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갑자기 말을 하는 바람에 물이 흘렀지만, 지금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아니, 달린이 먼저 빡치게 했다니까?
“제발 진정 좀 하라니까, 사루비아….”
기운이 쫙 빠진 얼굴을 한 이시나가 내 입가에 흥건한 물을 옷소매로 슥슥 닦아 주며 말했다.
“네가 요즘 후임 교육에 열과 성을 다하는 건 좋지만 어쨌든 제발 고혈압 오지 않게 신경 좀 써.”
“예….”
그러다 나는 문득 원작에서는 이시나가 달린에게 관심을 보였다는 점을 기억해 냈다.
물론 이곳은 원작의 인간관계 따위 왕창 비틀어진 세계지만, 그래도 원작 남주들은 정말 달린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는 걸까?
“앞으로도 사루비아 네가 신병 관리 잘 해 주길 바라.”
“예…. 그런데 혹시 이시나 님은 신병에게 관심 없으십니까?”
“…뭘? 설마 나한테 신병 관리까지 하라고?”
언제나 그렇듯 터지는 일복으로 인해 다크서클이 퀭한 이시나가 나를 바라보았다.
“아, 아닙니다. 수고하십시오….”
달린에게 관심을 가지기에 이시나는 너무 피곤해 보였다….
…일이 너무 많아서 불쌍하니까 남주력 +30 해 준다….
* * *
드디어 달린의 첫 검술 훈련 시간이 되었다.
신병치고는 참 사건사고가 많은 달린이었기에 몇몇 후임들이 벌써부터 달린의 악명을 들은 듯 그녀를 흘끗댔지만, 내가 눈을 부라리니 곧장 시선을 회피했다.
주로 검술 훈련을 담당하는 건 아퀼라였기 때문에, 다른 부대원들이 자율 훈련을 시작했을 때 나는 아퀼라를 불렀다.
“아퀼라, 네가 얘 좀 가르쳐 줘.”
나는 검으로 싸우지 않은 지 한참 되었으니, 달린을 가르친다면 아퀼라가 가르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곧 아퀼라는 달린에게 검을 쥐는 방법과 오러를 싣는 법을 얘기하기 시작했고,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둘의 사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음, 둘은 정말로….
‘서로 쥐뿔도 관심 없어 보인다.’
아퀼라의 반응이야 예상했지만, 달린은 아퀼라를 보는 것보다도 등 뒤의 나를 흘끗대는 횟수가 더 많은 것 같았다.
“…집중 안 하냐?”
“예, 예!”
휴, 과연 쟤는 언제 좀 쓸 만해질까.
…아, 이걸 깜빡할 뻔했네.
“달린, 검으로 옆 사람 찌르지 않게 조심해라.”
“예? 예!”
검을 쥘 때 가장 명심해야 하는 사항을 하마터면 빠뜨릴 뻔했다.
어쨌든 달린은 아퀼라의 지도에 따라 집중하여 검에 오러를 불어넣으려고 시도해 봤지만….
“저… 그런데 안 되는 것 같습니다….”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검은 아무런 기운의 발산도 없이 고요했다.
하긴, 내가 훈련병일 때도 폭력과 공포가 나를 구원했었지….
“괜찮아, 달린. 할 수 있어.”
나는 아퀼라에게 비켜 보라고 손짓한 후 달린의 어깨 위에 팔을 둘렀다.
“집중하면 할 수 있을 거야. 왜냐하면 내가….”
“할 수 있게 만드시겠다는 건 이미 압니다….”
“응, 잘 아네. 그럼 이제 할 수 있지 않을까?”
“저, 저는 역시 재능이 없는 것 같은데! 이종족의 피가 너무 옅게 흐르는… 그, 그런 것 같은데….”
“아, 할 수 있다고!”
오늘은 좀 친절해져 보려고 했는데 또 사람 빡치게 하는군.
“할 수 있다고! XX, 할 수 있다고!”
“그래도 안 되는….”
“앞으로 안 자만 꺼내도 뒤질 줄 알아! 좀, 할 수 있다고!”
내가 윽박을 지르는 가운데, 검을 쥔 달린의 두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런데 할 수 있다는 보장은….”
“이거 XX 나를 고혈압으로 죽게 하려고 어디서 보낸 암살자 아니냐?! 야, 내가 보기에 너는 할 수 있다고! 심지어 속성 오러도 쓸 수 있을 거라고!”
“속성 오러를 제가 어떻게 씁니까…?”
“쓸 수 있다니까? 재능이 있다니까?”
원작을 아는 나로서는 답답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좀 써! 제발 써! 아니, XX! 좀 해내라니까!”
“못 하는데 어떻게 해내는….”
“아니, 넌 정말로 할 수 있다고!”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달린이 검과 씨름하고, 내가 달린과 씨름하던 그때.
팟-!
“어, 어?!”
달린이 제 검을 내려다보며 놀란 눈을 했다.
“오, 오러가….”
“봐 봐! 할 수 있다니까?!”
우리의 목소리가 커졌기 때문에, 옆에서 훈련을 하던 윈터가 이쪽을 돌아보았다가 달린의 오러를 발견하고는 성큼성큼 걸어왔다.
“빛 속성 오러군.”
“비… 빛 속성 오러요?!”
“요?! 요?! 개념을 어디로 처박았냐고!”
“아, 아니….”
달린이 당황하여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 윈터는 그녀의 오러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빛 속성 오러라면 꽤 희귀한 속성인데, 다양한 곳에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다.”
달린의 검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빛은 눈부신 흰색을 띠고 있었다.
어두운 밤에도 주변을 환하게 밝힐 만한 밝은 빛이었기에, 윈터의 말대로 상당히 쓸모가 있어 보였다.
“그리고 마물들은 악한 것, 어둠을 근원으로 하는 짐승들이기 때문에, 빛과는 완전히 상성이 안 맞지. 그러므로 네 오러를 사용하면 남들보다 힘을 덜 들이고도 마물의 단단한 가죽을 베어 낼 수 있을 거다.”
“아….”
달린은 입을 벌리고 멍한 얼굴로 자신의 검을 내려다봤다.
이곳에 들어온 뒤로는 늘 멍청한 모습만 봐 왔는데,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는 달린은 처음으로 차분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속성 오러를 발현한 일로부터 그녀도 감동을 받기는 한 모양이다.
“봐 봐, 내가 할 수 있댔지? 어휴, 그것 때문에 뭔 고생을….”
“그러게 말입니다….”
달린은 여전히 자신이 사용한 힘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봐 봐, 어? 너는 속성 오러를 사용할 것 같고 재능이 있을 것 같았다니까?”
“어떻게 아신 겁니까…?”
“…내가 그럴 것 같았다면 그런 거야, 이 XX야.”
그때, 뒤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와, 무서운 인간….”
“진짜 속마음까지 읽는 거 아닙니까…? 아니면 미래를 보나…?”
“몰라, 어떤 방향으로든 정말 초인적으로 무서운 인간이야….”
“…밀피, 그냥 제이슨, 머리 박는다, 실시.”
저놈들이 요즘 겁대가리를 상실했나.
어쨌든 달린이 환한 빛의 오러를 내뿜는 것에 나는 좀 뿌듯해졌….
“…눈부시잖아, 이 미친 XX야! 눈 공격 하지 말고 제발 꺼!”
“어, 어떻게 해제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이 미친 X이 진짜!”
결국 나는 다시 한번 달린과 씨름하고 나서야 그녀가 오러를 자유자재로 다루도록 만들 수 있었다.
“에휴, 그래도 속성 오러를 쓰다니…. 역시 재능이 있다고….”
그러자 달린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재능이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사실 속성 오러가 별거 아니었던 거 아닙니까?”
“뭐, 이게 배부른 소리를 하네.”
내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달린을 노려보았다.
“야, 그게 얼마나 재능 있고 대단한 건데! 얼마나 다양하게 쓸 수 있고, 쓸 곳도 많고, 멋진데, 어?”
“그런 겁니까…?”
달린은 정말로 ‘여주처럼’ 수줍은 미소를 지었고. 그 뒤에 서 있던 아퀼라도 입꼬리를 올렸다.
“…너는 왜 웃어?”
“글쎄.”
“쟤가 칭찬받았는데 왜 네가 웃어?”
왠지 갑자기 기분이 나빴다. 물론 내가 이 X같은 곳에서 기분이 나쁜 건 하루 이틀이 아니므로 ‘갑자기’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겠지만, 어쨌든 지금 나는 기분이 나빴다.
“뭔데? 왜 네가 웃는데?”
내가 눈을 날카롭게 뜨고 아퀼라를 몰아붙이고 있으니, 아까부터 이쪽을 흘끔대던 베니가 와서 속삭였다.
“저, 사루비아 님….”
“뭐.”
“그건 사루비아 님이 속성 오러가 멋지다고 하셔서….”
“…아?”
나는 내가 조금 전에 한 말을 머릿속에 다시 떠올려봤다.
“아…. 너도 속성 오러를 쓰니까 칭찬받는 기분이었냐…?”
아퀼라도 그냥 본인이 칭찬받은 게 기분 좋았다는 것을 깨닫고 순순히 물러났다.
내가 로판에 빙의한 다른 여주인공들처럼 ‘당연히 남주는 원작 여주를 좋아하겠지!’라고 생각하기엔, 나는 아퀼라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역시 이 세계는 어떤 종류의 로맨스든 그냥 다 사망했군.’
원작 여주가 등장했는데도 앞으로도 이 세계는 계속 아포칼립스일 것 같다. 왠지 이 상황이 어이없어서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나는 내 주변 아포칼립스 세계를 다시 보려고 고개를 들었다가 윈터와 눈이 마주쳤다.
“흠.”
이시나나 아퀼라는 이미 확인되었는데, 과연 윈터도 달린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을까?
나와 눈이 마주쳐서 그런지 그는 이쪽으로 다가오더니 내게 말을 건넸다.
“사루비아, 요즘 후임 관리를 열심히 하고 있군.”
“예, 그것이 제 일이니까 말입니다….”
“그렇지만 너무 무리하지 말고, 도움이 필요한 점이 있으면 말하도록.”
“예….”
그는 이런 식으로 내 업무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곤 했는데, 가끔씩은 윈터가 나를 신뢰하지 못하는 건지 좀 의심스러워진다.
“그리고 너에게 후임을 다루는 법에 대해 조언해 주자면, 적응하지 못하는 후임에게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격려해 주고, 후임에게 화를 내기보다는 잘 지도해 주는 편이 좋다.”
‘뭐야? 이게 얼마만이야?’
최근 나한테 지적을 하지 않던 윈터가 이렇게 다시 무언가를 길게 설명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하지만 윈터의 긴 설교가 달갑지는 않았기에, 나는 얼른 머리를 부여잡으며 연기했다.
“아, 요즘 신병 때문에 머리가 너무 아픕니다.”
“…신병은 앞으로 네 재량껏 관리하도록. 그리고 혹시 아프면 즉시 의무실로 데려다주겠다.”
“아니, 그 정도는 아닙니다….”
윈터도 달린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는군.
뭐, 이 부대에서 누가 영창 갈 위험이 줄어들었으니 참 잘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