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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집착보다 내 탈영이 빠르겠다 89화 (107/233)

* * *

우여곡절 끝에 달린의 모든 신병 훈련이 끝났다. 이제 그녀도 자연스럽게 소대에 녹아들 때가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잡일부터 시작해야겠지. 그녀는 이제 훈련병이니까.

“카론!”

“예?”

카론의 이름을 부르자마자, 어딘가에서 카론이 불쑥 튀어나왔다. 뭐지? 어떻게 저렇게 반응이 빠르지?

“달린 얘 맞선임들한테 데리고 가서 빨래하는 법이나 잘 알려 주라고 해.”

“넷슴다!”

요즘 이시나의 다크서클이 나날이 진해지고 있었다. 그래서 내 최우선 과제는 미친 듯이 바쁜 이시나의 일을 돕는 것이 되었으므로 달린에게 더 이상 신경 쓸 시간은 없었다.

뭐, 소대 내 잡일을 가르치는 것 정도야 앞으로 카론에게 맡겨 두면 되겠지.

나는 카론에게 달린의 소대 생활을 돕도록 일을 지시해 두었고, 그 이후로 그는 달린을 잘 신경 써 주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둘이 동갑이었지?’

달린은 꽤 늦게 입대한 편이었고, 카론은 아주 조금 일찍 입대한 편이었다. 그리고 동갑이면 그만큼 유대감을 쌓기도 쉽겠지.

슬쩍 카론의 속마음을 떠보기 위해 그를 툭툭 치며 내가 말했다.

“야, 카론, 요즘 달린 잘 챙겨 주고 있는 것 같더라.”

“저한테 그렇게 지시하셨으니까, 당연히 신경 쓰고 있습니다!”

카론이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시킨 일이니까 당연히 신경 쓴다는 태도였다.

그러니까, 달린 그 자체에 관심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는 말이었다.

‘역시 이쪽도 그렇게 됐군.’

그러고 보니 저번에는 그런 일도 있었다.

“이번 신병 뭔가… 사루비아 님과 좀 닮은 것 같지 않아?”

“아, 외모 말이야?”

달린의 맞선임들은 달린과 나를 닮았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원작에서 남주들이 달린을 보고 사루비아를 연상했듯이, 뒷모습만 봤을 때 달린과 나는 꽤 닮아 있었다. 머리 색이나 눈 색도 꽤 비슷했고, 전체적인 체구도 비슷했다.

그렇지만 저놈들이 내 얘기를 하다 걸린 건 변하지 않으므로 내가 그 XX들을 탈탈 털려고 할 때.

“닮았다고 말하기에는 오류가 많지.”

늘 그렇듯 기척을 숨기고 있다가 나타난 윈터가 입을 열었다.

“사루비아의 머리 색은 주황색과 분홍색을 동시에 담고 있다는 게 특징인데, 신병의 경우는 분홍색이 보이지 않고 연한 주황색이지. 오히려 금빛에 더 가까울 정도로. 신병은 머리카락도 사루비아에 비해 더 일자의 생머리이고, 사루비아는 조금 더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지. 또한 사루비아의 눈은 꽃의 꿀을 그대로 담아낸 것 같은 금색과 갈색이 오묘히 섞여 있는 깊고 진한 색인데, 신병의 눈은 훨씬 밝은 노란색이야. 단지 그 색깔들만으로 닮았다고 하기에는 다른 점이 너무도 많아.”

“예, 예…. 죄송합니다….”

오류가 있는 말을 들으면 지적을 참지 못하는 윈터가 끼어들었던 것이다.

지난 몇 주 동안의 일로부터 알 수 있듯이, 남주들은 달린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달린도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 대상에게는 마찬가지로 관심이 없는 듯, 남주들에게 아무런 눈길도 주지 않았고.

그것보다는 오히려 자주 본인을 갈구던 나를 경계하기에 더 바빴다.

뭐, 결국 아무도 영창에 갈 일이 없으니 모두에게 좋은 쪽으로 바뀌었…. 아니, 잠깐만.

내가 지금까지 달린을 갈군 건 ‘에휴, 이 노답 고문관 달린. 내가 정신 차리게 해 줘야겠다.’ 정도의 가벼운 마인드였는데.

생각해 보니, 이건 심각한 문제일지도 모른다.

‘원작이 바뀌었으니까….’

원작 남주들이 원작과 달리 달린에게 큰 관심을 갖지 않고. 달린이 무얼 하든 그냥 내버려 둔다면?

그럼 달린은 틀림없이 죽을 것이다.

물론 내가 달린이 0.5인분은 하도록 만들었지만, 당연히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건 안 돼.’

이미 많은 후임들의 죽음을 봐 왔고 그때마다 나는 멘탈에 큰 충격을 받지 않도록 애쓰며 잘 넘겨 왔다지만, 달린은 좀 다른 문제이다.

아무리 답답한 고문관이라도 나는 달린을 주인공으로 하는 ‘달린의 이야기’를 100화가 넘도록 읽어 왔다.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주인공이 죽는다면, 그건 좀 충격적인 일이 될 것이다. 역시 그녀가 죽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리고 달린이 살아남기 위한 방법은 단 하나, 달린이 강해지는 것뿐이었다.

“후후후….”

역시 0.5인분은 모자라다. 1인분도 모자라다.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혼자 2인분 정도는 거뜬히 해내야 하지.

‘신병 훈련은 끝났지만, 내 집중 관리는 끝나지 않았다, 달린….’

나는 앞으로 달린을 하나하나 신경 써 주겠다며 즐거운 얼굴로 미소 지었다가.

‘아니, 잠깐만.’

난 또다시 무언가를 떠올리고야 말았다.

원작 남주들이 달린에게 관심 가지지 않게 되었으니까, 음….

‘자이든 그 XX!’

원작 악역이었던 자이든이 자신보다 까마득한 후임인 달린에게 어떤 개짓거리를 할지 모른다.

혹시나 내 눈에 개수작이 걸리기라도 하면 곧장 자이든을 XX해서 XX해 버리겠다는 마음으로, 나는 내 눈앞에 없는 달린을 찾아 달려갔다.

* * *

“야, 넌 아직까지 그것도 제대로 못 하냐? 휴, 봐. 내가….”

“꺼져, 자이든!”

달린을 찾아 나섰다가 자이든이 그녀와 붙어 있는 모습을 목격한 내가 눈을 부릅떴다.

자이든은 달린에게 무어라 말을 걸고 있는 듯했는데, 내가 호통을 치자 얼른 꼬리를 말고 자리를 물러났다.

“저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아오, 이 미친 XX야, 이번에야말로 진짜 네 취향이라 그렇지?”

자이든은 내 얼굴에 순종적인 성격을 좋아한다는 것 정도야 지난 경험으로 알고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딱 달린이었다.

내가 자이든이 귀를 붙잡아 당기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자, 자이든은 고통을 호소하며 물러날 것을 약속했다.

“아, 시, 시정하겠습니다! 정말! 정말 시정하겠습니다!”

“제발 허튼짓 좀 하지 마라, 응?”

빨래를 하고 있었던 달린은 움찔하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래, 앞으로 나랑 볼 일이 적을 거라고 생각했을 텐데 내가 자꾸 이런 식으로 어딘가에서 나타나니 두려울 만도 하지.

“야, 이 자식이 개수작 안 부렸냐?”

여전히 자이든의 한쪽 귀를 잡고 있는 채로 내가 묻자, 달린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네?”

“이 XX가 혹시라도 개수작 부리면 바로 말해라. 죽여 버릴 거야.”

“아, 아닙니다! 자이든 님은 저랑 오래 볼 분이어서 저에게 잘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아하, 오래 볼 사람….”

그녀의 말에서 무언가 감을 잡은 나는 예쁘게 웃어 보였고, 자이든은 더욱 다급해졌다.

“다, 달린! 그게 무슨 소리야, 하하!”

“어? 아까 사루비아 님보다 자이든 님이랑 더 오래 볼 사이니까 자신한테 잘해야 한다고, 자이든 님이 그러시지 않았습니까?”

자이든이 했던 말을 천진난만한 얼굴로 미주알고주알 늘어놓는 모습에, 나는 웃는 얼굴로 자이든을 돌아보았다.

“그래… 너랑 더 오래 지낼 거니까 너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아주 그냥 제 선임이 되시지 그러십니까, 어?”

“아니, 사루비아 님, 저 그게….”

“에휴, XX. 야, 아퀼라한테도 가서 앞으로 네가 선임이라고 그대로 전달하고 오십쇼.”

“그, 그건….”

“왜 그러십니까, 자이든 님? 말 그대로 전달했는지 내가 반드시 확인할 테니까 아퀼라한테 가서 그렇게 말하고 오시지 말입니다?”

내가 직접 털기는 귀찮으니 아퀼라가 대신 털어 주도록 만들려는 의도였다.

나는 으르렁거리며 자이든을 빨래장 밖으로 쫓아낸 후, 자신의 빨래를 하고 있었던 달린을 다시 보았다.

원작만 읽었을 때는 몰랐지만, 이제는 알겠다. 아마도 달린은….

‘눈치 없는 게 아니라 그냥 눈치 없는 척하는 것 같은데.’

자이든이 한 말을 저렇게 은근슬쩍 전할 정도면, 그냥 일부러 이럴 가능성이 더 커 보였다.

그래, 그래도 지금 잘못한 건 자이든…

…달린의 빨래를 내려다본 내 입에서 절로 실소가 나왔다.

“하.”

“사, 사루비아 님?”

“피 묻은 빨래는 찬물로 세탁해야 한다고, XX! 그리고 그 빨랫비누 쥐뿔도 도움 안 되니까 그냥 치약 쓰라고! 했을 거 아니야! 안 배웠냐?!”

“그, 그런데 치약을 쓰면 왠지 눈이 매워서 눈물이 좀 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럼 눈물이 안 흐르게 머리 박아!”

“예, 예?!”

“안 들리니?!”

그녀를 탈탈 털고 난 뒤,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음엔 제발… 부디… 멀쩡한 신병을 보내 주세요….

* * *

달린이 제대로 빨래를 하도록 그녀의 맞선임들 틈에 던져 놓고, 나는 숙소로 돌아와 흐물거리며 누웠다.

“…베니. 내가 아까 달린한테 내 자리 이불 깔아 놓으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 그러셨습니까? 제가 지금 깔겠습니다….”

“달린 그 XX, 돌아오면 뒤졌어.”

달린을 떠올리자니 다시 마음이 심란해졌다.

달린이 눈치 없이 주변인들을 엿 먹이고 꼽주는 건 독자 입장에서는 참 재미있었는데.

내가 달린의 선임 입장이 되자니 정말 매일매일 고구마를 열 개씩 처먹는 기분이었다. 달린은 내 입에 고구마를 무한으로 공급해 주었다. 아돌브 제국의 식량난을 해결할 수 있는 뛰어난 인재였다….

“베니.”

“예?”

참 똘망똘망해 보이는 베니의 얼굴을 빤히 보던 난 기운 없는 목소리를 냈다.

“제발 달린 좀 챙겨 봐. 물론 나도 달린을 챙기고 있고 카론도 달린을 챙기고 있고 걔 맞선임들도 챙기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모자라….”

“예, 예… 알겠습니다….”

“너도 좀 적극적으로 챙겨 봐….”

“예….”

나는 문득 베니의 태도가 상당히 소극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원작에서 베니는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먼저 나서서 달린을 하나하나 챙겨 주던 존재였다. 그녀의 충성심은 정말 황녀 혹은 귀족 영애를 모시는 유일한 시녀에 버금갈 정도였는데.

그런데 지금의 베니는 정말 달린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래, 꼭 처음의 나를 대하던 유리처럼….

“베니.”

“예?”

“너 왜 달린 안 챙기냐? 네 성격이라면 곧장 붙어 다닐 줄 알았는데.”

그 말에 베니는 나를 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그녀의 긴 속눈썹이 우아하게 팔랑거렸다.

“사루비아 님이 독해질 각오도 필요하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아.”

“물론 필요한 상황이라면 저는 달린을 돕겠지만, 지금은 사루비아 님이 관리하고 계시니 도움은 필요 없지 않을까 싶어 가만히 있었습니다만. 도우라고 하시니 돕겠습니다.”

베니가 말한 건 얼마 전 에인젤이 죽은 일과 관련되어 있었다.

자신이 챙겨 주던 첫 여자 후임 에인젤의 죽음으로 베니는 충격을 받았었다. 꼭 예전에 레이나가 죽었을 때 나도 그랬듯이.

그때의 나는 베니에게 너무 마음이 물렁해졌다가는 너도 죽을 수 있다고 말했었고, 베니가 그 충고를 별로 귀담아듣지 않은 줄 알았건만.

지금 달린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 조언을 받아들였던 모양이다.

…그 결과 원작과 달리 베니는 달린의 ‘충성스러운 동료’ 역할을 하지 않게 된 거고.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많은 게 원작과는 달라진 것 같아서, 나는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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