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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집착보다 내 탈영이 빠르겠다 80화 (98/233)

“제가 대장장이 밑에서 일해서 대장장이나 목수가 망치를 쓰는 방법은 잘 아는데, 그쪽은 아니셨지 말입니다. 오히려 용병들이 망치를 휘두르는 방법과 훨씬 비슷하셨습니다.”

“그, 그렇구나….”

“예, 저도 가끔 망치로 두개골을….”

그다음에 이어진 내용은 내 인생의 장르를 또다시 19금으로 바꾸려 드는 고어하고 그로테스크한 내용이었기 때문에, 내 기억에서 깔끔히 지워 냈다.

“서, 설명하지 마…. 역시 XX 강하네….”

나는 산체스의 말에 당황하여 이리저리 눈을 굴리다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한 카론을 발견했다.

국경방위군 장교로 복무하다 사망했던 아르콘 친부모 대신, 제국민 양부모로부터 길러졌다고 했으면서.

‘평범한 가정이면 망치로 사람을 부술 일은 없었을 텐데.’

대체 너는 뭘 했던 거야, 카론?

* * *

그다음 작업에서 나는 카론에게 물을 길어 오라고 양동이를 들린 후 그를 강가로 보냈다.

물론 그건 핑계였고, 혹시 그의 기억 속에 이 마을이 있을 수도 있으므로 마을을 천천히 둘러보며 기억을 되찾아 보라는 의미였다.

혼자 보내기에는 불안했지만, 나까지 빠지면 작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을 것이므로 어쩔 수 없었다.

한편 지금 나는 아퀼라와 함께 망가진 목책을 보수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물에 잠기면서 땅에 박혀 있던 목책이 완전히 뿌리 뽑혀 있었는데, 그걸 다시 심는 게 우리의 일이었다.

“그래서 카론은 혼자 보냈다는 거지?”

“응.”

나에게 조금 전 상황에 대해 들은 아퀼라가 생각에 잠겼다.

“아퀼라 넌 뭐 짐작 가는 거 있어?”

“글쎄. 나도 딱히 들은 건 없어서.”

“역시 그렇지? 음, 역시 찜찜하단 말이지….”

내가 눈썹을 축 늘어뜨린 채 말했다.

“하, 물은 잘 길어 오겠지? 처음으로 애 혼자 심부름 보낸 기분이야.”

“동의해. 육아는 어려워.”

“맞아. 어려워….”

“괜찮을 거야. 우린 지금 연습했잖아.”

“그런가…?”

축축하게 젖은 땅을 파내며, 우리의 목소리도 함께 가라앉을 때였다….

“사루비아.”

“예?”

이제 저 목소리의 주인이 기척도 없이 나타나는 건 익숙한 일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윈터의 얼굴을 확인했다.

자신과 반대되는 속성을 가진 윈터를 보자 아퀼라의 얼굴에 곧장 불편한 기색이 떠올랐다.

“잠깐 시킬 일이 있는데, 따라오도록.”

“아, 예.”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며, 아퀼라에게 이따가 보자고 눈짓을 했다. 아퀼라의 눈에 불만처럼 보이는 감정이 담겨 있었는데, 아마 이 일을 혼자서 다 하게 돼서 그럴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뭐….

윈터는 앞장서서 어딘가로 걸어가더니, 이내 한 건물 앞에 도착했다.

그러고 보니 보수 작업을 하는 동안, 마을 측에서는 쉴 수 있는 건물을 따로 제공한다고 했다. 물론 짬이 부족한 나는 얼씬도 할 수 없었지만.

아마 지금 윈터가 나를 데리고 온 이곳이 휴식을 위한 공간인 것 같았다.

원래는 가정집이었을 것처럼 보이는 그곳에는 급히 놔둔 듯한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사루비아, 여기 앉아서 이 일만 해 주면 된다.”

명령대로 의자에 앉은 내게 윈터가 서류 몇 장을 건넸다.

마을의 보수 작업을 위해 필요한 설비들이 무엇인지 옮겨 적는 서류 작업이었는데, 아무리 봐도 형식상 해야 하는, 실질적인 의미는 없는 일 같았다.

동시에, 그건 굉장히 쉬운 일이기도 했다. 방금까지 내가 열심히 삽질을 하던 것에 비하면 말도 안 되게 편한 일이라는 소리였다.

‘흠.’

만약 여기서 로판식으로 생각한다면 나에게 사랑에 빠진 윈터가 나를 조금이라도 편하게 배려해 주는 거로 착각할 수 있겠지만….

‘이젠 안 속는다, 네미집 세계관 이 XX야.’

옆 테이블에는 우리 부대의 현재 지휘사관인 제이가 테이블에 엎어져서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저 꼴을 보아하니 그냥 제이가 이 간단한 일조차 하기 싫어서 나한테 떠넘긴 거겠지.

한마디로 나한테 짬을 때렸다는 소리다.

윈터는 다른 서류를 뒤적이고 있는 걸 보니 그는 자신의 일로 바쁜 모양이었고.

로판 전개라고 김칫국을 마시는 대신 나는 펜을 집어들고 묵묵히 내 일을 시작했다.

“사루비아.”

“예?”

“먹으면서 하도록.”

윈터가 나에게 종이봉투를 스윽 건넸다.

“아까 마을에서 제공받은 것이다.”

“감사합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봉투를 건네받은 나는, 그 안에 있는 것들을 확인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이건…

‘싸제 음식!’

보기만 해도 달아 보이는 생크림이 얹힌 빵들. 당분이다.

엄청나게 많은 설탕을 넣었을 것 같은 빵의 모습이 보이자, 내 손이 부들부들 떨려오기 시작했다.

이 세계에 빙의하고 디저트를 못 먹은 지도 한참 되었다.

문제는 내가 당을 공급받지 않으면 극도로 예민해지는 인간이라, 당이 떨어질 때마다 인성이 파탄 나는 게 스스로 느껴졌다는 거다….

후임들아, 미안하다.

나는 감히 귀한 싸제 음식을 입에 넣어도 되냐는 눈으로 윈터를 쳐다봤고, 윈터가 무뚝뚝한 어조로 되물었다.

“궁금한 게 있나?”

“아, 아니…. 정말 먹어도 됩니까?”

윈터가 직접 건네주면서 먹으라고 하기는 했지만 규율상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지는 의문이었다.

“외부 근무를 나왔을 때 외부 음식을 먹지 못하는 규율 같은 건 존재하지 않으니 괜찮다. 오히려 외부 근무를 장기간 할 때는 외부 음식으로 식사를 때워야 할 때도 있지.”

윈터답게 길게 말하고 있지만, 어쨌든 먹어도 된다는 소리였다.

‘역시 윈터, 원칙을 어기지 않으니까 허락한 거군.’

그리고 얼마 안 가 나는 행복해졌다. 입에서 부드러운 크림이 녹는 맛이 느껴졌고, 오랜만에 맛보는 달콤함에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여유롭고 얌전해졌다.

‘이게 바로 싸제의 맛!’

내가 열심히 빵을 먹는 동안에도 우리 부대의 지휘사관 제이는 열심히 졸아 댔고.

윈터는 어쩐지 여유로운 얼굴로 입꼬리를 올린 채 나를 쳐다봤다.

‘하긴, 우리가 삽질하고 있을 때 본인은 서류 처리를 할 수 있으니까 저렇게 표정이 편한 거겠지.’

“사루비아, 생크림.”

“아, 예.”

나는 윈터의 말에 따라 입에 묻은 크림을 닦아 내고서 한 손에 펜을 들고 일을 시작했다.

* * *

작업이 끝나고 부대로 돌아갈 때에서야, 나는 잊고 있었던 카론의 존재를 떠올렸다. 싸제 음식의 맛이 너무 임팩트가 강렬해서 잠시 잊고 있었군….

다시 만난 카론은 어딘가 불편한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늘 초롱초롱하게 빛나던 갈색 눈은 불편한 듯 찡그려지고는 했고, 늘 환하게 웃고 있던 입매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왜 그래? 뭔가 기억을 되찾았어?”

“아, 그게….”

내게 무언가를 말하려던 카론은 갑자기 두통이 밀려오는지 한 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를 감쌌다. 그는 고통스러운 듯 인상을 팍 썼다가, 좌우로 머리를 흔들며 어떻게든 이겨 내 보려고 하기를 반복했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저 머리가 좀 아파서….”

“괜찮아? 내가 조용히 있을까?”

“아, 아닙니다…. 그냥 제가 노력해 보겠습니다.”

“머리가 아픈데 뭘 노력해.”

나는 답답해져서 그의 등을 천천히 두드려 주었다. 아무래도 정말 이 마을에 뭔가 있는 게 분명하다.

‘옛날에 이 마을에서 살다가 이사하기라도 한 건가?’

그렇지만 혼란스러워 보이는 카론의 모습을 보자니 섣불리 간섭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 이후 부대로 돌아가기 위해 걷는 동안에도 카론은 웬일로 조용했다.

평소라면 자꾸 나한테 말을 붙이며 어떻게든 관심을 받아 보려고 했을 텐데, 지금 카론은 혼자만의 생각에 잠긴 듯했다.

“카론, 지금도 머리 아파?”

“아닙니다, 이제 안 아픕니다.”

그렇게 대답하는 카론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그 목소리가 사뭇 낯설어서, 나는 떨리는 동공으로 아퀼라를 쳐다보았다. 그도 나와 마찬가지로 아연한 얼굴이었다.

‘뭐야, 쟤가 왜 저렇게 조용해? 네가 봐도 이상하지?’

‘확실히 이상해.’

이제 정말로 두통은 나은 것처럼 보였지만, 카론은 돌아가는 내내 차분한 태도를 유지했다. 늘 밝게만 보였던 그의 갈색 눈이 어쩐지 어두운 빛을 띠고 있는 것도 같았다.

그리하여 부대로 걸어가는 동안, 우리는 슬쩍슬쩍 카론의 눈치를 보기만 할 뿐이었다.

* * *

“있잖아, 아퀼라. 혹시 그런 걸까?”

부대로 돌아와 주어진 자유 시간에, 나는 아퀼라의 소매를 붙들고 구석진 곳으로 이동했다. 도저히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아무래도 저건 잃어버린 기억을 일부분이라도 되찾은 것처럼 보이는데, 그럼 과거 자신의 모습이 점점 나오고 있는 거겠지?”

아마도 뭐, 원래는 더 차분하고 성숙한 사람이었다던가, 그런 게 아닐까?

그럼 카론은 앞으로 자신의 기억을 되찾을수록 점점 변해 갈 거고, 이전보다 침착한 사람이 될 것이다.

“울 막내가 성숙해진다니, 정말 기분이 이상하다….”

마치 애가 사춘기가 온 듯한 이 기분. 시원섭섭하다는 게 이런 기분이 아닐까.

‘그래도 별로 큰 문제는 아니네.’

혹시 큰일이 생길까 봐 걱정했던 것에 비해 별일은 아니었다. 처음에야 조금 혼란스럽지만, 어쨌든 기억을 완전히 되찾는 편이 카론에게도 장기적으로는 덜 혼란스러울 테니까.

…그런데 정말 원작에도 이런 내용이 있었나?

좋아, 떠올려 보자. 그러니까 카론이 달린에게 자신이 사루비아를 따랐던 이유를 이야기할 때.

기억이 혼란스러웠던 자신을 사루비아가 잘 챙겨 줬다는 얘기를 할 때….

“그럼 카론 님은 지금은 기억을 되찾으신 겁니까?”

“아니! 하지만 별로 상관은 없을 것 같아.”

원작에서도 카론은 기억을 되찾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그게 나중에 무슨 떡밥으로 작용할까 싶었는데, 그건 그냥 늘 해맑은 카론의 성격을 설명하는 만능 키 역할을 할 뿐이었다. 아직도 그 소설이 어째서 인기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군.

하지만 원작에서는 네 명의 남주들이 매력 있고 가오 있게 그려지기는 했다, XX….

어쨌든, 원작에서 카론은 기억을 되찾지 못했고 늘 해맑은 상태였는데.

‘지금은 도대체 무슨 일인 거지?’

내가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내 덕분에 갑자기 기억을 되찾았을 리도 없었다.

‘…설마 내가 망치를 좀 두들겨 보라고 했던 게 도움이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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