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의 집착보다 내 탈영이 빠르겠다 86화 (104/233)

#10. 상상을 뛰어넘는 고문관, 지금 보여 드리겠습니다

제대 D-1460일.

오늘은 내 제대가 4년 남은 날이었다.

다시 한번 강조한다. 4년 남았다.

그리고 그 말이 의미하는 건 바로….

‘XX, 내가 진급이라니….’

오늘 나는 상등병으로 진급했다.

이 X 같은 공간에서 드디어 복무 기간의 반을 보냈다. 그만큼 내 생존 확률도 훨씬 높아졌다는 걸 생각하면 정말 감격스럽기 짝이 없었다.

하, 이런 게 바로 신분 상승의 맛….

물론 상등병으로 진급해도 또 다른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사실은 알지만, 그래도 나는 행복했다!

“카론.”

“아, 사루비아 님! 진급 축하드립니다!”

나를 발견한 뒤 환하게 웃는 얼굴로 쫄래쫄래 달려오는 카론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를 토닥여 준 뒤 아퀼라의 행방을 물었다.

“아퀼라 못 봤어? 숙소 들렸다 나온다고 했는데 늦어서.”

“아! 아까 이시나 님과 대화를 나누고 계셨습니다!”

“흠, 고마워.”

요즘의 내 일상은 정말로 완벽했다.

군대란 하루하루가 스펙터클한 곳이라지만, 최근에는 별다른 사고도 없었고. 제이슨도 패티와 매티를 제어하는 법을 터득해 나갔고.

상등병이 된 아퀼라와 나, 그리고 이시나가 이전보다 편해진 건 말할 것도 없고. 인성 파탄 85기가 종종 찔을 부렸지만 윈터가 자주 도움을 주고는 했고.

나와 마찬가지로 카론도 곧 진급할 것이고, 베니도 뛰어난 검술로 후임들 사이에서 나름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비록 얼마 전에 에인젤이 죽었던 일로 베니의 멘탈이 좀 깨진 것 같긴 하지만, 그런 일들은 이 지옥의 국경방위군에서 일상다반사니까 넘어가자….

어쨌든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내가 꿈꾸던 바로 그 모습, 부대의 권력을 완전히 손에 넣은 상태인 것이다.

‘…뭔가 잊고 있는 것 같은데.’

왠지 찜찜한 기분이 들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오늘 실수한 일은 없는 것 같으므로 나는 일단 그 예감을 무시하기로 했다. 뭐, 패티랑 매티가 또 사고라도 치고 있나 보지.

어쨌든 지금 그것보다 중요한 건, 나는 상등병으로 진급했고 부대 내에서도 굉장히 안정적인 위치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완벽해~.”

내가 가볍게 콧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 아퀼라가 모퉁이를 돌아 불쑥 나타났다.

“기다렸어?”

“아니, 별로? 이시나 님이랑은 뭔 얘기 하다 왔는데?”

“…그냥 부대 얘기.”

“그래? 아, 있잖아….”

나는 아퀼라에게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며, 우리의 평화롭고 아름다울 미래에 대해 얘기했다.

“옛날에는 제대 뒤에 뭐 할 거라고 얘기하는 게 의미 없는 농담 같았는데, 이제 좀 실체가 있는 얘기 같아.”

“나도 그래.”

“특히 외부 근무에서 바깥세상을 보고 오니까 더 그래. 바깥세상은 너무 낯설어.”

내가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도 그럴 게, 나는 이 미친 세계에 빙의한 뒤 얼마 안 돼서 입대했고, 입대한 후에는 그저 주어진 규율을 지키기만 하면 됐다.

하지만 제대하면 바깥세상으로 나가게 되는데, 그곳엔 내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규율들이 있을 것이다. 사회의 규율은 군대의 그것보다 훨씬 모호할 테니 오히려 적응하기 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내가 이곳을 나갔을 때는 네가 많이 도와줘야 해.”

“언제나 옆에서 도와줄게.”

“으응, 그래.”

우리가 나란히 앉아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누군가가 이쪽으로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신병이 왔나 보다.”

“그러게.”

저건 보나 마나 막내들 중 누군가가 우리에게 신병이 왔다는 소식을 전하러 달려온 것일 터다. 왜냐하면 신병 관리가 아퀼라와 나의 역할이었으니까.

‘…그런데 진짜 왜 이렇게 찜찜하지?’

아무래도 아까부터 불길한 예감이 느껴지는 걸로 보아, 패티와 매티가 또 사고를 치고 있는 게 확실했다. 찾아내면 조져야지.

‘신병 관리는 이미 한번 해 봤으니까 그때보다는 잘할 수 있겠지.’

저번 달까지만 해도 상등병이라고는 블레어와 토피오, 그리고 이시나밖에 없어서 일이 워낙 몰려 있었던 탓에, 이미 아퀼라와 나는 상등병들의 일을 함께 해 왔다. 저번에 들어온 신병 네 명의 교육도 우리가 담당했다.

‘그중 두 명은 죽었지만.’

안타깝게도 신병 네 명 중 두 명은 죽었는데, 우리가 훈련시켰던 애들이 죽는 건 정말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아무리 슬퍼한다고 해도 죽은 그들이 되살아나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죽고 나서 내가 느낀 건, 앞으로도 후임들을 최대한 열심히 굴려야겠다는 다짐뿐이었다.

‘…아, 진짜 뭔가 잊고 있는 것 같은데.’

아까부터 느껴지던 불길한 기운은 이제 더욱 커졌지만 도무지 생각나는 것이 없었기에 나는 고개만 갸웃거렸다.

‘뭐, 지금 중요한 건 이번에 들어올 신병이니까. 뭘 잊어버렸는지는 나중에 생각하자.’

“신병이 왔습니다!”

곧 예상했던 대로 제이슨이 숨을 몰아쉬며 우리에게 신병의 도착 소식을 알렸다.

“이번 신병은 한 명입니다. 소대장님께서 전달 모두 끝내셨고, 두 분께 인계하시랍니다.”

“그래.”

아퀼라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는 그가 내민 팔을 붙들고 몸을 일으켰다.

또다시 우리의 평화로운 군 생활 중 하루가 시작될 시간이었다.

* * *

그리고 나는 내가 잊고 있던 사실이 무엇이었는지를 바로 깨달았다.

“이, 이런 미친….”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느껴졌다.

내 시선은 눈앞에 서 있는 여자애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연주황색 머리, 금색 눈, 사랑스러운 인상의 외모.

“앗, 안녕하세요!”

“…요?”

어떻게 이걸 잊고 있을 수가 있었지?

“두 분도 이종족이신가요?”

“…하아.”

내 옆에 서 있던 아퀼라가 한숨을 푸욱 내쉬는 게 느껴졌고, 나는 더욱 눈에 힘을 주어 신병을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이런 미친…. 요?! 요?! 장난하냐?! 너는 생각을 안 거치고 말하냐고!”

“죄, 죄송합니다…!”

금색 눈에 눈물이 맺히려는 것이 보였기에, 나는 다시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뭘 했다고 울어?! 눈물 떨어지면 뒤진다! 눈치는 밖에 놓고 왔냐?”

어떻게 이 사실을 잊고 있을 수가 있었지?

XX, 예정된 내 죽음을 피했다는 기쁜 소식에만 집중하다 보니, 당연히 이 부대에 일어나게 될 가장 중요한 일을 잊고 있었다.

‘이왕이면 원작이 바뀌어서 다른 소대로 가지, 왜 하필 우리 소대냐고….’

그러나 내가 아무리 부정해도 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내 눈앞에 놓인 현실을 받아들일 시간이었다.

전설의 사고뭉치.

전대미문의 고문관.

온갖 사건 사고를 몰고 다니는, 걸어 다니는 폭탄.

당신의 상상을 뛰어넘는 신병!

원작 여주, 달린의 등장이었다.

* * *

원작 여주 달린에 대해 떠올려 보자.

물론 국경방위군 삶을 실제로 체험해 본 내 입장에서야 달린은 노답 고문관이지만, 어쨌든 잊지 말아야 할 부분은 달린은 소설 여주였다는 점이다.

‘그것도 아주 메이저한 여주지….’

소설의 여주인공은 독자들이 가장 몰입하는 대상이고, 독자들에게 비호감이 되어서는 안 된다.

특이한 세계관을 배경으로 하는 군부물이었다는 점은 ‘네미집’만의 차별화된 점이었다.

하지만 차별화된 점만 있어서는 독자들이 소설을 재미있게 읽지 않았을 것이다.

네미집은 클리셰들을 충분히 포함하고 있었고, 메이저 전개를 그대로 따랐다.

잘생기고 능력 있는 남주들의 역하렘, 오직 여주만 바라보며 여주에게 집착하는 남주들, 여주를 위기에서 구해 내는 남주들, 여주와 남주의 사랑을 방해하려는 악역 자이든, 그리고 여주를 질투하여 중간 악역 단계를 하는 여주의 맞후임….

그 ‘메이저한 요소들’ 중에는 달린의 성격도 포함되어 있었다. 달린은 눈치 없고 사랑스럽지만 어느 정도의 능력은 있는 여주였다.

도대체 달린에게 무슨 능력이 있냐고 되묻겠지만, 달린이 빛 속성의 오러를 사용했다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

다른 건 몽땅 꽝이었고 늘 실수를 저지르기는 했어도, 달린에게는 피를 타고 흐르는 오러 사용의 재능이 있었다.

게다가 원작에서의 달린은 아주 사랑스러웠다. 원작 조연들, 이 부대의 다른 선후임들도 달린을 좋아했다.

소설을 읽을 때는 별생각 없이 넘어갔지만, 이제는 그들이 원작에서 달린을 좋아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달린은 그야말로 사회의 어두운 면을 전혀 보지 못한 사람 같았으니까.

이종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아 왔던 부대원들에게, 달린의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은 그들이 겪어 보지 못한 것이자 그들이 동경해 오던 것이기도 했다.

출신 성분 때문에 고통받아 왔던 부대원들은 천진난만한 달린의 모습에 자연스레 호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 여주의 사랑스러운 행동에 조연들과 남주들이 차례로 함락되어 가는 과정이 재미있으니, 독자들도 자연스럽게 달린에게 이입하여 소설을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주가 그냥 착하기만 하면 요즘 트렌드에서 벗어나니까….’

다시 한번 말하지만, 달린은 ‘트렌드’에 부합하는 여주였다. 착해 빠져서 악역에게 맨날 당하기만 하는 여주는 독자들에게 사랑받을 수 없다.

원작에서의 악역은 자이든, 그리고 여주의 맞후임이었고….

달린은 특유의 ‘눈치 없음’으로 그들을 엿 먹였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에휴, 넌 대체 할 줄 아는 게 뭐냐? 아퀼라 님이 그렇게 감싸는데, 또 가서 일러 보지 그래?”

“힝, 알겠습니다…. 아퀼라 님! 아퀼라 니이임!”

자이든이 갈구면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고.

“달린 님이 절 도와주실 실력은 됩니까?”

“네 말대로 난 널 도와줄 실력이 없는 것 같아…. 내가 대신 베니 님께 가서 말씀드려 볼게!”

“아, 아니, 말이 왜 그렇게 됩니까…?”

“엥? 내가 아닌 다른 분의 도움을 받고 싶단 거 아니었어?”

첫 등장에서는 악역이었다가 후반부에 달린의 편이 되는 맞후임 지나에게는, ‘엥?’이라는 말만 수십 번씩 사용하며 지나의 화를 돋웠다.

‘나한테 그러면 빡치겠지만, 남한테 그러는 건 웃기지….’

원작에서의 달린은 악의가 없이 해맑고 순수했지만 도리어 그 점으로 인해 상대방을 당황시켰고, 독자들은 달린의 바로 그 포인트를 좋아했다.

그렇지만 그 달린이 내가 가르쳐야 할 후임으로 들어오면 아주 곤란해지는 법이지….

도대체 왜 상등병이 된 후 정식으로 맞는 첫 후임부터 이런 애가 들어온 거지? 정말 탈영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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