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의 집착보다 내 탈영이 빠르겠다 91화 (109/233)

* * *

부대로 돌아온 뒤, 우리는 블레어와 토피오에게 탈탈 털렸다, 호호.

오랜만에 에이프릴이 실세이던 그 시절을 떠올릴 정도로 XX 탈탈 털리며 우리는 다시 훈련병으로 돌아간 기분을 느꼈다.

“달린은 내가 죽인다. 그 누구도 날 막을 수 없어.”

물론 그 누구도 나를 말리지 않았지만, 나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달린이 있을 곳을 향해 걸어갔다.

“달린!”

내가 미리 지시해놓은 대로 연병장에 서 있던 그녀가 나를 돌아봤다.

“사루비아 님…!”

“아악! 제발 좀!”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혈압이 치솟는 기분에 일단 소리를 질렀다가, 나는 일단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검을 잃어버린 건지에 대해 추궁을 시작했다.

그녀의 답변은, 정신을 차려 보니 검이 절벽 아래로 떨어져 있었다는 것이었다.

정말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래…. 털릴 준비는 됐겠지?”

화를 억누르기 위해, 내가 상냥하게 웃어 보였다. 아, 역시 이게 바로 에이프릴의 마음?

“너 나 XX 싫지, 어?”

아마도 달린은 내가 싫을 것이다. 그녀가 입대한 이후로 지금까지 그녀를 전담 마크하며 탈탈 털어 댄 게 나니까.

비꼬는 듯한 말투로 그렇게 물었는데, 달린은 내가 생각하지도 못한 답을 내놓았다.

“네? 저는 좋습니다.”

“…뭐?”

“저는 사루비아 님 좋습니다!”

“뭐?!”

믿기지 않지만, 그렇게 말하는 달린의 눈에는 진심이 깃들어 있었다.

도대체 왜지? 대체 어떤 포인트에서? 뭐지?

‘사실 특이한 취향을 가지고 있는 건가? 털리는 걸 좋아하나?’

아니, 하지만 원작을 떠올려 볼 때 그럴 리는 없었다. 내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달린을 쳐다보니,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한 말투로 외쳤다.

“저는 당연히 사루비아 님 좋아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대체 왜?”

도무지 예상하지 못한 상대가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을 때는, 일단 공포심부터 드는구나….

“저한테 계속 할 수 있다고 말해주신 건 사루비아 님 아니십니까?”

“…뭐?”

달린의 그 말에, 나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문득 그동안 내가 달린에게 했던 언행들이 떠올랐다.

“할 수 있어, 할 수 있다고!”

“너는 속성 오러도 쓸 수 있다고!”

“할 수 있다고! 너는! 그 힘을 쓸 수 있잖아!”

“봐 봐, XX야. 내가 할 수 있다고 했지?”

나야 소설 내용을 알고 있으니, 달린이 아르콘의 피가 짙게 흐르고 그만큼 재능 있으리라는 사실을 알아서 한 말이었지만.

달린 입장에서는… ‘격려해 주고 자신감을 북돋워 주는 선임’의 표본이었겠군.

그래, 윈터가 그랬었지. 실수가 잦은 후임은 자신감을 가지도록 해 주는 게 중요하다고.

‘XX, 그런 의도는 아니었지만….’

의도치 않게 달린이 자신감을 얻도록 한 것 같다….

생각을 마치고 나서 달린의 얼굴을 보니, 그녀의 초롱초롱한 노란 눈이 보였다.

확실히 입대할 때에 비해, 달린은 상당히 자신감을 얻은 것 같기는 했다. 입대 초기의 달린은 모든 것을 두려워하고 쉽게 포기하려고 했으니까.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나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달린, 너….”

“예?”

“언제부터 자신감을 얻은 건데?”

“어…. 정확한 시기는 모르겠지만, 그냥 계속 할 수 있다고 저한테 그러셔서 점점 힘이 생긴 것 같습니다. 특히 속성 오러를 처음 썼을 때나, 드래곤을 공격하는 데 성공했을 때 정말 기뻤습니다.”

“입대 전에는 자신감이 없었고?”

“그전에는 그런 게 확실히 없었습니다!”

상황에 맞지 않게 방긋방긋 웃는 얼굴로 달린이 답했다.

…입대 초기에 달린을 보며 어렴풋이 느끼고는 했지만, 그때의 그녀는 자존감이 정말로 낮아 보였다.

그때 달린은 매사에 너무 자신이 없었다. 물론 대부분의 고문관들은 반복되는 실수로 자신감을 잃는 악순환을 겪긴 하는데, 그런데….

달린의 문제는 그보다 더 근본적이었다. 입대 초기의 그녀는 아주 예전부터 자존감이 바닥이었던 사람 같았다. 좀 이상할 정도였다.

‘원작에서도 그랬나? 원작에서는 어떤 순간을 기점으로 자존감이 키워진 거지?’

원작에서 달린은 자신에게 집착하는 남주들에게 아주 수동적으로 행동했고, 그 갈팡질팡하는 모습에 답답해하는 독자들도 존재하기는 했다. 하지만 달린이 자존감이 낮다는 게 특별히 조명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달린이 여기 오기 전에는 어떻게 지냈더라?

원작에 따르면 달린은 입대하기 전 하녀 일을 하며 살아왔다고 했다.

“…아.”

로판 세계의 하녀. 그것도 이종족을 배척하는 로판 세계의 하녀.

나는 로판 세계의 하녀들이 주로 어떤 취급을 받는지 안다. ‘감히’ 어떻게 행동하면 안 되는지 정해져 있고, ‘제 주제’를 잘 알아야 하는 위치.

빙의한 후 곧장 오게 된 곳이 국경방위군이었기 때문에, 나는 이 세계의 신분제를 깊이 체감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달린은 포기하고 순응하는 삶에 익숙해져 있었을 것이다.

하녀 중에서도 ‘국경방위군에 다녀오지 않은 아르콘 출신 하녀’는 가장 낮은 위치였겠지.

지금에서야 달린은 군대에서 스스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되고, 빛 속성 오러까지 발현하면서 자존감을 키워 나갔지만.

“이제 알겠네….”

저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원작에서의 달린이 왜 남주들에게 의존적이었는지 이제 이해가 됐다.

외부 근무를 나갔을 때 ‘이종족’이라고 수군거리던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 눈앞에 있는, 완전히 자존감이 박살 난 적 있을 아르콘 여자애의 모습이 다시 보였다.

그리하여 나는 국경방위군 밖의 세계가 더욱 싫어졌다.

#외전 1. 『네 명의 남주들이 나한테 집착한다』 원작의 비밀

사루비아를 불러오기 위한 마지막 열쇠, 달린.

고아원에서 성인이 된 후, 달린은 근처에 있던 공작 가문의 성에 들어가 하녀 일을 시작했다.

필요로 하는 인력이 많은 공작성은 아무런 능력이 없는 달린도 받아 줬고 숙식도 제공했기 때문에, 달린에게는 그게 최선의 일이었다.

달린은 부모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자신이 이종족이라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연주황색의 머리카락, 노란빛이 섞인 갈색 눈, 아름다운 얼굴. 어딜 보아도 화려한 이 외양은 이종족의 것이었다.

그러므로 언젠가 계약 마법이 발현하고 자신도 국경방위군에 입대해야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고, 성인이 된 지금 하녀 일을 하기보다는 국경방위군에 가는 게 합리적이라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지만….

‘군대 가기 싫어.’

제 발로 국경방위군에 입대하려는 미친X은 원래 거의 없는 법이다.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루는 편이 좋다.

그리하여 달린은 하녀로서의 일을 시작했고.

“아하, 이번 신입은 이종족이구나.”

이 세계에서 이종족이 어떤 존재인지, 좁은 고아원 밖으로 나온 뒤에야 더욱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누군가가 달린에게 그 아름다운 외모를 이용해서 차라리 높은 분의 첩이라도 되는 게 어떻겠냐고 하면, 또 누군가는 다른 식으로 말했다.

“얘, 주제를 알아야지. 하녀 주제에 무슨.”

그래서 달린은 주제 파악을 아주 잘하게 되었다. 음, 내 주제에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구나.

“얘! 조심해! 그건 네가 백날 일해도 입어 보지도 못할 드레스라고!”

그래서 달린은 자신의 운명을 빠르게 수긍했다. 음, 높으신 분들한테는 그냥 굽신거려야 하는 거구나.

“널 위해 조언 하나 해 주는 건데, 너는 그 얼굴이라도 써먹어야 잘 살 수 있어.”

그래서 달린은 자신이 살아가야 할 방식을 깨달았다. 음, 평생 누군가에게 빌붙어 살아야 하는 거구나.

“뭐야, 내가 너 같은 하녀 따위의 이름도 기억해야 돼?!”

마침내 달린은 이해했다.

자신은 이 세계에서 아무런 존재도 아니구나.

그렇게 생각해 보니 삶을 살아가는 일은 별로 즐겁지 않은 것 같았다.

뭐, 자신은 아무런 능력도 없고 스스로는 그 무엇도 성취해 낼 수 없는 보잘것없는 존재니까,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자.

달린은 그렇게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 계약 마법이 발현한 달린은 드디어 국경방위군에 입대했다.

국경방위군에 입대한 뒤에는, 정말로 공작성의 사람들이 말한 뒤로 달린에게 사랑에 빠져 접근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너는… 오래전 죽은 그 애와 닮았군.”

시작은 예전에 이 부대에 있었다던 ‘사루비아’라는 사람과 닮았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사루비아를 떠올리며 접근한 사람들은 달린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고, 뭐, 사실 어떻게 되든 달린은 별생각 없었다.

다만 그들의 이야기 속 사루비아는 그들에게 아주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 같았고.

“에휴, 야, 토피오, 사루비아가 있었으면 부대가 이 꼴이 나지는 않았을 텐데, XX.”

“맞아, XX, 기강을 제대로 잡아 놨을 거다, 아마.”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루비아는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할 수 있던 사람 같았어서.

달린은 사루비아가 아주 조금 부러웠다.

* * *

“…저를 사랑하시는 게 아니었군요.”

아퀼라가 제대하기 전, 달린은 아퀼라가 자신에게 우호적이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을 왜 그렇게 대했는지 모르겠지만, 뭐.

“…그래. 나는 네가 필요해.”

“정확히는 육체가 필요하신 거 아니겠어요.”

달린이 군대의 법칙 같은 건 모두 어겨 가며 말하고 있는데도, 아퀼라는 개의치 않았다.

그의 시선을 받으며 달린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아무래도 죽는 건 좀 그래요.”

그리고 그렇게 말하다가, 달린은 문득 무언가를 깨달았다.

…정말 자신은 죽는 게 두려운가?

그녀는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해 위험을 회피해 왔고, 죽음을 회피해 왔지만.

그게 정말 ‘죽음’을 회피하기 위한 거였을까?

달린에게는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었다.

하녀로 살아가며 가지게 된 욕망, 그러나 평생 이루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어 아주 깊은 곳에 묻어 놓은 욕망.

그렇지만 사루비아라면….

“사루비아 님은 아주 강한 분이라고 하셨죠?”

달린의 심장이 두근거리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어떨 때는 강하지만, 또 어떨 때는 약한 애였지.”

“다른 선임 분들은 다 사루비아라는 분이 굉장히 강하다고 하셨어요. 겁도 없고, 성격도 강하고….”

“…성격. 성격이야, 조금… 강한 편이지.”

달린은 애써 사루비아의 성격을 포장해 보려는 아퀼라의 모습을 보며, 자신의 유일한 욕망을 실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목숨? 음, 살아 봤자 별로 재미있는 일들은 없지만.

그녀에게도 욕망이 존재했고!

사루비아는 그것을 이뤄 줄지도 모른다!

“좋아요. 제 몸 안에 사루비아 님의 영혼을 불러오세요.”

“…뭐?”

너무나도 쉽게 나온 대답에 아퀼라는 당황한 듯했지만, 달린은 여전히 몽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이건 나중에 사루비아 님이 들어주셔야 하는 조건이에요.”

달린은 그래서 편지를 썼다.

사루비아가 달린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에 대한 것이었다.

편지를 쓰면 쓸수록 감정이 격앙되어 말이 이상해졌지만, 사루비아가 그녀를 이해해 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어쨌든 사루비아는 앞으로 달린의 몸으로 살게 될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사루비아를 보고 달린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사루비아가 그녀를 위해 해 줘야 할 일은….

『제 이름으로 살아 주세요.

예전에 일하던 공작 성의 주인인 공작이랑, 딸이랑, 집사랑, 유모랑, 그녀의 오빠들 두 명이 아주 재수 없었는데요.

당신은 아주 강하다고 들었는데, 그 사람들 정도는 혼내 주실 수 없나요?

그리고 제 이름으로 살아 주세요.

제 이름을 세상에 남겨 주세요.

내 능력으로는 할 수 없는 일 같아서.

어떤 식으로든 나는 내 이름을 남기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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