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마술사가 특산물이라는 건 아니고, 비교적 이쪽 지방에서 유명하다는 얘기야. 제국 북부에 수배령이 내려진 세 명의 유명한 흑마술사들이 있거든.”
지금 우리가 일하고 있는 이 마을이 바로 제국 북부였다.
“그럼 이 마을에도 흑마술사가 산다는 얘기입니까?”
“아니, 흑마술사가 나 여기 살고 있소 하고 떠벌리고 다니면 벌써 체포됐겠지. 이 마을에 흑마술사가 정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이 제국 북부에서는 그 세 명의 흑마술사들이 유명하다는 얘기야.”
“아하….”
제국 북부를 주름잡는 단 세 명의 흑마술사라니.
‘역시 로맨스 따위 없는 이 세계에는 북부 대공 같은 건 없구나. 대신 북부 흑마술사가 있는 거구나….’
‘북부대공’에서 ‘북부의 3대 흑마술사’가 됐을 뿐인데, 정말 허접한 빌런 조직이 된 느낌이다.
“그런 거 말고 이 마을의 특산물 같은 거라면 나도 잘 모르겠네.”
“괜찮습니다. 답변 감사합니다….”
이시나에게 힘없는 목소리로 인사한 나는 작업을 위해 다시 그다음 집으로 이동해야 했다.
카론의 기억을 자극할 수 있을 만한 ‘이 마을에 대한 정보’는 다른 데서 얻어 봐야겠다.
“막내들아, 빨리 가서 물이나 좀 떠 와라.”
“예….”
다시 패티와 매티, 제이슨이 사라지는 걸 보며, 카론과 나는 울적한 얼굴로 삽을 들었다.
상등병들의 수가 얼마 없기 때문에 이시나가 이 팀 전체의 업무 진행을 나에게 맡겨 놓은 상태였다. 그나마 내가 좀 편한 일을 한다는 건 참 다행이지만….
‘일하기는 싫지….’
이미 하나의 기계가 되어 버린 몸짓으로 삽질을 할 때, 다시 카론이 행동을 멈췄다.
“왜 그래? 카론…. 아.”
그가 저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분명 ‘기억’ 때문이겠지.
그가 조금 전에 일하던 집에서 이 마을이 익숙하다고 한 게 떠올라서, 나는 그를 유심히 쳐다봤다.
카론은 단지 우연일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일단 기본적으로 이 세계는 소설을 배경으로 하여 만들어진 세계니까.
‘이런 일은 우연일 수가 없단 말이지.’
드라마, 소설, 연극 어디서든 단골 요소이자 만능 요소이자 막장 요소인 ‘기억 상실’.
기억 상실이 종결될 때는 반드시 그동안 뿌렸던 떡밥을 회수한다. 즉 그동안 인물의 행동이 어딘가 이상하고 어색해 보였다면, 기억을 되찾으면서 과거의 위화감이 설명되는 식이다.
그간 카론의 행동을 돌이켜볼 때 이 마을은 분명히 카론이 잊어버린 기억 속에 있는 마을임이 틀림없었다.
“아, 이거.”
카론이 성큼성큼 걸어간 곳에는 공구함이 놓여 있었다. 물에 흠뻑 젖어서 상태는 영 안 좋았지만, 어쨌든 그 안에 든 공구들을 쓸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카론은 그 안에서 커다란 망치 하나를 꺼내 들었다. 공구함에 들어 있던 다른 공구들과 비교되는 위협적이고 거대한 크기의 망치였다.
“카론, 왜?”
“뭔가… 기억이 나는 것 같습니다….”
그는 손등에 힘줄이 설 정도로 힘주어 망치를 꽉 잡았다가, 아차 했는지 내 눈치를 보며 물었다.
“사루비아 님, 혹시 이거 한 번만 써 봐도 됩니까?”
“어디에? 내 머리를 깨는 데에?”
“아, 아니. 그냥 땅에 말입니다! 제가 갑자기 왜 사루비아 님께….”
“농담이었는데. 마음대로 해.”
어차피 우리가 복구 작업을 하는 동안 마을 주민들은 집을 비웠으니 괜찮을 것이다.
그러나 카론은 여전히 안절부절못하며 내 눈치를 살피다가, 내가 마음대로 하라고 몇 번이고 손짓하고 난 뒤에야 양손으로 망치를 잡았다.
그리고 그는 아까부터 나무판자 위로 거슬리게 튀어나와 있던 못에 망치를 휘둘렀다.
쾅-!
한 번의 휘두름만으로 못은 안으로 깔끔하게 들어갔다.
‘…원래 저렇게 한 번에 들어가는 거였나?’
아닌 것 같은데?
내가 망치질을 해 본 적 없긴 한데, 그래도 망치질은 탕-! 탕-! 탕-! 하면서 못 하나를 여러 번 두드려서 박아 넣는 거 아니었나?
내가 어리둥절해하고 있을 때 이상한 기분을 느낀 건 카론 스스로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는 망치를 든 자신의 손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어쩐지 그 분위기가 묘해서 나는 먼저 말을 걸 수가 없었다.
‘설마 잊어버렸던 과거에 숨겨진 비밀이라도 있는 건 아니겠지? 엄청 어둡고 다크한?’
아냐, 일단 원작을 떠올려 보자. 원작에서의 카론은, 그러니까, 음….
‘정말 여주의 개 같았지.’
나쁜 의미가 아니라, 그는 정말로 ‘개’ 같이 굴었다.
원작에서는 그걸 남동생 같다고 포장했지만, 여주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눈이 동그래져서 달려오고 틈만 나면 여주를 졸졸 쫓아다니고 여주가 다치는 일이 생기면 위협적으로 구는 개 그냥 잘 훈련된 개 같았다….
‘다크한 과거 같은 건 나온 적도 없는데.’
좋아, 일단 다른 남주들과 카론의 태도를 비교해 보도록 하자. 기억을 잃어버린 카론이 달린에게 보인 태도가 다른 남주들의 것과 어떻게 다른지 확인해 보는 거야.
아퀼라는 달린에게 ‘사루비아를 닮았다’고 직접적으로 말했고. 윈터는 달린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꼬치꼬치 캐물으며 그녀를 지키려 했다. 특히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된다며 위험한 일들을 모조리 떨어뜨려 놨다. 예를 들면 총 같은 거.
그리고 이시나는… 원작에서 ‘사루비아는 중요하지 않지만 너는 중요하다’라는 태도였지. 나를 이전에 XX 빡치게 만들었던 바로 그 대사, ‘죽은 건 중요하지 않으니까.’가 바로 그를 보여 주는 예시였다.
마지막으로 카론은….
“저는… 저는 주변의 누군가가 죽는다는 거에 대해 어떻게 익숙해질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으음….”
“카론 님은 괜찮으셨습니까? 그러니까 그… 이전에 계셨다던 맞선임 분….”
“아, 사루비아 님?”
“예….”
“나는 괜찮아! 앞으로도 괜찮을 거야!”
늘 긍정적이고 밝은 카론은, 사루비아의 죽음에 대해서도 씩씩하게 이겨 내는 모습을 보여 줬다.
‘…감히 멋대로 내 죽음을 이겨 내? 생각해 보니까 XX 빡치네.’
아냐, 이미 끝난 일이지. 좋아, 진정하자….
어쨌든 그래서 카론은 사루비아의 죽음에 느낀 상실감보다는, 사루비아를 닮은 달린을 반가워하고 지켜 주려는 마음이 더 컸다.
심지어 그가 달린을 얼마나 좋아했냐면.
“그러고 보니 카론 님도 진급이 얼마 안 남으셨지 않으십니까?”
“응, 맞아! 나도 곧 지휘사관이야.”
“그럼 이 부대를 떠나시는 겁니까?”
“음…. 그건 싫은데.”
“예? 아, 지휘사관도 이 부대에서 하고 싶다는 겁니까? 윈터 님도 그런 거라고 들었는데!”
“맞아, 나는 계속 이 부대에 있고 싶어.”
“헤헤, 그래도 제대는 하실 거 아닙니까!”
“제대하기 싫은데.”
“…예?”
“제대하기 싫어. 계속 이곳에 있으면 안 되나?”
‘진짜 미친 거 아니냐?’
카론은 계속 이 부대에 있고 싶다고 했다. 달린이 있는 부대에!
원작 소설의 제목이 ‘네 명의 미친놈들이 나한테 집착한다’였던 의미를 이제야 알 것 같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원작 카론이 제대로 돌아 있었다는 것만큼은 알겠다.
아니, 사랑 때문에 제대를 하기 싫어?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거 아니냐?
심지어 그때의 독자들은 ‘헐ㅠㅠㅠ 여주 때문에 제대도 하기 싫대ㄷㄷ 찐사랑’ 이 정도의 반응을 보였는데, 그 독자들은 전부 미필이었음이 틀림없다.
그건 ‘찐사랑’이 아니라, ‘찐광기’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혹시 정신 건강이 안 좋아서 그랬나?’
갑자기 카론이 너무나도 걱정스러워서, 나는 조심스럽게 카론의 이름을 불렀다.
“카론, 혹시 너 제대하기 싫니?”
“예? 저 안 미쳤습니다!!”
“그래, 다행이다….”
망치를 들고 이상한 표정으로 서 있던 카론이 갑자기 정상적으로 기겁하는 얼굴을 했다. 원작이랑 다르게 아직은 멀쩡하군.
아무튼, 결론적으로 원작에서 카론은 어둡고 다크한 모습을 보여 준 적이 없다. 어둡고 다크한 과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기억 상실’ 요소는 ‘짜잔! 사실 카론은 어두운 과거가 있는 캐였습니다! 깜짝 놀랐죠~?’를 위한 설정이 아니라, 그가 사루비아와 친했던 이유와 늘 티 없이 맑은 이유를 설명하기 위한 설정이었다. 그의 과거가 뭐였는지는 원작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럼 망치를 들고 뭔가 기억난 것처럼 행동하는 건 왠데?’
내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카론과 망치를 번갈아 보고 있을 때, 갑자기 대문 너머로 산체스의 얼굴이 불쑥 튀어나왔다.
“뭐야? 놀랐잖아!”
“패티와 매티가 강에 빠져서 대신 일을 도우려고 왔습니다.”
“…그, 그렇구나.”
진짜 미친 XX들 아니냐? 대체 물을 어떤 방식으로 떠야 두 번씩이나 강에 빠질 수 있는 거냐고.
나는 산체스가 들고 있던 양동이를 바닥에 내려놓으라고 손짓한 후, 다시 카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몇 번만 더 쳐 봐. 뭔가 기억날지도 모르잖아.”
가족과 지냈던 기억이 드문드문 있다고 했는데, 사실 목수 집안이었던 건 아닐까? 그렇다면 망치를 치는 행위가 그의 기억을 되찾는 일에 도움을 줄 것이다.
“제가 뭘 치면 되겠습니까?”
“음….”
주위를 둘러봤지만 더 이상은 튀어나온 못 같은 게 보이지 않아서 나는 너덜너덜하게 튀어나와 있던 나무판자 하나를 가리켰다.
“그냥 저거 뜯어서 쓰자. 어차피 없는 게 깔끔해 보이니까, 집수리하면서 뜯었다고 하지, 뭐.”
카론은 내 말에 충실하게 나무판자 하나를 뜯어내 바닥에 내려놓았고.
다시 망치를 든 그의 팔이 휘둘러졌다.
탕-!
“…음.”
나무판자는 박살 나 있었다.
그 정도로 그쳤다면 이종족의 힘으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기에 놀라지 않았겠지만….
“강하군….”
바닥에 깔려 있었던 돌들까지 완전히 박살 나 있었기에, 나는 몹시 당황스러워졌다. 저걸 어떻게 수습하지? 집주인한테는 뭐라고 말하지?
카론은 원작 남주들 중에서도 체력이 좋고 힘이 강하다는 식으로 묘사되어 있었지만, 이렇게 보니 내 생각보다 훨씬 강한 것 같았다.
지금의 카론은 평범하게 오러를 담은 검을 사용해 전투했고, 우수한 실력이기는 했지만 부대원들 중 빼어나게 특출하다고는 볼 수 없었다.
그랬기에 그의 실력을 대단하게 여기지 않고 있었는데, 저 힘을 보니 확실히 나와 기본적인 신체 능력 자체가 다른 모양이다.
“오, 대단하십니다.”
그때, 내가 잠시 잊고 있었던 산체스가 감탄하는 목소리를 냈다. 내가 그를 보며 설명하라는 눈짓을 하니, 산체스가 카론을 유심히 쳐다보며 천천히 말했다.
“지금 보니 굉장히 망치를 잘 다루시는 것 같습니다.”
“…내가?”
오히려 카론은 떨떠름한 목소리였다.
“그냥 힘으로 박살 낸 거 아니야?”
“아닙니다. 제가 보았을 때는 망치를 휘두르는 자세가 힘을 싣기에 최적화되어 있었습니다. 입대하기 전에 망치를 오래 쓰셨던 거 아닙니까?”
“글쎄….”
혼란스러운 얼굴이 된 카론은 내게 도움을 구하는 눈빛을 했다.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얘기가 나오면 카론은 언제나 저런 눈으로 나에게 의존하고는 했다.
‘산체스는 카론에 대해 모르니까.’
그는 카론이 기억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저런 말을 하는 거겠지.
결국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카론의 어깨를 토닥여 주며 내가 입을 열었다.
“음, 뭐, 네 말이 맞아. 산체스 네가 보기엔 카론이 예전에 망치를 왜 썼을 것 같은데?”
“그거야….”
산체스가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맘에 안 드는 놈을 부수는 데 쓰시지 않았겠습니까.”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