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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집착보다 내 탈영이 빠르겠다 87화 (105/233)

‘에휴, 그래도 내가 살아 있으니까 달린을 후임으로 만날 수 있게 된 거겠지.’

달린을 만나지도 못하고 깔끔하게 죽어 버리는 것보단 이쪽이 더 낫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지.

원작에서 사람들이 나를 비춰 봤을 달린. 내가 이렇게 살아남아서 그녀를 후임으로 받게 되다니 정말 이상한 기분이었다.

‘나랑 닮았다라….’

…아무리 생각해도 저런 고문관이랑 내가 닮았다니 빡치긴 하지만, 일단 달린이 아직까지 내게 직접적으로 잘못한 건 없다.

그래, 원작 때문에 달린에게 괜히 편견을 먼저 가지는 건 옳지 않….

‘…그런데 이미 들어오자마자 ‘안녕하세요’로 시작하지 않았나?’

달린이 고문관이라는 사실만은 이미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게 된 상태였다, XX.

* * *

난 우선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달린을 차근차근 지도해 보기로 했다.

달린의 해맑은 모습을 보자마자 혈압이 솟아오르기는 했다. 패티와 매티를 처음 보았던 선임들이 바로 이런 기분이었겠군.

일단 달린은 베니의 안내에 따라 짐을 풀었고, 베니와 함께 식사를 했다. 조금이라도 달린으로 인해 혈압이 오르는 일을 줄이려는 내 의도였다.

그렇지만 이제는 정말로 내가 달린의 훈련을 도맡아야 할 시간이 온 것이다….

“야, 뛰라고, 좀!”

“허억, 허억, 저 못 하겠….”

“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고!”

“언제 끝….”

“말할 시간에 입 좀 다물고 달려!”

“힘들어요….”

“요?! 요?!”

지옥의 신병 훈련은 시작되었다.

나는 눈에 불을 켜고 달린을 쪼아 대었고, 달린은 울먹거리는 얼굴로 연병장을 달렸다.

“아오, XX! 하면 된다니까, 좀?!”

“5분만 이따가 하면 안 되겠습니까…?”

…개판이군.

결국 달린이 바닥에 주저앉는 모습을 보며, 나는 해사하게 웃었다. 저 멀리서 훈련을 구경하던 제이슨이 움찔할 정도로 예쁜 웃음일 것이다.

‘뭘 봐, 이 XX야.’

물론 내가 입 모양으로 한 말에 제이슨은 곧장 자리를 도망치듯 떠났다.

“달린, 너는 정말로 할 수 있을 거야….”

내가 그 어느 때보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달린이 헉헉거리며 간신히 대답한다.

“허억, 하지만….”

“아냐, 달린…. 하지만이란 없어….”

나는 예전의 에이프릴이 왜 그렇게 상냥해 보이는 얼굴과 목소리였는지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분노를 어떻게든 참아내려고 노력한다면, 저절로 인위적이고 가식적인 상냥한 목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

그건 ‘상냥한 목소리’가 아니라 ‘분노를 참아내는 목소리’였던 것이다.

“정말이야. 넌 할 수 있을 거야….”

달린은 정말 어떤 어려운 훈련이든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아직 검술 훈련을 시작하지 않은지라 달린은 모르고 있겠지만 원작에 따르면 그녀는 빛 속성 오러를 사용했고, 그건 아르콘의 피를 짙게 이었다는 의미다.

그건 그만큼 타고난 신체 능력이 뛰어나다는 의미기도 하지.

그동안 이만큼 몸을 쓸 일이 없어서 모르고 있었겠지만… 충분한 훈련만 있다면 달린도 스스로를 각성시킬 수 있을 것이다.

“사루비아 님…. 정말 그렇게 믿으시는 겁니까…?”

어쩐지 감동받은 듯한 목소리로 달린이 그렇게 물었고, 나는 다시 한번 웃으면서 대답해 주었다.

“응, 달린, 당연하지~. 너는 할 수 있어.”

왜냐하면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나는 눈에 힘을 주어 부릅뜨고 달린에게 다정하게 속삭였다.

“네가 혼자 훈련하니까 영 의지가 없는 모양이야. 이제부터 네 선임들이 함께 옆에서 달려 줄 거니까 괜찮겠지, 호호. 야, 그냥 제이슨! 가서 애들 안 불러오고 뭐 하냐!”

“아, 잠시만, 잠시만 시간을 주시면 제가 스스로 할 수 있을 것도 같고…!”

“내 시간이 네 거냐? 이게 선임 시간을 마음대로 가져가? 야, 그냥 제이슨! 빨리 안 움직이고 뭐 해?!”

“사, 사루비아 님, 잠시만….”

나는 허둥지둥하다가 벌떡 일어나 달리기 시작하는 달린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역시 폭력과 공포는 모두를 구원한다니까.

“걱정 마, 달린. 넌 절대 마물 때문에 죽을 일 없을 거야….”

가뜩이나 저번에 네 명의 신병들 중 절반이 날아가서 더 빡세게 굴리기로 마음먹은 상태였는데, 이 타이밍에 달린이 들어오다니.

아마 달린이 1인분을 하도록 만드는 데에는 다른 후임들보다도 더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겠지?

그리하여 나는 그 어느 때보다 굳은 결심을 했다.

“이제부터 달린은 내가 전담 마크한다….”

* * *

“아니, XX, 배에 힘을 주라니까? 힘, 힘!”

“허억, 진짜 몸이 안 올라오….”

“밀피! 밀피 어디 있니?!”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주일의 신병 훈련 동안.

“저 이제 진짜 팔에 힘이 없….”

“베니, 후임 관리 안 하니?”

“…지만 계속 해 보겠습니다….”

달린은 열 번의 훈련에서 열한 번씩 낙오를 하려 들었지만.

“그런데 자유 시간은 없습니까?”

“그럴까? 산체스와 함께하는 자유 시간은 어떨까?”

“…자유 시간 없이 훈련만 하고 싶다는 말이었습니다….”

내 눈물겨운 노력 끝에 달린도 남들과 같은 수준의 훈련을 완료하기는 했다. 물론 그건 참 힘든 과정이었다….

휴, 달린을 지도하느라 고생한 나, 너무 불쌍해.

“흐윽, 밀피 님. 신병의 훈련이 드디어 끝나서 다행입니다. 저희 정말 고생했지 말입니다…. 지난 일주일은 정말 지옥이었습니다….”

“그냥 제이슨, 방심하면 안 돼. 내가 보기에 사루비아 님은 앞으로도 우리를 굴릴 생각이라고.”

“너희 지금 내 얘기 했냐? 국경방위군 체조 4번 실시.”

그래도 그 결과로 달린은 참 많이 나아졌다. 물론 여전히 눈치도 없고 체력도 없었지만, 적어도 내가 명령을 내리면 어떻게든 해 보려고 노력은 했다.

“달린, 가서 이시나 님께 창고 열쇠 좀 받아 와.”

“예.”

흠, 사실 달린이 신병 정규 훈련을 마무리하려면 아직 검술 훈련이 남아 있었다.

이따가 어차피 다른 부대원들도 훈련을 해야 하니까, 그때 검술은 아퀼라에게 데리고 가서 가르치도록 해야겠다.

생각해 보니 지난 일주일간 달린과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하느라 아퀼라의 얼굴을 본 지도 오래된 기분이다.

원작에서의 인간관계 같은 건 틀어져 버린 지 오래라 그런지, 아퀼라도 달린에게는 별 관심 없어 보이는 것 같았다.

뭐, 달린도 이젠 옛날보단 나아졌으니까 관리를 조금 느슨하게….

“저, 사루비아 님….”

“뭐야, 벌써 왔어?”

생각보다 빨리 도착한 달린을 보며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어쩐지 달린에게 들려 있어야 할 열쇠가 보이질 않았다.

“열쇠는 어디 있냐?”

“그게 아니라 블레임 님과 토피넛 님이 빨리 뛰어오시라고….”

“…뭐야? 설마 블레어 님과 토피오 님 말하는 거야?”

그 인성 파탄 85기가 나를 불렀다는 얘기는….

“너 뭐 사고 쳤냐?”

“그, 그게, 제가 그분들이 아시나 님인 줄 알고 말을 걸어서….”

“설마 이시나 님 말하는 거야…?”

젠장, 내 실수다. 이 XX에게 외우라고 지시했던 암기 사항들은 어딘가로 날려 버린 지 오래였군.

‘뒤졌어, 진짜….’

관리 강도 1단계 올린다, XX.

* * *

“사루비아, 애들 관리 똑바로 안 하냐, 어? 요즘 애들은 다 개념이 빠졌어, XX.”

“XX, 우리가 이 짬밥에 신병 관리까지 해야겠냐고.”

“시정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내 목소리는 빠득빠득 갈리고 있을 것이다.

“XX, 우리가 언제 이시나로 개명했냐? 심지어 우리는 두 명인데 어떻게 이시나로 보이는 거야? 야, 내가 이 할 테니까 토피오 너는 시나 할래?”

“킬킬, 신병은 압존법이라는 거의 존재를 모르냐? 야, 우리한테 와서, 어휴~. ‘이시나 님, 사루비아 님께 열쇠 드려야 합니다.’? 이런 XX.”

인성 파탄 85기의 분노가 쏟아지는 것을 감당하며 나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유지하고, 또 유지했다.

하필 걸려도 이 인성 파탄 85기의 앞에서 실수를 해? 죽여 버리겠어, 달린….

마침내 그들이 갈굼을 끝내고 멀어지자 몸을 지탱하고 있던 팔을 땅바닥에서 떼며, 나는 예쁘게 웃는 얼굴로 달린을 돌아보았다.

“달린….”

“죄, 죄송….”

“내가 이 짬밥에 신병 앞에서 엎드리게 되다니 참 감개가 무량하구나….”

“그, 저, 죄송….”

“머리 박아, 이 XX야.”

인간 복숭아, 인간 살구, 인간 자몽의 시대는 끝났다. 내 눈앞에는 ‘인간 저혈압 치료제’가 존재했다.

“저번에 이름이랑 기수 다 외웠다면서! 외웠다면서어! 내가 압존법은 너한테 이십 번쯤 강조했잖아!”

“그, 기억이 잘….”

“기억력도 좋은 X이 왜 이런 것만 기억 못 하는데!”

“제가 기억력이 안 좋아서….”

“좋은 거 다 알고 있는데 구라 치고 있네! 너 마음만 먹으면 다 외울 수 있잖아, XX야!”

원작에서 남주들이 해 준 사소한 얘기들을 찰떡같이 기억해서 남주들이 감동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기억력이 나빠? 이게 지금 장난하나.

“너 네 맞선임 이름은 다 외웠냐?”

“그… 알렉산더 님이랑 제니 님입니다….”

“아브라함이랑 네로가 어떻게 알렉산더랑 제니가 되는데?! 아오, 좀!”

내가 분노에 차올라 달린의 머릿속에 암기 사항을 하나하나 박아 넣고 있을 때, 이시나가 피곤한 얼굴로 이쪽으로 다가왔다.

“사루비아, 좀 진정해 봐.”

“지금 신병 편드시는 겁니까?!”

“…뭐? 아니, 진지하게 네 고혈압이 걱정돼서 그런다.”

…일리가 있군.

“아니, 그런데 달린이 먼저….”

“물 좀 마시고 진정해 봐.”

이시나가 지친 목소리로 내 입에 물통을 꽂아 넣어 버렸기에, 결국 나는 강제로 입 안으로 쏟아지는 물을 삼켜야만 했다.

…냉수를 마시니 좀 속이 진정되는 것 같군.

“…아니, 그런데 달린이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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