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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집착보다 내 탈영이 빠르겠다 76화 (94/233)

이시나는 인간관계에마저 욕심을 부리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빠르게 포기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가 마침내 국경방위군에 입대했을 때.

“아, 동기들이 전부 죽었습니까?”

동기들이 죽었을 때도 이시나는 담담했다. 애초에 받아들인 적이 없는 관계였으니까.

“맞후임들이 죽었습니까?”

사루비아와 아퀼라를 제외한 맞후임들 여섯 명이 죽었을 때도 그는 담담했다.

데닌이 죽었을 때도 그는 담담했고.

도리가 죽었을 때도 그는 담담했으며.

그 누구의 죽음에도, 그는 아무런 슬픔을 느끼지 못했다. 그들은 이시나에게 있어 책 속 등장인물 정도의 비중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때, 사루비아가 그에게 그 질문을 했을 때.

“제가 죽으면 어떠실 것 같습니까?”

사루비아는 그에게 있어 지지리도 말 안 듣는 맞후임쯤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물론 그녀가 실제로 이시나의 말을 듣지 않은 건 아니었고, 오히려 사루비아는 이시나를 좋은 선임으로 여기고 잘 따라다녔지만….

“아퀼라, 왜 그래?”

“이시나 님이면 당연히 알고 계실 거지 말입니다!”

가끔 그가 눈앞에서 아퀼라와 자신 모두를 답답하게 하거나, 자신의 성격과 속마음을 뭔가 이상하게 오해할 때는 정말 속 터지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서 늘 철없는 맞후임쯤으로 여겨지던 사루비아가, 자신을 정확히 꿰뚫는 질문을 했다.

“이시나 님은 감정에 있어서 깔끔한 편이시니까….”

‘알고 있었어.’

이시나 자신이 주변 사람들에게 아무런 애정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사루비아는 늘 웃는 얼굴로 이시나를 대했다.

‘어떻게 지금까지 그랬을 수가 있지?’

바보같이 착한 건지, 속이 없는 건지.

순간 사루비아와의 관계가 틀어질 것을 알면서도, 이시나는 그녀를 내치고 도망치듯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후, 사루비아가 죽음의 위기에서 겨우 살아 돌아왔을 때.

눈물과 흙 범벅이 된 사루비아의 얼굴을 본 순간, 이시나는 깨닫고 말았다.

‘포기 못 해.’

그는 모든 것에 포기가 빨랐다. 그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욕심을 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사루비아의 존재를 지나치게 익숙하게 여기고 말았다.

늘 자신의 속을 뒤집어 놓는 사루비아가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그거야말로 정말 속이 뒤집혀서 미쳐 버릴 것 같았다.

‘포기할 수 없어.’

사루비아가 죽더라도, 그는 이 관계를 이전과 같이 무감각하게 끊어 낼 수 없을 것이다.

“사루비아, 미안해….”

그제야 엉엉 우는 사루비아의 얼굴을 닦아 주며 이시나는 몇 번이고 사과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면서도 이렇게 자신을 잘 따르던 애를, 언제든지 끊어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제 잘못이었다.

이시나가 지금까지 보아 온 사루비아는 사나워 보여도 사람 하나하나에 간절한 애였다.

아무리 으르렁거려도 그녀는 후임들이 뭔가 곤란을 겪고 있으면 은근히 다가가서 도움을 주고는 했고, 꼭 그들을 먼저 완전히 저버릴 수는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녀는 사람에 굶주려 있었다. 정작 본인은 모르는 편이었지만.

이시나가 어떤 사람인지 사실 알면서도 그에게 친하게 지내자며 달라붙을 수 있을 정도로.

‘그 애를 가만히 둘 수 있을까?’

물론 그는 그 답을 알고 있었다.

그는 결코 사루비아를 버릴 수 없다.

사루비아는 그가 어떤 인간인지 알면서도 그에게 다가왔고, 그렇다면 이시나도 절대 그녀를 놓아주지 않는 쪽이 맞을 것이다.

사루비아는 그가 생전 처음으로 가지게 된 욕망이었고, 생전 처음으로 욕심내게 된 사람이었다.

* * *

너덜너덜해진 몸과 정신으로 부대에 도착한 뒤, 부대원들은 다들 기진맥진하여 드러누워 있었다.

나는 한쪽에 가방을 내팽개친 채 천장을 보고 바로 드러누웠다. 이불이 깔리지 않은 곳에 누운 탓에 등이 배겨 왔지만 이제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고개만 돌려 주변을 쳐다봤다가, 베니만 있고 에인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죽었니?”

“예?”

베니가 이해하지 못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신병이 안 보이길래.”

“심부름 갔습니다만…. 모습이 안 보인다고 죽었다고 생각하는 건 너무하시지 않습니까…?”

“오, 살았구나.”

나는 감탄했다. 그 난리통 속에서 살아남다니.

그리고 나는 그동안의 내 태도를 반성하기로 했다.

물론 이곳에서 제정신으로 버티기 위해서는 누가 죽어 나가든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단단해지는 게 맞지만, 그래도 누가 죽든 말든 그러려니 했던 내 태도는 너무한 것 같았다. 죽음의 문턱을 밟고 살아 돌아온 후에야 나는 그것을 느꼈다.

‘이제부터 누가 죽으면 좀 슬퍼해 줘야지!’

남의 죽음을 내 힘만으로 일일이 막고 다닐 수는 없으니까, 뭐…!

* * *

어쩐지 무언가 다짐하는 듯한 표정으로 한 손을 꽉 쥐어 보이는 사루비아에게서, 베니는 익숙한 눈빛을 발견했다.

‘아하… 돌아왔네….’

베니가 지금까지 늘 보아 왔던, ‘약간 돌아 있는 눈빛’이었다.

어쩐지 이전보다 미묘하게 더 돌아 있는 것 같긴 했지만, 그래도 베니는 사루비아가 기운을 되찾았다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 * *

고스트그룸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놀랍게도 우리 소대의 병사들은 한 명도 죽지 않았다!

감마 소대에는 사망자가 많이 나와서 좀 뒤집어진 것 같다지만… 어쨌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토벌이 끝난 뒤에 몇 가지 변화가 생겼는데, 그건 바로 이시나가 무기를 바꾼 것이었다.

“앞으로 총을 쓰기로 하신 겁니까?”

요즘 이시나는 총을 연습하고 있었다. 원작 남주답게 처음치고는 대단한 솜씨였고, 이전에 사용하던 검보다 더욱 잘 쓰는 것 같기도 했다.

원작에서의 이시나는 총을 썼는데, 사실 그도 사루비아가 죽은 일을 기점으로 무기를 바꿨던 걸까?

‘원래 남주들은 처음 하는 것도 뭐든지 다 잘하니까, 뭐.’

“응, 앞으로는 총을 쓰려고. 아, 지금 내 자세가 괜찮은지 봐줄래?”

그날 나를 붙잡고 미안하다는 말만 끝없이 반복하던 이시나는 이제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나를 대할 때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왜 총으로 바꾸신 겁니까?”

그가 사격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며, 나는 그가 주특기를 바꾼 이유를 물었다. 이시나가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 소대에는 사격수가 두 명밖에 없으니까, 좀 위험해지는 것 같더라고.”

“아하….”

이번 토벌에서 나와 엘이 위험에 처했던 일을 두고 말하는 게 틀림없었다.

“또 총을 쏠 때는 검을 쓸 때와 다른 위험 변수가 존재하니까, 모든 위험 요소를 이해해 보려고 하고 있어.”

솔직히 그의 의도를 별로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나는 이시나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루비아.”

옆에서 나와 함께 이시나를 지켜보던 아퀼라가 내 이름을 불렀다.

“응?”

“추워? 몸이 차가운 것 같은데.”

“그래?”

내가 아무 생각 없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정말 차가운지 만져 보라는 의미였다.

아퀼라가 내 손을 붙잡고 자신의 온기를 언 손을 녹여 주고 있을 때, 이시나가 끼어들었다.

“아퀼라.”

“…예.”

“중대 본부 관련해서 할 이야기가 있는데, 잠깐 이야기 좀 하고 올까?”

“넷슴다.”

아마도 저건 내가 듣기를 원하지 않는 이야기를 하자는 의미일 것이다. 예전에 유리가 핑계를 대고 베니를 내보냈던 거나, 베니가 핑계를 대고 에인젤을 내보냈던 것과 꼭 닮아 있었으니까.

아퀼라는 이시나의 말에 탐탁지 않은 얼굴을 하고 그를 따라 사라졌다. 나는 그들이 사라진 자리를 허망한 눈으로 쳐다보기만 했다.

“대체 뭔지 모르겠단 말이지.”

이게 토벌 이후로 생겨난 두 번째 변화였는데, 어쩐지 아퀼라와 이시나의 관계가 미묘해진 것 같았다.

이전에는 괜찮은 맞선임과 맞후임 사이였는데, 음….

내가 죽을 뻔한 사건으로 이시나가 나를 진정한 인간관계에 받아들여 준 거라고 해도, 아퀼라와는 왜 반대로 멀어졌는지 모르겠다. 아니, 아퀼라가 일방적으로 이시나를 어려워하는 것도 같고….

“역시 모르겠다.”

나는 그냥 고민을 멈추고 막 경계 근무가 끝났을 카론과 놀아 주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오랫동안 놀아 주지 않아서 슬슬 토라져 있을 시기였으니까.

* * *

“아퀼라, 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

이시나는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게 진짜 웃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아퀼라는 잘 알고 있었다.

“적당히 좀 하라니까.”

그건 그가 사루비아의 손을 잡은 일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아퀼라는 그 말에 덤덤한 얼굴로 답했다.

“춥다고 먼저 손을 내밀어서 녹여 줬을 뿐이었습니다.”

“아니, 사루비아 쟤는 아무것도 모르잖아.”

그러나 이시나는 완강한 태도로 나왔다.

“사루비아가 너랑 같은 생각을 하는 거면 모르겠는데, 쟤 감정이랑 네 감정은 다른데 어떻게 그걸 그대로 둬, 응?”

원래는 사루비아가 뭘 하고 다니든 ‘에휴,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모드였던 이시나가, 토벌을 기점으로 사루비아를 싸고돌게 됐다는 사실은 아퀼라도 눈치채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맞선임인 탓에 아퀼라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제가 특별히 뭔가를 하려는 건 아닙니다.”

“지금 하고 있는 건 도대체 뭔데. 하아, 비록 사루비아가 말은 지지리도 안 듣는다지만, 그래도 네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애를 건드리려는 건 용납할 수가….”

“카론!”

그때 사루비아의 목소리가 들려서 그들은 동시에 뒤를 돌아봤다.

사루비아가 경계 근무를 마친 카론에게 크게 손을 흔들어 주고 있었다. 그러자 카론이 누가 보더라도 신난 얼굴로 사루비아에게 달려갔다.

“…쟤는 그대로 두실 겁니까?”

“카론은 뭐… 늘 아무 생각 없이 행동하잖아…. 너도 쟤는 경계 안 하잖아.”

“그건 그렇긴 합니다.”

아퀼라와 이시나는 카론에 대해 같은 평가를 내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만약 카론이 뭔가… 뭔가 다른 감정을 가지게 되면 어떡하실 겁니까?”

“글쎄…. 그런 일 없도록 네가 카론을 잘 제어하고 있는 것 같길래.”

“…알고 계셨습니까?”

“네가 카론을 챙길 이유가 없는데 챙겨 주는 게 이상하잖아. 그리고….”

이시나가 말을 이으려던 순간, 달리던 카론이 자신의 속도를 주체하지 못하고 사루비아를 쓰러뜨리다시피 하며 안겼기 때문에 그들은 일제히 그쪽으로 달려가야 했다.

“사루비아, 괜찮아?”

“카론, 그렇게 덥석덥석 안기지 말고! 사루비아가 네 덩치를 어떻게 감당해?!”

* * *

“어휴….”

나는 무릎에 힘을 주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나마 카론이 간신히 나를 붙잡은 덕에 그대로 넘어지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아퀼라는 흙먼지가 붙은 내 손을 털어 주려고 했으나, 이시나가 이상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자 행동을 멈췄다.

요즘 저 둘의 관계는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하.”

그때 뒤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서, 내가 미간을 찌푸리며 그쪽을 쳐다봤다. 왠지 방긋방긋 웃는 얼굴을 한 베니가 길을 지나가고 있었다.

“아, 요즘은 정말 군 생활이 즐겁다.”

…늘 그렇듯 베니가 알 수 없는 말을 했기에, 나는 그녀를 이해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 원래 천재란 이해할 수 없는 법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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