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네 명의 미친놈들이 나한테 집착한다』 원작의 비밀
사루비아가 죽었다.
밀피와 베니, 제이슨이 오열하고.
블레어와 토피오도 어쩐지 슬프게 느껴지는 욕설을 해 대고.
패티와 매티는 처음으로 사고를 치지 않고.
윈터는 모든 걸 잃은 얼굴로 자신의 숙소에 틀어박혔으며.
카론이 어린애처럼 엉엉 울기를 반복하고.
아퀼라는 공허한 눈빛을 하다가 몰래 눈물을 흘리기를 반복하던 그 나날들 속에서.
이시나는 홀로 멀쩡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는 늘 평소와 같아 보였다. 다정하고 친절해 보이는 얼굴.
그러나 단언컨대 부대원들 중 속마음이 가장 격동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건 이시나였다.
사루비아가 죽은 뒤에야, 그는 깨닫고 말았다. 그가 사루비아를 소중히 여겼다는 사실을.
“내 실수였어….”
이시나가 여전히 다정한 얼굴을 한 채 중얼거렸다.
그의 실수로 잃고 나서야 깨닫고 말았다. 생전 처음으로 잃고 싶지 않은 것이 있었는데, 잃고 나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의 머릿속에 3년 동안 함께했던 사루비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진짜 말 안 들었지….”
매사에 눈치 빠르고 강한 것처럼 행동했지만, 자꾸 아퀼라와 윈터 사이에서 순진무구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자신을 답답하게 만들던 애.
그리고 사루비아는 어쩐지 자신의 생각을 이상하게 오인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전에 이시나가 그녀에게 다른 사람들의 죽음이 자신은 별로 슬프지 않다고 말을 흘렸던 적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 사루비아는 이시나를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비윤리적인 일도 할 수 있으며 피도 눈물도 없는 매정한 사람’ 정도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맞아, 그랬었지….’
그때는 그게 답답하면서도 웃기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시나는 입꼬리를 올려 더욱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 우리 이렇게 하자, 사루비아.
네가 나를 그런 사람으로 여겼다면 나는 네가 생각한 그대로 행동해 볼게.
네가 생각하는 나라면, 이 상황 속에서 어떻게 행동했을까?
이시나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그는 입대하기 전 주워들은 모든 지식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바로 그 단어였다.
‘흑마술.’
그래, 분명히 죽은 사람을 불러오는 종류의 흑마술이 있다.
…알타이르가 죽었을 때 유리가 그것과 관련된 자료를 찾아보다가 파기했고, 폐기물을 처리하는 담당이 이시나이니 그는 그 방법까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이용할 수 있을 사람들의 명단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우선 산체스가 필요하겠지.’
그는 흑마술사와의 연결을 도와줄 것이다.
‘그다음으로는 베니가 필요할 거고.’
베니는 산체스의 통제를 도와줄 거고, 무엇보다도 이시나가 아는 베니라면….
‘가끔 힘든 일이 있을 때 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중얼거렸고. 아버지는 어떻게 계속 제대하지 않을 수 있는 거냐고 혼잣말한 적도 있고. 그렇지만 부대원들에게는 아버지가 평범한 상인이라고 말했으니까….’
베니의 아버지는 아마도 장성일 것이다. 정체가 밝혀지면 이 부대에 혼란을 불러올 수 있는.
그렇다면 베니가 흑마술사와의 소통 또한 도와줄 것이다. 그녀가 정체를 드러낸 후 외부에 편지를 보내고 싶다고 하면 감히 그 어떤 간부도 그녀를 말릴 수 없겠지.
그리고 마지막. 굳건한 의지를 가지고 이 어려운 계획들을 실행시켜 줄 사람.
“아하.”
결론은 금방이었다.
그는 사루비아의 죽음으로 지금 단단히 돌아 있는 사람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하여 그는 얼마 뒤, 아퀼라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퀼라, 사루비아를 다시 보고 싶지 않니?”
사루비아를 향한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내가 방법을 알려 줄게.”
사루비아가 그저 예전과 같이 웃는 얼굴을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을 답답하게 만들어 놓고 그 앞에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눈을 깜빡일 수만 있다면.
자신의 일상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아퀼라, 흑마술사에게 의뢰를 하는 거야….”
사루비아, 괜찮아. 나는 언제까지나 네 머릿속에 있는 범위를 벗어나지 않을 테니까.
“흑마술사에게 소통하는 문제는… 너, 베니의 아버지에 대해 알고 있니?”
나는 네가 원하는 대로 행동해 줄게.
우리는 언제나 변하지 않을 거고.
우리는 계속 함께일 거야.
그 후, 예상하지도 못했던 달린이라는 신병이 등장하고, 이시나의 계획은 더욱 완벽해져 갔다.
“달린, 그렇게까지 해 줄 필요 없어. 죽은 건 중요하지 않으니까.”
그래, 죽은 건 정말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사루비아가 죽었다는 사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건 곧 무의미해질 일이었다.
이시나는 ‘사루비아의 죽음’에 괴로워하지 않았다.
결국에 모든 건 제자리로 돌아올 테니까.
#9. 자연재해는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있다
제대 D-1644일.
내가 원작의 죽음을 피한 이후로도 반년이 더 흘렀다.
물론 이 XX 국경방위군은 매일매일 새로운 사건이 펑펑 터졌고, 그때마다 나는 이 미친 곳에서 탈영하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야, 뭘 멀뚱멀뚱 있어? 일 안 하냐?”
“넷슴다….”
물론 내가 진짜로 탈영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뭐, 남주들이 갑자기 나한테 집착하는 일 따위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루비아, 비품 목록 좀 확인해 주겠니?”
“아, 이시나 님. 알겠습니다.”
“그리고 수량 표시할 때 단위 꼭 주의해서 맞춰 줘.”
이시나의 눈은 내 얼굴이 아니라 그가 들고 있는 종이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이시나의 머릿속에는 일밖에 없구나….’
역시 로맨스 전개는 전혀 벌어지지 않았다….
‘그냥 제대하면 돈이나 받아서 얌전히 살아야겠다….’
그래, 정말 얌전히, 얌전히 살아야지.
이 미친 이세계에서 살다 보면 안정성을 찾아 떠나고 싶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내가 생각에 잠겨 있는 그때, 중대 본부 건물에서 막 나온 베니가 즐거운 얼굴로 내게로 다가왔다.
한창 삽질을 하던 나는 고개를 들며 베니와 눈을 마주쳤다.
“기분 좋아 보인다?”
“아, 그래 보이십니까?”
어느새 많이 길어 어깨를 살짝 덮는 갈색 머리를 찰랑거리는 베니는 즐거운 얼굴이었다.
왜냐하면 베니는 오늘 일등병으로 진급했으니까.
‘나도 저 때는 신났었는데.’
하지만 이제 진급은 함정이라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앞으로 경계 근무 고생해라. 네 실력이면 뭐 죽지는 않겠지만, 안 그래? 하하.”
“하… 하하하….”
아, 그리고 베니가 일등병으로 진급한 것 말고 또 다른 변화가 있었는데….
상등병의 수가 워낙 적은 탓에 아직 일등병인 이시나는 상등병 일을 하게 됐다.
“사루비아, 훈련 있는데 집합 좀 시켜 줄래?”
“아, 넷슴다.”
그는 후임 관리에 열중했고 나도 그가 시키는 일을 성심껏 도왔다.
드림과 캐롯에 이어 어제 엘이 진급하여 부대를 떠나면서, 우리 소대의 상등병이라고는 블레어와 토피오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얼마 전 인수인계를 받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시나는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보였다. 오죽하면 윈터가 그들의 일을 도와줄 정도로.
‘바쁘긴 해도 잘된 거겠지.’
주변 선임들은 이시나가 ‘기수가 풀렸다’라고 했는데, 그건 근접 기수 선임이 얼마 없고 후임들이 많다는 의미였다. 당연하지만 그건 좋은 일이었고.
사실 아퀼라와 나도 기수가 꽤 풀린 편이었는데, 우리도 아마 곧 상등병 일을 시작하게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이렇게 기수가 풀린 건 우리 근접 기수의 선임들이 모두 죽어 나갔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상기해 보면 영 좋아할 수는 없다….
‘이 XX 아포칼립스 세계가, 진짜….’
푹-! 푹-!
내가 분노에 차 열정적인 삽질을 시작했을 때, 날 발견한 카론의 얼굴이 환해졌다.
“사루비아 님!”
“야, 야, 잠깐만!”
나는 달려들다시피 내게 다가오는 카론을 보며 뒷걸음질 쳤다.
“멈춰, 멈춰!”
“넵!”
아직도 성장기인 건지, 카론은 계속해서 커 가고 있었다. 카론을 제외한 원작의 세 명의 남주들 중 가장 키가 큰 건 윈터였는데, 이제 카론의 키도 그와 비슷해졌다.
그러나 얘는 자기 덩치를 모르는 건지 아직도 해맑게 웃으며 졸졸 따라다니고는 했다.
“아, 애들 좀 소대 뒤 연병장으로 집합시켜 놓으라셔.”
“넷슴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시나의 지시를 얼른 카론에게 토스했다. 역시나 내 말을 아주 잘 듣는 카론은 소식을 전하러 곧장 사라졌다.
‘그래도 요즘은 좀 평화로운 것 같아.’
생각해 보면 매일 말도 안 되는 일들이 터지는 이 좌충우돌 세계관에서 근래는 꽤 평화로웠던 것 같다.
나는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가….
‘잠깐, 나 방금 스스로 플래그를 꽂아버렸잖아?’
XX, 또 무슨 일이 터지겠지?
뭐지? 이번엔 뭐지?
* * *
“외부 근무를 나가게 됐다.”
‘XX.’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근무’라는 단어가 존재하는 이상 저게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니라는 것만은 알겠다.
윈터의 설명에 따르자면 ‘외부 근무’란 말 그대로 외부에서 하는 근무인데, 국가가 인력을 필요로 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동원되는 것이라 했다.
물론 그런 특별 근무를 나간다고 해서 국가가 우리에게 특근비를 주는 것도 아니고, 우리는 그냥 외부로 나가기 위한 왕복 시간만 더 소요하게 될 뿐이다.
내가 입대한 이후로는 한 번도 진행되지 않은 근무인데, 다시 외부 근무를 나가는 건 그도 오랜만이라고 한다.
“XX, 밖으로 나가야 한다니….”
나는 울적한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렸다가.
“…잠깐, 여기 너무 오래 있었더니 내 뇌가 어떻게 된 거 아냐?”
내가 멍청한 소리를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후 옆에 있던 아퀼라를 탈탈 흔들어 대며 외쳤다.
“외부래! 밖으로 나간대!”
물론 일하러 나가는 거지만! 휴가조차 없는 이 미친 곳에서! 삼 년 반 만에 처음으로 나갈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바깥 공기래!”
이 상쾌하고 맑고 푸르른 숲의 공기 대신, 오염된 도시의 공기를 느끼고 싶다!
골목에는 엑스트라 시정잡배들이 여주와 남주의 두근두근 이벤트를 만들어 주기 위해 대기 타고 있고! 시장에서는 꼬치를 팔고! 귀족을 위한 화려한 드레스 숍과 디저트 카페가 존재하는!
바깥세상으로 나간다!
“그래, 바깥세상…!”
이 미친 네미집 세계에 빙의한 후 나는 황성도 보지 못했고, 공작성도 보지 못했고, 아카데미도 보지 못했고, 신전도 보지 못했다.
고아원에 며칠 처박혀 있다가 계약 마법이 발현되자마자 덜컹이는 마차를 타고 여기까지 끌려온 건데.
드디어 로판 월드의 바깥세상을 볼 수 있다니, 눈물이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너무 신나…!”
“신나?”
“응, 드디어 이 미친 아돌브 제국민들은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볼 수도 있고, 이 제국의 건축풍이 어떤지도 궁금하단 말이야. 그리고….”
내가 기분이 좋아지면 언제나 그렇듯이 쫑알대며 말을 늘어놓고 있을 때, 지친 얼굴의 이시나가 불쑥 나타났다.
“너희, 외부 근무 얘기하고 있었니?”
“아, 이시나 님. 일은 마치셨습니까?”
“아니. 지금도 일하러 가는 중인데.”
“수고하십시오….”
상등병 일을 맡게 된 후 이시나는 어째 이전보다 더 피곤해 보였다.
“아, 그런데 너희 외부 근무를 왜 나가는 건지는 아니?”
“그건 아직 전달 못 받았습니다.”
“그게, 무슨 일이냐면….”
이시나는 평소의 사근사근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번에 폭우가 쏟아져서 마을에 침수 피해가 심하다고 하더라고. 복구 작업을 도와주러 가는 거야.”
“…아하…. 그럼 지금 마을은 완전….”
“응, 흙탕물 밭이지.”
“아하.”
에휴, 이럴 줄 알았어. 내 인생이 이렇게 잘 풀릴 리가 없지.
외부 근무를 나간 나를 기다리는 것은 내가 기대했던 로판 세계의 풍경이 아니라 흙탕물에 뒤덮인 마을일 것이다, X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