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의 집착보다 내 탈영이 빠르겠다 85화 (103/233)

“자, 카론. 내가 서류의 내용만 머릿속에서 싹 지워 주마.”

흑마술사는 직접 그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주술을 사용했고.

그러나 안타깝게도 ‘5%의 확률로 기억을 몽땅 잊게 되는 부작용’이 카론에게 발동되고 말았다….

흑마술사에게도, 카론에게도, 정말 기막힌 일이었다.

“너 말고 다른 놈들도 있으니까, 뭐…. 계약은 파기다. 너한테는 잘된 일이려나?”

흑마술사는 한숨을 푹 내쉬며 더 이상 쓸모가 없는 카론을 버리기로 결심했다.

그는 그와 카론 사이에 맺어져 있던 계약을 파기한 뒤 혹여 뒤탈이 날 것을 대비하여, 카론의 원래 집에 불을 지르고 그를 그 앞에 데려다 두었다.

카론이 그 화재 때문에 기억을 잃었다고 생각할 수 있도록.

그 흑마술의 부작용까지 더해졌기 때문일까. 국경방위군에 입대한 뒤에도 카론은 삶에 별생각이 없었다.

남들은 국경방위군을 증오할지 몰라도 카론은 자신을 둘러싼 상황이 어떻게 되든 정말 별 상관이 없었는데….

그곳에서, 카론은 그의 인생에 늘 비어 있던 것이 채워지는 기분을 느꼈다.

물론 그건 사루비아 덕분이었다.

“아니, 아니, 카론.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음…. 내가 하는 거 봐 봐.”

“아니, 산에 불을 지르면 안 되지.”

“마커벨리 꽃가루? 마약은 쓰면 안 돼….”

“생명은 소중하다 삼창 실시!”

귀찮을 법도 한데, 그는 카론에게 많은 것을 알려 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카론은 사루비아가 좋았다.

자신에게 잘해 주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을 리가 없었으니까.

처음 맛본 유일한 애정이었기에, 카론은 사루비아가 자신에게 보이는 태도의 몇 배로 사루비아에게 헌신할 수밖에 없었다.

* * *

“흑흑, 울 막냉….”

훈련을 마친 카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내가 말했다.

흑마술사 소동이 있던 이후로, 나는 카론을 그 누구보다 신뢰하게 되었다. 카론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내 말을 어긴 적이 없었으니까.

이제 아퀼라와 나는 곧 상등병으로 진급할 예정이었고, 상등병들의 숫자가 적은 탓에 이미 상등병의 일을 하고 있었다.

그건 그만큼 훈련 면에서는 편해졌다는 의미니, 참 긍정적인 일이었다.

내가 계속 카론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자, 내 옆에 바싹 붙은 카론을 흘기며 아퀼라가 말했다.

“카론은 막내랑은 한참 거리가 멀지 않아?”

“울 막내는 평생 막내야.”

“그래…. 마음대로 해.”

카론에 대해서는 나에게 자주 져 주고는 하는 아퀼라가, 결국 한숨을 푹 내쉬며 내 말에 수긍했다. 대신 그는 나를 흘끔거리며 재차 물었다.

“너 손 베였어?”

“…아, 맞아. 저번에 패티와 매티 그 XX들이 친 사고를 수습하다가.”

“줘 봐.”

그렇게 말하며 아퀼라가 내 손을 잡은 순간, 옆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흠흠.”

아까부터 우리를 지켜보던 이시나가 어쩐지 경멸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아퀼라가 왠지 억울함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카론은 왜 그냥 두십니까?”

“불순함 제로.”

“저는….”

“제발 개수작 좀 그만 부려라….”

이시나가 평소에는 쓰지 않는 거친 말이었기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무, 무슨 소리이십니까?”

“사루비아, 괜찮아. 넌 알 것 없어.”

아닌데? 갑자기 나만 모르는 맥락의 대화가 나왔는데?

“왜, 왜 저만 빼고 대화하십니까….”

이번에는 아퀼라가 이시나에게 어쩐지 비웃음이 담긴 눈빛을… 아니, 그건 하극상이니까 기분 탓이겠… 그런데 내가 아퀼라의 눈빛을 잘못 파악했을 리가 있나?

“아, 아니, 사루비아, 너만 빼고 대화하던 게 아니라….”

“사루비아?”

“예?”

어디선가 기척도 없이 불쑥 나타난 윈터에, 나는 몸을 움찔했다. 역시 윈터.

“점검할 게 있는데, 함께 무기고에서 총기를 확인할 수 있나?”

“넷슴다.”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윈터의 뒤를 따랐다. 이놈의 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군.

* * *

그리고 사루비아가 윈터와 함께 떠난 자리에서, 이시나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제길, 저쪽은 나보다 선임이라 뭐라 하지도 못하겠어!”

“윈터 님 쪽보다는 제가 낫지 않겠습니까?”

아퀼라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가, 고개를 돌려 카론에게 견제의 시선을 보냈다.

“그리고 카론 너, 기억을 되찾았다며?”

“아, 예, 맞습니다!”

“…좋아, 달라진 건 없군.”

날카로운 눈빛으로 카론을 살피는 아퀼라를 보며, 이시나는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네가 제일 문제야…. 너는 제발 수작 좀 그만 부려, 제발 애 좀 건드리지 말라고.”

이시나는 눈을 감으며 간절히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부디 제발 이상한 놈이 사루비아에게 집착하지 않게 해 주세요.

…솔직히 그 자신도 이상한 놈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몇 년에 걸쳐 수작을 부리고 있는 아퀼라나, 선임의 특권으로 남들을 대놓고 견제하는 윈터나, 옆에서 멀뚱멀뚱한 표정을 유지하다가 사루비아만 오면 방긋 웃을 카론보다는 나을 것이다, 뭐.

#외전 1. 『네 명의 미친놈들이 나한테 집착한다』 원작의 비밀

사루비아가 죽었을 때 카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우는 것밖에 없었다.

그는 밥을 먹으며 울었고, 작업을 하며 울었고, 검을 휘두르며 울었고, 자기 위해 누워서 울었다.

시간이 흐른 뒤에도 카론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은 슬픔밖에 없었고, 마음만 먹는다면 여전히 그는 하루 종일 눈물을 흘려댈 수도 있었지만.

그렇지만….

‘그래도 사루비아 님이 시키신 대로 해야 돼.’

“너보다 약한 존재가 있는데 도울 수 있는 상황이라면 도와야 해.”

카론은 아무런 관심도 없는 후임들을 도왔다. 사루비아가 그렇게 하라고 했으니까.

카론이 돕던 후임들 중에는 새로 들어온 신병 달린도 있었는데, 카론은 그녀에게 조금 더 신경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그건 달린이 사루비아를 닮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카론이 보기에 둘은 전혀 닮지 않았다. 그가 사루비아와 다른 사람을 혼동할 리는 없었다.

다만, 카론이 달린을 유난히 잘 따르고 도와주려고 하는 이유는 생전 사루비아가 했던 말 때문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일이 있는데 내가 없으면 아퀼라가 하는 대로 따라 하고.”

자신의 맞선임 아퀼라는 자신을 가끔씩 꺼림칙한 눈으로 보고는 했지만, 어쨌든 그가 사루비아와 함께 카론에게 잘 대해 줬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카론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는, 늘 아퀼라와 사루비아를 따라 하면 됐다. 사루비아는 자신에게 그렇게 하라고 했다.

그래서 카론은 달린을 대할 때 아퀼라의 태도를 모방했다.

아퀼라가 꼭 사루비아를 대하듯이 달린을 대하길래, 카론도 그렇게 했다.

국경방위군이라는 공간에 들어온 후, 카론의 행동 강령은 언제나 간단했다.

위에서 시키는 명령을 따른다.

그리고 사루비아의 말을 따른다.

기억이 있든 없든, 그런 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사루비아가 살아 있을 때는 카론의 윤리가 조금 뒤틀려 있다고 자주 지적해 주고는 했지만….

사루비아가 모르고 있던 한 가지 사실은, 카론의 모든 기준은 사루비아에 맞춰져 있었다는 것이다.

사루비아가 곧 카론의 윤리였다.

죽고 난 뒤에도, 그녀는 언제나 카론의 기준으로 남아 있었다.

그녀가 원하는 일이라면 카론은 무엇이든 했고, 그녀가 원하지 않는 일이라면 카론은 절대 하지 않았다.

“저는… 저는 주변의 누군가가 죽는다는 거에 대해 어떻게 익숙해질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으음….”

“카론 님은 괜찮으셨습니까? 그러니까 그… 이전에 계셨다던 맞선임 분….”

“아, 사루비아 님?”

“예….”

“나는 괜찮아! 앞으로도 괜찮을 거야!”

사루비아는 부대원들의 죽음을 이겨 내야 한다고 했다.

언제까지나 거기 매몰되어 있으면 안 되고, 자신의 삶을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니 카론은 괜찮을 것이다. 괜찮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제대하면 명령을 어기는 거겠지?’

만일 사루비아가 그에게 했던 명령 여러 개가 충돌한다면. 아마도 사루비아가 가장 많이 했던 말을 따르는 게 맞을 것이다.

“내가 없을 때는 시키지 않은 일 하지 말고 얌전히 기다리고.”

카론은 사루비아를 얌전히 기다렸다. 그녀가 기다리라고 했으므로, 그는 국경방위군을 떠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카론 님도 진급이 얼마 안 남으셨지 않으십니까?”

“응, 맞아! 나도 곧 지휘사관이야.”

“그럼 이 부대를 떠나시는 겁니까?”

“음…. 그건 싫은데.”

그렇게 되면 사루비아의 명령을 어기는 일이 되니 곤란하다.

“예? 아, 지휘사관도 이 부대에서 하고 싶다는 겁니까? 윈터 님도 그런 거라고 들었는데!”

“맞아, 나는 계속 이 부대에 있고 싶어.”

“헤헤, 그래도 제대는 하실 거 아닙니까!”

“제대하기 싫은데.”

“…예?”

“제대하기 싫어. 계속 이곳에 있으면 안 되나?”

사루비아는 그에게 기다리라고 했다.

그래서 카론은 그녀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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