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우리는 산에서 내려온 후, 마을 하나를 지나 걷고 또 걸었다.
지금 우리가 지나가는 마을은 완전히 평범한 시골 농촌 마을이었기에 내가 기대했던 로판 모습은 아니지만, 음, 그래도.
“행복해 보이네.”
적어도 우리보다는 나아 보였다….
나는 피해를 복구하고 있는 마을 사람들을 쳐다봤다.
그들은 구슬땀을 흘리며 일하고 있었지만, 그것보다도 내 눈에 들어온 건 그들 주위에 있는 가족들이었다.
언제 옆에 있던 전우가 죽어 나갈지 모르는 내 아포칼립스 세계와 달리, 신뢰할 수 있는 가족이 있고 머물 수 있는 안정적인 공간이 있는 그들의 소박한 일상 세계는 너무나도 좋아 보였다.
내가 앞으로 걸으면서도 옆을 흘끗흘끗 쳐다보니, 뒤를 돌아 부대원들을 확인하던 윈터가 내 이름을 불렀다.
“사루비아, 앞.”
“아, 죄송합니다….”
“…아니, 그런 의도는 아니었다.”
그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시선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짧게 덧붙여 말했다.
“신경 쓰지 마. 결국에는 너도 행복해질 테니.”
‘나도 곧 제대할 수 있다고 위로해 주는 거구나.’
하지만 제대가 일 년 반 남은 윈터가 사 년 반 남은 나에게 그런 말을 해 주니….
‘저 XX 지금 나 기만하는 거 아니냐?’
윈터, 남주력 –25.
그때, 마을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뭐야? 이종족이야?”
“국경방위군인 것 같은데.”
“얘, 눈 마주치지 마라.”
“쉿, 조용히 해. 괴물처럼 강하다는데, 다 들리겠어.”
‘…뭐지?’
나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렇지만 선임들은 마을 사람들의 저런 태도가 익숙한 듯,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원래 저래?”
내가 목소리를 낮추고 아퀼라에게 속삭이니, 그가 내게 고개를 기울이며 짧게 답했다.
“응, 원래 저래.”
“아.”
이종족이란 단어를 마지막으로 들어 본 지도 오래되었다.
우리끼리 있을 때는 아르콘이라는 말을 써서 잊고 있었는데, 맞아. 밖에서는 원래 저런 취급이었지.
아돌브 제국에서는 어린 이종족들을 그들과 이질적인 존재라 하여 껄끄러워했고. 국경방위군 생활을 마치고 온 이종족들은 괴물같이 강한 존재라 생각하여 두려워한다고 했다.
무시하거나 비웃는 것보다는 두려워하는 게 낫겠지만, 그래도….
“기분 나빠.”
저건 오로지 우리의 압도적인 무력으로부터 나오는 공포가 아니었다.
그들과 다른 존재. 그들이 알지 못하는 미지의 존재에 대한 공포 또한 그 안에 섞여 있었다.
밖에 나와서 이런 취급을 받아 보니, 제대한 다음에도 상황이 크게 다를 것 같지 않아서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아졌다.
지금까지 부대원들과 제대 후의 일을 얘기하던 것이 갑자기 의미 없게 느껴졌다.
이대로는 내가 밖으로 나가더라도 내가 원하는 것들을 전부 이루지 못할 것만 같았다.
“아퀼라.”
“응.”
“바깥의 사람들은 나를 싫어할까?”
아퀼라는 침묵했지만, 나는 그가 대답을 하거나 말거나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나는 그냥 평범한 게 좋아. 평범한 가족이랑 평범한 마을에서 평범하게 살고 싶어. 그런데 사람들은 나를 두려워할까?”
이전 세계에서의 나에 대해 기억하던 단 하나의 정보를 스스로 버린 이후로 이미 난 이 세계의 사람이 되어 버렸는데.
이 세계에서조차 나를 배척하는 걸까?
그리고 내 말에 대답한 건 바로 옆에 있던 아퀼라가 아니라 우리들의 뒤에서 걷고 있던 이시나였다.
“부정적인 생각하지 말고.”
이시나가 내 어깨에 손을 얹고 가볍게 토닥이며 말했다.
“왜 그렇게 생각해, 사루비아, 응? 누가 널 싫어한다고.”
“하지만 제국민들이….”
“괜찮아, 그런 사람들은 많지 않아. 수도만 해도 인식이 많이 개선되고 있고, 아무도 널 안 싫어할 거야.”
내가 그 말에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도 조금 기분이 나아짐을 느꼈을 때, 이번에는 아퀼라가 느리게 말했다.
“그래, 괜찮아. 다 이뤄질 거야.”
“응.”
“가족도, 마을도, 삶도. 전부 이뤄 줄게.”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퀼라가 하는 말은 언제나 신뢰가 갔다.
‘원작 남주1이라 그런 건가? 신뢰의 아이콘이라?’
왠지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내가 바라던 것들이 전부 이뤄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나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XX….”
조금 뒤 도착한 옆 마을.
삽으로 흙탕물을 퍼내는 내 입에서는 계속해서 욕설이 쏟아져 나왔다.
“아오, XX…. 검보다 삽을 더 많이 든 것 같네.”
“확실히 그건 맞습니다.”
내 옆에서 삽질하던 카론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검을 들고 싸우는 것보다 삽을 들고 싸울 때 더 잘 싸울 것 같습니다.”
“그거야 삽을 든 시간이 두 배쯤 되니까.”
우리는 집 안으로 들어온 흙탕물을 밖으로 퍼내고, 바로 근처에 있는 강에서 길어 온 물로 집 안을 씻어내고 있었다.
아돌브 제국이 침수 피해에 대한 복지를 이렇게나 잘해 주는 국가라는 게 정말 놀랍다. 참 살기 좋은 국가네.
그 복지를 우리가 해 줘야 한다는 게 문제지만, XX.
“무, 물 길어 왔습니다, 허억….”
“오케이, 그냥 제이슨, 다음 물통 뜨러 출발.”
“네, 넵…!”
그러나 이렇게 집에서 흙탕물을 퍼내고 물로 헹구고 있는 카론과 내 처지가, 제이슨네 기수보다는 나은 편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강에서 물을 길어 오려 무거운 물통을 지고 들락날락해야 했으니까.
우리는 적절히 인원을 나눠 각 집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이 집에서 일하고 있는 카론과 나, 그리고 제이슨과 패티와 매티였다.
“탈영하고 싶다….”
“옳은 말씀이십니다….”
마지막으로 흙탕물을 퍼낸 카론이 삽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자신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우리의 손은 이미 흙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기에 그의 이마에는 흙이 더 묻을 뿐이었다….
“흙 묻었다. 닦고 와.”
“거울 있으십니까?”
“있겠냐?”
카론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기에, 나는 손을 들어 집 바깥을 가리켰다.
“…문 앞에 물 고인 곳이 있는데, 거기 얼굴이라도 비쳐 보든가.”
“아하! 정말 좋은 생각이십니다!”
내 말을 듣고 망설임 없이 바로 물이 고인 곳으로 달려가던 카론이, 갑자기 걸음을 우뚝 멈췄다.
“카론, 왜?”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카론은 담벼락 너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꼭 그곳에 무언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아, 무슨 일인데?”
“별건 아니고, 그저….”
카론이 스스로의 생각에 잠긴 듯한 목소리로 느릿느릿 말했다.
“뭔가… 이 마을 풍경이 묘하게 익숙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
잠깐만, 이 상황은 설마.
“혹시 잊어버렸던 기억과 이 장소가 관련 있는 거 아니야? 기억 속에 이 마을이 있다든가.”
“그렇지만 이 마을은 꽤 흔한 풍경이니까, 확실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흠.”
사실 카론이 처음 입대했을 때 우리가 걱정했던 것과 달리, 그는 잃어버린 기억이고 뭐고 이 부대에 아주 잘 적응한 상태였다.
오히려 아예 백지 상태여서 그런지 국경방위군의 부조리함을 크게 느끼지도 못하는 듯했고, 선임들이 가르쳐 주는 것을 빠르게 학습해 나갔다.
그래서 카론에 대해서는 그동안 나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었는데….
‘이거 떡밥 같은데.’
나는 이 세계가 소설 속이라는 걸 잊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일반적인 소설의 전개를 떠올렸을 때, 아무리 생각해도 이 마을이 카론의 원래 기억과 관련되어 있는 게 확실하다.
“그럼 이 마을의 특이점이 뭔지 알아보고, 네 기억에 있는지 확인해 볼래? 예를 들어 이 마을의 특산물이라든가.”
쾅-!
“큰일입니다!”
그때, 제이슨이 대문을 쾅 소리가 나도록 박차고 들어오며 우리의 대화를 끊어 놓았다.
“아, 또 무슨 일인데?”
“패티와 매티가 물을 길어 오려다 강에 빠졌습니다!”
“아오, 수영 배웠잖아?!”
“그런데 떠 있기만 하고 강 밖으로 헤엄을 못 쳐 나오길래….”
“진짜 미친 XX들 아니야?! 에휴, 이 짬에 내가 걔네까지 구해 와야겠냐? 빨리 네가 건져 와!”
“네, 넷슴다!”
제이슨이 다시 부리나케 뛰어가는 모습을 보며, 나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에휴…. 좀 진지해져 보려는데 하여튼 후임들은 도움이 안 돼.
* * *
“이시나 님, 왜 저희가 마물과 상관없는 이런 일까지 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다음 집으로 이동하며 만난 이시나에게 내가 한 말이었다.
그러자 이시나는 마치 해탈한 듯 은은한 미소를 얼굴에 띠었다.
“응, 사루비아, 논리를 버리면 돼.”
“아하.”
“원래 국경방위군은 논리 따위 없는 세계야. 왜 네가 이 일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지 말고, 모범적인 선임 분들을 보렴.”
그렇게 말한 이시나가 미친 듯이 도로를 청소하고 있는 블레어와 토피오를 가리켰다.
“아오, XX!”
“죽어, XX!”
그들은 미친 듯이 욕을 쏟아내고 있었지만, 동시에 이 부대의 누구보다도 머리가 개운해 보였다.
…그래, 저런 게 바로 모범적인 군인의 자세군.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시키는 일을 해야 하는 거였어.
“그럼 그쪽만 작업하고 다시 만나자.”
“예, 수고하십시오…. 아!”
카론과 아까 전 이 마을과 그의 기억에 대해 얘기하던 것이 떠올라, 나는 반짝이는 눈으로 이시나를 보며 물었다.
“이시나 님, 혹시 이 마을의 특산물이 뭔지 아십니까? 아니면 이 마을만의 특이한 점이라든가.”
“특이한 점? 그런 건 왜?”
“그, 그냥 궁금해서 말입니다. 외부로 나오는 건 오랜만이니까….”
“글쎄….”
이시나가 무언가를 간파하고 있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오랜만에 흑막 같은 눈빛을 했다는 의미였다.
‘…그래도 이시나는 이제 내 편이니까, 뭐.’
그 부드럽지만 어쩐지 오싹한 눈빛 앞에서도 난 딱히 긴장이 되지 않았다. 생각에 빠져 있는 듯했던 이시나가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이 마을에서 유명한 거라면, 아마….”
“예! 이 마을의 특산물이 뭡니까?”
“흑마술사 정도?”
“잘 못 들었습니다…?”
도대체 저게 뭔 소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