의 삶.
마지막으로, 제대했을 때의 나를 기다리고 있을, 알 수 없는 이 세계.
“도저히 못 참겠습니다.”
나는 더 이상 이 세계를 참아 줄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그동안에야 “하하, 이 미쳐 버린 아포칼립스!” 하며 블랙 코미디로 넘기고는 했지만, 더 이상은 이 세계를 그대로 둘 수 없다.
“난 이 세계의 비밀을 밝혀낼 거야.”
에이프릴이 그랬었지.
아르콘과 국경방위군, 그 체계를 깨 버리겠다고.
“제대하고 나면 어떤 식으로든… 저는 이 체계를 바꾸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내 목적을 위해 나는 지옥으로 걸어 들어가야 할 수도 있겠다….
“저는 에, 에, 에이프릴 님이 계신 곳으로… 가서 힘을 합해야 할 것 같습니다.”
“흑마술 수색 특수군 말하는 거니? 에이프릴 님이 그곳으로 가실 거라고 네가 예전에 말했잖아.”
“물론 외부에서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어떤 식으로든 저는 에, 에, 에이프릴 님께 도움을….”
“사루비아… 아직 에이프릴 님 이름도 제대로 발음 못 하면서.”
“그거야 그분은 지옥 그 자체…. 어쨌든, 저는 그렇게 할 겁니다.”
나는 이시나의 암녹색 눈을 마주쳤다.
그의 앞에서 나는 마음이 편해지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털어놓게 되는 경향이 있었다. 내가 어떤 말을 하든 다정하게 들어주고 걱정해 주는 사람이니까.
이시나는 내 말을 경청한 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해.”
사실 이 이야기를 누구에게 털어놓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겠지만, 나는 그냥 내 결심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원래 말은 입 밖으로 나왔을 때 힘을 발휘하는 법이니까.
“대신 함께 가자, 사루비아.”
“예?”
나는 그의 말에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거야 나는 이런 대답을 기대한 게 아니었다. 기껏해야 응원을 좀 해 줄 줄 알았지.
도대체 누가 에이프릴 그 미친X이 있는 지옥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간단 말인가?
…XX, 그게 나군.
“저, 정말이십니까? 아니, 도대체 왜….”
“사루비아.”
갑자기 이시나가 아련한 얼굴을 했다.
“그거야 너를 혼자 뒀다가는… 네가 무슨 짓을 하고 다닐지 모르잖아.”
“예?”
“나는 네가 제대하고 나서 정말 바깥 세계로 방생되어도 되는 건지, 진심으로 걱정이야.”
“아니, 방생이라니 그게 무슨….”
“이 부대에서 나만큼 너를 걱정하는 인간은 없을 거니까, 그냥 받아들여.”
“예….”
“제발 아무도 믿지 마…. 네 동기한테도 너무 의존하지 말고.”
“아니, 근데 아퀼라는….”
“그냥 알았다고 해라.”
“예, 알겠습니다.”
도저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어서 어리둥절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나는 이 체계를 깨버리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번 다질 뿐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이 체계를 깰 수 있지? 역시 황제의 모가지를 따야 하나?
* * *
제대 D-1412일.
그때 나에게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한 이후로, 달린은 정말 뭔가 좀 달라진 것 같았다.
물론 그녀는 여전히 개념이라고는 밥 말아 먹은 실수투성이 고문관이었지만, 그래도 예전에 비해 용기라는 게 생긴 느낌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저는 못 합니다’와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
하, 후임의 내적 성장이라니, 정말 나처럼 완벽한 선임이 또 있을까? 정말 대단해.
“…달린, 내가 아까 내 자리 청소해 놓으라고 하지 않았냐?”
“앗, 잊었습니다!”
“머리 박아.”
달린은 내 말에 따라 충실하게 머리를 박은 뒤에도, 그 상태에서 낑낑대며 입을 열었다.
“앗, 사루비아 님! 그러고 보니 보통 몇 초에 한 번씩 화나십니까?”
“뭐라고?”
“자이든 님이 사루비아 님이 빡치시는 횟수가 많을지, 제가 실수하는 횟수가 더 많을지 궁금해 하셔서 알려 드리려고 말입니다!”
저 엉망진창인 압존법은 일단 넘어가도록 하고.
“왜? 자이든이 ‘에휴, 달린 네가 실수하는 게 많을지, 사루비아 그 미친X이 XX하는 횟수가 많을지 궁금하다, 어?’라고 말했냐?”
“앗, 네, 그랬습니다!”
“자이든, 이 XX…. 감히 내 얘기를 해? 뒤졌어! 넌 계속 머리 박고 있어! 일어나지 마!”
물론 은근슬쩍 자이든을 엿 먹이고자 하는 달린의 저 속마음이 눈에 훤히 들여다보였지만, 꽤 쓸 만하므로 나는 그냥 넘어가 주기로 했다.
* * *
“저 미친 인간들….”
제이슨이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달린 쟤… 패티와 매티 과인 줄 알았는데 그냥 미친X이었군….”
“응? 무슨 말이야?”
“우리가 왜?”
그는 자신의 양 옆에 있는 동기들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선임은 사루비아고, 동기는 패티와 매티고, 후임은 달린인 이 상황.
…역시 탈영할 수는 없는 거겠지?
그나마 그의 말을 유일하게 이해하는 선임 중 한 명인 밀피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보기에는 사루비아 님이 달린을 개조시킨 게 틀림없어. 원래 엄청 얼빵했는데 사루비아 님이 전담 마크한 이후로 갑자기 겁대가리가 없어졌잖아.”
“와, 역시 무서운 인간. 자신을 위한 맞춤형 후임을 탄생시키다니.”
“조심해. 또 이런 얘기를 하다가는 언제 달린이 이를지 몰라. 난 이제 그 ‘엥?’ 소리만 들어도 온몸에 소름이….”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양 팔을 쓸어내리던 밀피가, 자신의 머리 위로 지는 그림자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엥? 무슨 얘기 하고 계셨습니까?”
“다, 달린! 여기는 무슨 일로?”
“헉. 혹시 여기는 제가 오면 안 되는 곳이었습니까? 시정하겠습니다.”
“하하, 당연히 그런 건 아니지….”
“그런데 미친? 인간? 무서운? 인간? 그런 얘기 하셨던 것 같은데 그게 누굽니까?”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밀피가 쩔쩔매는 모습을 보며 제이슨은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어? 제이슨 왜 눈 감아?”
“어? 제이슨 무슨 일이야?”
…양쪽에서 동기들이 호들갑을 떨었지만, 그는 이 순간 진심으로 기도했다.
‘사루비아 저 미친X이 완벽한 심복을 심어 놨구나.’
그리하여 그는 당사자인 사루비아보다도, 사루비아의 제대를 간절히 기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