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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집착보다 내 탈영이 빠르겠다 75화 (93/233)

‘…이 가죽을 통째로 뚫어 낸 거야?’

머리와 목 부분을 아예 갈라 버린 것 같은데, 정말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나는 멍한 얼굴을 유지한 채, 고스트그룸을 죽인 사람, 윈터의 얼굴을 바라봤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그가 고스트그룸의 머리 위로 날아오듯 몸을 띄우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가 고스트그룸을 죽인 것 같았다.

잠시 후, 우리는 갈라진 틈을 통해 부대원들이 내려 준 밧줄을 통해 무사히 고스트그룸의 배 속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사루비아 님, 정말 걱정했습니다….”

“무사히 나왔잖아, XX! 하, XX 놀랐네….”

“헉, 아까 저희는 정말!”

“놀랐습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으십니까?”

선후임들의 쏟아지는 걱정 속에, 자리에 주저앉은 채 나는 미소 지으며 괜찮다고 답했다.

엘과 나를 구조한 뒤, 부대원들은 고스트그룸의 배를 갈라 이미 삼켜진 사람들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그들은 모두 사망한 상태였다. 원작의 사루비아가 사망했던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향료를 뿌리지 않아서 삼켜졌다면 죽었겠군.’

그 모습을 보며 내가 몸을 오소소 떨고 있을 때, 누군가가 내 팔을 탁 붙잡았다.

“너를… 너를 잃는 줄 알았어.”

“아퀼라….”

아퀼라는 그 뒤에도 한참 동안이나 말을 잇지 못하고 나를 꼭 붙잡고 있을 뿐이었다.

이전에 동기들이 죽었던 트라우마가 되살아난 것 같아, 나는 말없이 그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괜찮아. 난 절대 안 죽을 거거든. 죽는 건 XX 싫어….”

“제발, 제발 죽지 마….”

“응, 안 죽을게.”

내가 아퀼라를 달래고 있을 때 이제 내게 다가온 건 윈터였다.

“사루비아, 괜찮나?”

“예, 괜찮습….”

그리고 그의 말에 태연하게 답하려던 나는, 피가 줄줄 쏟아져 내리는 윈터의 오른손을 발견했다.

“…윈터 님?”

그제야 나는 윈터가 허리춤에 찬 검의 손잡이가 완전히 박살 나듯 망가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윈터….’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의 오른손을 건드렸다가, 내 손에 묻어난 그의 피를 보고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생각해 보면 윈터가 아무리 강하다 한들 수십 명의 부대원들이 고전하던 고스트그룸을 혼자서 쉽게 죽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우리가 고스트그룸 속에 있던 시간은 너무 짧았다. 그 빠른 시간 안에 고스트그룸을 혼자서 죽인 거라면….

단단한 피부에 힘으로 검을 박아 넣느라 손을 크게 다친 거겠지.

“괘, 괜찮으십니까?”

그 순간 윈터의 검에서 손잡이 부근이 완전히 떨어져 나가면서, 땅으로 그의 검이 추락했다.

‘대체 얼마나 힘을 줘야 저게 부서지는 거야…?’

내가 어쩔 줄 모르고 윈터의 손만 바라볼 때, 윈터가 여전히 차분한 어조로 답했다.

“괜찮다. 돌아가서 치료하면 금방 나을 거야.”

“이, 이렇게까지….”

“그래야만 하는 일이었으니까.”

“아….”

나는 가만히 윈터를 올려다보았다.

머릿속에 떠도는 말은 많았는데, 도저히 그중 무엇을 입 밖으로 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제 두려워하지 않아도 돼, 사루비아.”

나보다 더 크게 다친 사람은 자신이면서도, 윈터는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한 어조를 했다.

“앞으로 네가 이렇게 죽을 위험에 처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내가 약조하겠다.”

그는 그 어느 때보다 올곧은 눈을 하고 있었다.

“사루비아 님….”

내가 윈터와 아퀼라의 사이에 앉아 있기만 할 때, 아까부터 그 모습을 흘끗대던 카론이 달려왔다.

분명 그도 고스트그룸 해체를 위해 지시받은 일이 있을 텐데, 내가 배 속에서 나온 것에 너무 놀라 지시받은 것도 까먹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았다.

내게로 가까이 다가온 카론의 눈이 동그래져서 외쳤다.

“피, 피가 나는데 괜찮으십니까?! 지혈, 지혈!”

그는 윈터의 피가 묻은 내 손을 보고 내 피라고 오해한 듯했다. 그러자 윈터가 낮은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그건 내 피가 묻은 거다.”

“아, 다행이지 말입니다!”

…뭔가 방금 윈터한테 너무한 발언을 한 것 같은데?

그러나 윈터는 카론의 대답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카론도 윈터를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내 옆에서 기웃거리기만 했다.

“어쨌든 살았네….”

일이 다 끝나고 나니 허망한 기분이 들었다.

원작에서의 내 죽음에 대한 걱정은 원래 존재하지도 않았던 듯 사라졌다.

무엇보다 방금 너무 큰일을 겪고 나니, 앞으로 그 어떤 일을 겪어도 두려울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다 괜찮아졌어….”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에서 숨을 고르던 엘도 감사 인사를 해 왔다.

“사루비아, 그 향료는 뭐였는진 모르겠지만… 네가 나를 살린 거나 다름없어. 고맙다.”

“아, 혹시 제가 몰래 향료를 훔친 건 비밀로 해 주시면….”

“그거야 당연하지! 그게 없었으면 나도 죽었을 텐데!”

상황이 일단락되어 가고 있을 때, 나는 멍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그동안에도 아퀼라는 내 몸을 받쳐주고 있었고, 윈터는 후임들을 감독하는 와중에도 계속 나를 돌아보았으며, 카론은 안절부절못하며 내 주변을 정신 사납게 맴돌기만 했다.

그리고 나는 저 너머에서 넋 나간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시나와 눈을 마주쳤다.

“…어?”

이시나는, 내가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놀란 것도 같았고, 겁먹은 것도 같았으며, 분노한 것도 같았다.

확실한 건 내가 지금까지 내내 보아 온 다정한 얼굴은 그 자리에 없었다는 것이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이시나가 성큼성큼 내게로 걸어왔다.

“사루비아….”

이전에 내가 불면증으로 핼쑥해졌을 때, 요즘 무슨 일 있냐고 물어본 일 이후로 내게 처음 건 말이었다.

거의 3년간 항상 붙어 다니던 이시나와 내가 대화를 하지 않은 지 일주일도 더 지난 것이었다.

“괜찮니?”

그 특유의 다정한 말투를 듣자마자, 갑자기 내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어?”

눈물을 흘리는 주체인 나도 당황할 정도로 영문을 알 수 없는 눈물이었다.

분명히 슬픈 건 아니고, 우울한 것도 아니고, 겁먹은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눈물이 계속 흘러나왔다.

내가 울면서도 당황하고 있자, 이시나는 떨리는 손으로 내 얼굴에 손을 뻗더니 얼굴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그의 손에 눈물이 섞인 흙이 묻어 나왔다.

‘…지금까지 얼굴에 흙이 묻어 있었겠군.’

XX, 내 옆에 있던 이놈들이 너무 멀끔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나도 괜찮을 줄 알았지. 흙이 묻었으면 좀 말해 주든가….

“사루비아, 미안해….”

“예?”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이시나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면서 내 얼굴을 부드럽게 닦아 낼 뿐이었다. 다정한 손길과는 정반대로, 그는 꼭 미친 사람처럼 넋 나간 눈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미안, 내가 미안해….”

…미안하다고.

그러니까 아마도, 지금 이시나가 사과하는 건….

‘저번에 내가 죽어도 멀쩡히 살아갈 거냐고 물었을 때, 나를 외면한 게 미안하다는 거겠지.’

국경방위군에서 3년을 보낸 후 나에게 가장 친한 선임이 누구인지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이시나의 이름을 댈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이시나와 보내온 시간은 아퀼라와 보내온 시간과도 비슷했다.

그래서 이시나가 원작에서 그러했듯 나를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여기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더더욱 견딜 수가 없었다.

인성 파탄 85기나 지휘사관 디어 같은 인물이 나를 별 볼 일 없는 존재로 여긴다면 나도 아무 생각이 없겠지만, 나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이시나여서 나는 괴로웠다.

그러나 모든 일들이 해결되고 이시나가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지금, 나는 그가 비로소 나를 자신의 사람으로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었다.

“왜, 왜….”

목소리가 떨리며 눈물이 왕창 밀려 나오기 시작했다.

이제야 모든 일이 끝난 것 같았다.

이시나가 나를 받아들인 데에서 나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안도감을 느꼈고.

비로소 원작의 죽음을 피했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원작과 달라지고 있었다.

그동안 우울함과 긴장감에 억눌려 있던 서운함이 폭발하듯 쏟아져 나왔고, 눈물로 인해 시야가 흐렸지만 나는 이시나가 있는 방향을 노려보았다.

“왜 그러셨습니까….”

“미안해, 사루비아….”

“이러실 거면서… 왜… 그렇게 매정하게… 사람 취급도 안 해 주고….”

“많이 속상했지. 내가 잘못했으니까 제발 뚝 해, 응?”

“아니, 근데 이시나 님이 먼저 막….”

“사루비아, 미안해, 내가 미안해. 뚝, 뚝.”

나는 울먹이며 그에게 칭얼댔고, 이시나도 같은 말만을 반복하며 나를 달래 줄 뿐이었다.

그러다 나는 문득 내가 두 발을 땅에 딛고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X같은 아포칼립스 세계에 빙의한 지 4년째.

나는 살아남았고, 살아 있었고.

살아 있을 것이다.

* * *

이시나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평은 늘 비슷했다.

다정하고, 사려 깊으며, 착하다.

어릴 적부터 이시나의 부모도, 동네 사람들도, 또래 친구들도 그를 그렇게 평가했다.

그는 아르콘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외동아들이었다. 이시나의 부모는 서로를 사랑했으며 이시나를 사랑했고, 그들은 동화에 나올 법한 화목한 가정의 표본이었다.

이시나의 부모는 이시나에게 모든 것을 제공했다. 호화롭지는 못하지만 적당한 의식주, 그의 뛰어난 두뇌에 걸맞은 학습 지도, 충분히 뛰놀고 몸을 단련시킬 수 있는 뒷마당,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랑.

이시나는 그들의 사랑을 받고 자랐다.

그는 올바른 가정교육 아래 예의 바르고, 인내하고 양보할 줄 알고, 감사를 표하고 은혜를 갚을 줄 알며, 필요한 때 사과를 하고 반성할 수 있고, 사람들과 부드럽게 어울릴 수 있는 아이로 자랐다.

아르콘인데도 불구하고 어른스럽고 다정한 성격 덕에 또래 아이들도 모두 이시나를 좋아하고 이시나와 어울려 놀았으며, 그들의 부모도 이시나를 흐뭇하게 바라보고는 했다.

그리하여 이시나는 정말 모범적이고 완벽한 아들로 보였다.

그가 가지지 못한 단 하나를 제외한다면.

“저도 동생이 갖고 싶어요. 음, 여동생 말이에요.”

또래 아이들과 어울려 놀던 이시나가 부모에게 그렇게 말했을 때, 그들은 다음과 같은 답을 내놓았다.

“으음, 그건 어려울 것 같단다. 너는 아르콘이고, 언젠가 국경방위군에 입대해야 해. 그곳은 위험한 곳이기 때문에, 우리가 동생까지 챙기는 건 어려울 거야. 우리에게는 이시나 너 하나만을 소중히 기르는 게 중요하단다.”

기실 그가 가지지 못한 건 동생 따위가 아니었다.

이시나는 어릴 적부터 욕망을 박탈당해 왔다.

그는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국경방위군에 가야 한다는 말을 들어왔고, 그것은 그를 욕심 없는 아이로 만들었다.

또래 애들은 지금 잠깐 어울리는 것일 뿐, 그는 친구를 사귈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국경방위군에 가야 하니까.

공부를 배우는 건 즐겁지만, 이후에 대학에 진학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는 국경방위군에 가야 하니까.

얼마 전 입대한 사촌 형 케일은 좋은 사람이지만, 그에게 정을 붙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는 국경방위군에 갔으니까!

그는 욕망을 모르는 아이로 자랐고, 그것은 주변 사람들에게 하여 이시나를 착한 아이로 보이게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실상 이시나는 그 누구에게도 정을 붙이지 못하고 살아온 것이었다.

어차피 언젠가 단절될 것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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