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원작에서는 일만 하다 돌아가서 아무런 기억을 되찾지 못했는데, 내 말로 인해 카론이 변한 걸까? 이게 바로 나비 효과?
와, 내 존재 때문에 원작이 변했다고 생각하니 그야말로 빙의물 속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아주 훌륭했다.
“빙의물… 로맨스 좋지….”
“사루비아, 뭐 해?”
“아.”
그제야 나는 생각에서 빠져나와 내 눈앞에 있는 아퀼라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언제 보아도 로판 남주다운 훌륭한 얼굴이었다.
“사루비아, 내 생각에는….”
“응.”
아퀼라는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물론 평소의 아퀼라야 늘 사나워 보이는 눈매로 무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이기는 했지만, 같이 지낸 세월이 몇 년인데 그의 속마음을 읽는 것 정도야 껌이었다.
그리고 지금 아퀼라의 눈빛에는 분명한 긴장감이 담겨 있었다.
“카론이 기억을 되찾았다는 게 그렇게 좋은 일인지 잘 모르겠어.”
“어? 왜?”
내 눈이 동그래졌다.
카론이 기억을 되찾아서 저렇게 침착해진다면, 물론 좀 갑자기 성장한 모습을 보는 내 입장에서야 섭섭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카론에게는 좋은 일 아닌가?
“하긴. 애가 갑자기 성숙해져서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된다면 서운하긴 할 거야. 너도 그래서 별로라는 거구나. 역시 육아는 어렵다….”
“그래서 연습하…. 아니, 이게 아니라.”
내 말에 무의식적으로 맞장구쳐 주던 아퀼라가 갑자기 굳은 얼굴을 했다.
“카론이 가지고 있던 기억이 뭘지 우리는 모르잖아.”
“…응?”
그의 말을 듣자니 갑자기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망치.’
그래, 그놈의 망치.
산체스가 그랬지 않은가. 꼭 용병들이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내리칠 때의 자세와 똑같다고.
‘…카론, 설마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을 망치로 후려치고 다닌 건 아니겠지?’
물론 그런 일이 있었다면 그건 다 아돌브 제국민 잘못이고 우리 막내는 아무 잘못도 없지만, 어쨌든 문제는 문제다.
“그러게…? 대체 카론은 입대 전에 뭘 하다 온 거지?”
제발 내 착하고 순진한 맞후임이 갑자기 흑화하는 전개로만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제길, 그건 싫다고.
“사루비아, 그동안 카론이 보였던 모습을 생각해 봐. 걔가 뭘 잊고 있었는지 말이야.”
내가 카론을 봐온 지는 거의 삼 년 반이 된다.
내가 그동안 봐온 카론의 모습은 어땠지?
“산 입구에 불을 지르고 마물의 소행이었다고 하면, 황태자님도 저희 부대에 일이 생겼으니 다른 부대로 가시지 않겠습니까…?”
기억을 얼마나 날려 먹었으면, 방화가 나쁘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산의 동식물을 죽이면 안 된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혹시 밤에 잠이 잘 안 오시는 거면, 뒷산에 있는 마커벨리 꽃가루를 물에 섞어서….”
“그거 마약이잖아, 이 미친놈아!”
내가 잠이 안 온다니까 대뜸 마약을 추천하고.
“사루비아 님! 자이든이 마음에 안 드시는 거면 제가 가서 몇 대 쳐 주고 오겠습니다!”
“하지 마라, 제발…. 얌전히 좀 있으라고…. 아퀼라! 애한테 말 좀 잘 해 줘 봐!”
내가 자이든을 묘하게 거슬려 했을 때는 또 그걸 어떻게 알아차리고 내가 원한다면 나 대신 자이든을 쳐 줄 태도를 보였고, 폭력의 위험성을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즉 카론은 완전히 기억을 엉망진창으로 날려 먹은 상태였는데….
“사루비아, 만약에 말이야….”
아퀼라가 목소리를 낮춘 채 말했다.
“만약 그게 기억을 잃어서가 아니라, 원래 그랬다면?”
“…뭐?”
“카론에겐 그런 비윤리적인 일들이 당연했는데, 기억을 잃으면서 자기 자신이 원래부터 반사회적이었다는 사실조차 까먹은 것이라면?”
…갑자기 등골이 싸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맞는 말 같아….”
XX, 지금까지 잘 억제되어 있었던 고삐를 내가 풀어놓은 기분이었다.
* * *
그때부터 내 고민은 시작되었다.
‘뭐지? 기억을 되찾는 걸 막아야 하나?’
내가 슬쩍 카론에게 말을 걸 때마다 카론은 언제나 그렇듯 나를 반기며 즐거운 목소리로 답했지만.
하지만 활기찬 태도는 그때뿐이었다. 혼자 가만히 있을 때의 카론은 이전에 비해 확실히 많이 차분해졌다.
내가 카론에게 기억을 되찾았냐고 물었을 때는 완전히는 아니고 조금만 기억났다고 대답했는데,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무슨 기억인지는 일부러 자세히 물어보지 않았지만….
‘카론은 기억을 일부 되찾았어.’
그럼 이제 기억을 전부 되찾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모른다.
‘이럴 때는 역시….’
그래, 이렇게 바보같이 끙끙 앓고만 있을 게 아니다. 군대에 선임이 왜 있겠는가. 선임에게 의지해 보도록 하자.
“이시나 님! 이시나 님! 이시나 님!”
“사루비아…. 한 번만 불러도 들을 수 있다니까.”
퀭한 얼굴의 이시나가 불쑥 나타났다.
사람의 속마음을 읽어 내는 데 능하고 완벽한 흑막 속성을 가지고 있는 이시나라면 이 문제에 도움을 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설명을 들은 이시나는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태도를 보였다.
“그래서 카론이 기억을 되찾으면 어떨 것 같은데?”
“예?”
“예를 들어 뭐, 카론이 산체스처럼 원래 잔인하기로 소문난 용병이었다면, 갑자기 카론이 돌변해서 사람이라도 칠 것 같아?”
“아, 아니, 그건 아닙니다. 여전히 말은 잘 듣고….”
지금도 카론은 내가 불렀을 때 예전과 같이 반응하고는 했으니까.
“그럼 됐네. 뭐가 걱정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는 편이 확실할 거야. 카론은 네가 묻는다면 틀림없이 답해 줄 테니까.”
“아하.”
그 말에 속이 좀 개운해지는 기분이었다. 역시, 믿음과 신뢰의 아이콘 이시나.
“사루비아, 너는 좀 쓸데없는 걸로 걱정하는 경향이….”
이야, 역시 흑막이 내 편일 때는 정말 도움이 된다. 이렇게 고민을 딱 해결해 주다니.
얼마 전 내가 죽을 뻔한 사건을 피했을 때 확인했듯이, 이시나가 내 편이라 참 좋은 것 같다.
“역시 이시나 님.”
“…또야? 왜 자꾸 내 말에서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려고 하는 건데?”
“오늘도 도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에휴, 됐다….”
* * *
이시나는 카론에게 직접 물어보라고 했으나, 그럴 시간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 후에 일과 시간이 바쁘게 이어졌고, 날이 지나 다시 외부 근무를 나가야 했으니까.
침수 피해를 입은 마을은 한둘이 아니었고, 우리는 저번과 또 다른 마을에 지원을 나가야 했다. 오늘 가는 곳은 저번의 그 마을의 옆에 위치한 지역이었다.
‘이따가 작업할 때 카론한테 기억에 대해 물어봐야겠다.’
난 저번보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산을 내려갔다.
저번의 경험을 통해 외부 근무는 오히려 여유롭게 일할 수 있는 꿀작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럼 카론과 대화할 시간도 충분할 테니까.
게다가 경계 근무랑 달리 중간에 죽을 위험도 없다!
이 아포칼립스 세계에서 잠깐이나마 벗어난다는 점에서 외부 근무는 아주 훌륭했다.
그리고 나는 외부 근무에서 예상치 못했던 인물을 만나게 되었다.
“여어, 사루비아, 오랜만이다-! 이시나 너도!”
“알타이르 님?”
분명히 지휘사관으로 진급하여 다른 부대로 간 알타이르가 내 눈앞에 서 있었다.
내가 당황하자 윈터가 알타이르가 이곳에 있는 이유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외부 근무에서는 이렇게 다른 부대를 만나는 일이 흔하다.”
오랜만에 만나는 알타이르는 여전히 쿨하고 민트하고 아이시한 기운을 풍기는 푸른 머리카락과 푸른 눈이 돋보였고,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이빨을 드러내는 특유의 당당한 미소를 얼굴에 띠고 있었다.
여전히 여유로워 보이는 모습을 보아 다른 부대에서도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았다.
“알타이르네 부대는 오늘 이 마을에 다른 볼일이 있어서 근무를 나왔지만 함께 있게 되겠지.”
“다른 볼일이라면….”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역시나 모든 정보를 알고 있는 윈터가 설명을 덧붙였다.
“흑마술사 수색에 협력하기 위해 나왔다는데, 단서가 부족한 탓에 성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 같더군.”
“흑마술사 수색 말씀이십니까? 아, 외부 근무에서 그런 일들도 합니까?”
“외부 근무에서는 정말 다양한 일을 맡게 되니까.”
알타이르는 나와 내 옆에 서 있던 이시나와 눈을 마주치자 가볍게 인사했고, 패티와 매티, 그리고 그 사이에 껴 있던 제이슨을 보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자기가 관리 안 해도 되는 애들이니까 그냥 웃기다 이거지….’
우리는 아직도 패티와 매티로 인해 매일 속이 썩는데, 정말 얄밉군….
외부 근무에서 지휘사관들끼리는 자유롭게 대화하도록 간부들도 내버려 두는 듯했다. 하긴, 그들은 제대만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알타이르는 쾌활한 목소리로 윈터와 뭐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지휘사관이 돼도 아예 못 만나는 건 아니었구나.”
“응, 운 좋다면 꽤 자주 만나기도 해. 그리고 지휘사관부터는 편지를 자유롭게 쓸 수도 있고.”
이시나가 설명해 주었지만 별로 도움이 되는 정보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어차피 전 편지 쓸 곳도 없지 말입니다….”
“다른 부대에 있는 사람에게 보낼 수도 있으니까.”
“아하.”
그제야 나는 아퀼라가 어쩐지 열렬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나중에 각기 다른 부대로 가게 된다면 그에게 편지를 쓰겠다고 약속해 주었다.
“에휴…. 불안하다, 불안해.”
“아, 이시나 님께도 편지 써 드립니까?”
“응. 반드시.”
어쩐지 단호한 이시나의 앞에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생각보다 감성적인 타입인가?
그때 이시나의 얼굴을 본 순간, 이전에 우리가 주고받았던 대화가 떠올랐다.
동시에 나는 알타이르네 부대가 수색하고 있을 흑마술사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3대 흑마술사!’
제국 북부를 주름잡고 있다던 그들!
지금 수배령이 내려져 있다고 했으니, 알타이르네 부대도 그중 하나를 잡으러 온 게 틀림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