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거 진심 같은데.
내가 며칠 동안 우울해하던 게 헛된 일이었나 할 정도로 진심인 것처럼 보여서, 나는 순식간에 아연해졌다.
‘뭐지? 이게 바로 남주1의 동기애?’
물론 내가 지금보다 짬을 덜 먹었다면 ‘헉? 이거 갑자기 나한테 집착하는 거 아니야?’라고 착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가 나에게 집착하려면 진작 해야 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며칠 전의 나는 인성 파탄 85기한테 탈탈 털렸다. 그건 내가 주방 근처를 얼쩡대다가 걸렸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가 훈련병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털리고 있을 때, 아퀼라는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나를 기다려 주기만 했다. 당연히 그는 자신의 선임인 인성 파탄 85기에게 아주 공손하게 굴었다.
보통 집착 남주라면 자신의 여주인공을 괴롭히는 사람들을 그냥 두지는 않겠지. 그러니까 일반적인 로판에 나오는 로맨스는 아니란 소리다.
어쨌든 원작 남주1답게 동기애도 남다른 모습을 보며, 나는 조금 안심이 되는 기분을 느꼈다.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그동안 내가 가깝게 지냈던 사람들의 얼굴을 찾았다.
상등병들에게 무슨 지시를 내리고 있던 윈터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이곳으로 오려고 하기에 나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양손을 내저었고.
산체스와 대화하던 베니는 내 시선을 느끼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돌아봤다. 그녀가 달음박질해 올 기세로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는 앉으라고 손짓했다.
제이슨…은 패티와 매티 사이에서 고통받고 있군. …패티와 매티는 왜 땅을 파고 있는 거지? 음, 제이슨이 저들을 혼자서 감당해 주다니 참 다행이야….
…그간 가깝게 지내던 사람이 한 명 더 있지만, 지금은 그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진짜 너무해.’
이시나를 떠올리면 다시 기분이 안 좋아지니 그에 관해서는 넘어가도록 하자.
문득 알타이르를 구하다가 크게 다쳤을 때 깨달았던 것들이 다시 떠올랐다.
‘죽기 싫어.’
죽어 버리면 내가 지금까지 쌓아 올린 모든 것들을 다시 잃어버리게 된다.
이전 세계에서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내 이름을 스스로 버릴 때, 나에게 남은 건 정말로 이 세계밖에 없게 되어 버렸다.
그리고 이 세계에서 나는 모든 것들을 새로 시작해야 했다.
나는 분명히 국경방위군에 들어와서 새로운 관계들을 내 힘으로 쌓아 올렸고, 죽음으로 인해 그것들을 허무하게 잃을 수는 없었다.
…생각이 좀 정리되는 것 같다.
나는 내 주위의 부대원들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아퀼라와 카론에게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국경방위군에서 정말 극적인 일들을 많이 겪은 것 같아.”
나는 내가 이곳에서 보내왔던 기억들을 천천히 회상하기 시작했다.
“추웠는데… 너무 추워서 다 놓아 버리려고 했는데, 그때 아직 내 곁에 남아 있는 열기가 있다는 걸 깨달았고.”
내가 하는 말이 어떤 사건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을 아퀼라의 눈빛에 무거운 감정이 담겼다.
“밤중에 울던 후임 하나 달래 놨더니 갑자기 날 졸졸 따라다니기 시작했고.”
카론은 언제나 그렇듯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웬 XX 황태자 XX가 부대에 방문에서 개고생을 했고…. 아니, 황태자 그 XX XX를 단두대로….”
“진정해, 사루비아….”
“어, 어, 응…. 어쨌든 그리고 건방진 후임 하나 처리하고, 조금 다른 의미로 강한 천재 후임이랑, 그냥 강한 후임이랑, 그리고 후임 3종 세트를 만났고…. 또, 죽을 뻔한 선임 하나를 구했고, 미친 벌레 떼들이 쳐들어오고….”
내가 평소에 농담 삼아 ‘역시 다이내믹하다, 군대!’ 하고는 하지만, 빙의 후 내 삶은 정말로 극적인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그게 애초에 이 세계가 소설의 극적인 장치에 기반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정말로 별의별 사건들을 다 겪었다.
이번엔 고스트그룸과 싸우다가 또 극적으로 목숨을 잃을 위기를 맞을지도 모른다.
거기서 내가 죽는다면 이제 진짜 원작이 진행되겠지만….
‘그 원작 속에 끼어들려고, 나는 흑마술까지 사용해서 원작의 기억을 되찾은 거야.’
그 원작 안에는 내가 함께 존재해야만 한다.
그래, 나는 분명 살기 위해 충분한 준비를 했다….
“솔직히 말해서, 난 저 고스트그룸이 무섭거든.”
그렇게 말하는 내 목소리는 이제 떨리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이 극적인 세계에서 살 마음만 포기하지 않는다면, 어떤 극적인 사건이 닥쳐도….”
어쩌면 이건 내가 이 세계가 소설이었음을 알고 있으니 할 수 있는 말일지도 모른다.
“극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걱정 마, 사루비아.”
아퀼라가 한 글자 한 글자 짓씹듯이 힘을 주어 말했다.
“아까도 말했잖아. 무슨 수를 써서든, 너를 구할 거라고.”
카론은 내가 방금 전까지 한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했지만, 그냥 환하게 웃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맞습니다! 사루비아 님은 절대 안 죽으실 겁니다!”
“그래….”
…아, 지금이 바로 그 시간이군.
내가 소설 속에 빙의하면 꼭 치고 싶은 대사였는데, 지금까지 알타이르를 구할 때 한 번밖에 못 해 봤던 바로 그 대사를 칠 시간이다.
‘반드시 원작을 비틀어 주겠어!’
…와, 이 대사 XX 재미있네? 빙의물 여주들은 이 좋은 대사를 여러 번 쳐 봤겠지? 정말 부러운 일이다.
* * *
“18중대 이동!”
17중대가 고스트그룸을 발견했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고, 우리는 빠른 이동을 시작했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비장한 태도로 총을 들고 달렸다.
‘내가 X같아서라도 안 죽는다.’
해가 지고 어두워지는 가운데 숲을 달리니 옛날 생각이 났다.
여섯 명의 동기들이 내 눈앞에서 목숨을 잃고, 아퀼라가 내 손을 붙잡았던 바로 그날.
‘오늘은 우리 중 아무도 안 죽어.’
아퀼라와 나는 절대로 오늘 죽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이곳을 제대할 것이다.
“지원! 지원이 왔다!”
달려오는 우리 부대원들의 모습을 보고 17중대의 부대원들 중 누군가가 외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어두운 숲 아래 주저앉아 있었는데, 대열은 엉망으로 흩어져 있었고 분위기도 어수선했다.
“무슨 일입니까?!”
무언가 사달이 난 것 같은 분위기에 우리 중대장이 17중대의 중대장에게 물었다.
“방금 부대원들 여덟 명을 잃었습니다. 고스트그룸이 병사들을 삼키고 대열을 무너뜨려 도주하는 바람에 막을 수 없었습니다.”
“…여, 여덟 명?”
내 뒤에 서 있던 제이슨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잠깐의 대치만으로도 여덟 명을 잃다니….
‘예전에 1급 마물인 드래곤을 만났을 때보다 더 심하잖아.’
내 목구멍으로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반드시 살아남겠다는 의지를 다지고 오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는 긴장감 때문에 몸이 빳빳하게 경직되었다.
“…16중대가 도착하면 다 함께 추적하도록 합시다.”
그렇게 제자리에 대기하며 16중대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우린 17중대의 병사들이 절망에 빠져 있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신병들은 물론이고 상등병들까지 눈물을 흘리거나 괴로워하고 있는 게, 계급을 막론하고 많은 동료들을 잃은 것 같았다.
‘XX, 오랜만에 다시 아포칼립스 모드 찍겠네.’
잠시 후 16중대의 병사들이 도착했고, 우리는 다 함께 이동을 시작했다.
어느새 해가 완전히 저물어서 숲에는 깜깜한 어둠만이 깔려 있었다. 우리는 검에 오러를 둘러 빛을 밝히거나 횃불을 들어 시야를 확보했다.
이동하는 동안, 내 옆에 선 아퀼라는 원래도 과묵했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마도 우리는 지금 같은 문제를 겪고 있을 것이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밤, 깊은 숲속. 1급 마물. 마물로 인해 죽어 버린 여러 명의 병사들.
이 모든 상황이 우리에게 동기가 죽어 버린 그날을 연상시키고 있었다. 저절로 몸이 떨려 왔다.
그러고 보니 계절도 겨울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날씨가 어떤지는 고사하고라도, 비정상적일 정도로 몸이 덜덜 떨렸고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나는 추웠다.
“야, 나 지금….”
아마도 지금쯤 창백하게 질려 있을 얼굴로 나는 아퀼라를 돌아봤다. 그가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마주쳤다.
“추워….”
어깨를 움츠리고 팔을 덜덜 떠는 내 모습이 그의 눈에 담겼고.
그는 왼손을 뻗어 내 오른손을 잡아챘다. 그의 손이 닿은 자리가 순식간에 따뜻해졌다. 익숙한 감각이었다.
“사루비아.”
“응.”
“죽지 마.”
맞잡은 손 사이로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아퀼라는 지금 분명히 두려움을 느꼈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겁먹은 사람 두 명이서 손을 잡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두려움을 떨쳐낼 수 있었다.
“안 죽을 거야.”
내가 그의 손을 더욱 힘주어 쥐며 말했다. 이건 그와 나 모두에 대한 다짐이었다.
비장한 태도로 한창 산을 달리던 중, 저 멀리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발견했습니다!”
축축하고 불쾌한 공기가 코를 찔렀다. 온몸이 습해지고 가려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빽빽하게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나무 몇 그루를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몸을 웅크린 고스트그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허억….”
이미 경계 근무를 서며 한 번 보기는 했지만, 같은 땅 위에 선 채 가까이에서 본 그것의 모습은 정말로 흉측했다.
인간을 통째로 몇 명은 집어삼킬 수 있을 것 같은 거대한 입과, 그 어떠한 무기라도 튕겨낼 것처럼 보이는 매끈매끈하면서도 단단한 피부, 어디에 눈이 있을지도 알 수 없는 새까만 몸통.
‘정신 차리자.’
지금까지 몇 번이고 목숨을 걸고 괴상하게 생긴 마물들과 싸워 왔는데, 저 고스트그룸에 겁먹을 수는 없었다.
“삼각형으로 둘러싸!”
“18중대! 이동해!”
지휘에 따라 세 중대가 고스트그룸을 삼각형 모양으로 둘러싸고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우리에게 퇴로를 완전히 차단당하고 제자리에서 꼬리만 흔들 뿐이었다.
‘안 움직이나?’
먼저 공격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고스트그룸 때문에 다들 눈치만 보던 바로 그때.
“으아아악!”
“전투 개시!”
탕-!
누군가의 총성을 기점으로 전투는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