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결혼식을 마치고, 우리는 하객들에게 인사한 후 집으로 돌아와서 대충 그런 시간을 보냈다.
아퀼라의 뺨을 쪽쪽거리며 한참 장난을 친 나는 문득 창 밖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전과는 달리 발전한 마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을도 많이 변했네….”
내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아퀼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다 사루비아 네 덕이야.”
“내 덕은 무슨. 모두 함께 해낸 거지.”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도 내 공이 컸다는 걸 인정하기는 했다. 그래, 최근의 나는 그야말로 진짜 ‘여주인공’ 같았다.
여주인공이라…. 그 단어를 들으니 머릿속에 많은 것들이 떠올랐다.
처음 이 세계에 도착했을 때는 절망 그 자체였다. 난데없이 군대에 입대하게 되다니 우울증에 걸릴 법도 했지만, 너무 황당해서 우울하지조차 않았다. 로판에 빙의했는데 흙 위에서 유격 체조를 하고 있다니, 우습지 않은가?
그때 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살았다. 어느 날은 분노하다가도, 어느 날은 헛웃음을 주체할 수 없어 하루 종일 피식거리기도 했다. 그때 나는 이 XX 로판 세계에서 빨리 탈출하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나는 주변 인물들에 정을 붙이게 되었다. 아퀼라가 폭포에서 떨어지던 내 손을 붙잡은 순간부터 나는 그를 의지하게 되었다. 어쩌면 그게 사랑의 시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카론을 처음 본 순간, 그를 내가 지켜줘야겠다는 의무감을 느꼈고.
이시나의 경우에는… 대체 언제부터 의지했는지 모르겠다. 그는 아마도 원래의 네미집 등장인물들 중 내가 가장 편안하게 다가간 사람이었을 거다. 왜냐하면 겉으로는 그가 제일 정상인처럼 보였으니까.
윈터도 그로부터 글을 배우며 점차 그가 익숙해지게 되었다. 남들은 북부대공스러운 그의 외모를 어색하게 여기는 것 같았지만, 나는 로판 표지에서 하도 그렇게 생긴 얼굴을 많이 본 탓도 있었고.
그뿐만 아니라 베니나 유리, 달린에게도 정을 붙이게 되었고. 하다못해 지금은 인성 파탄 85기에게도 동료애를 느끼고 있다.
에이프릴? 음, 그녀를 친숙하게 느끼는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리고 목숨의 위기도 참 많이 넘겼다. 드래곤을 상대했을 때도 그랬고, 알타이르를 지키기 위해 싸웠을 때도 그랬고. 하지만 그 순간들이 나로 하여금 더 성장할 수 있게 만들었다. 대표적으로 원작에서의 내가 죽을 뻔했던 위기에서 살아났을 때가 그렇다. 나는 그때 비로소 내가 이 세계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겠다고 느꼈으니까.
제대하고 나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거? 그건 아퀼라와 함께했던 로판이다. 그, 여관에서 내가 처음 로판을 목격했던 날…. 난 아직도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무엇보다 짜릿했던 순간은 혁명을 성공시킨 순간이었다. 그 과정에서 참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고, 내가 지금까지 해 온 일들이 헛된 게 아니라는 걸 느끼게 되었다.
혁명을 성공시킨 뒤에는 아퀼라가 나를 ‘루비’라고 불러주었다. 그 덕에 나는 정말로 행복해질 수 있었다.
목숨의 위기 넘기기, 정치질, 흑마술사 상대, 2황자군과의 혁명, 북부에서 보낸 윈터의 부모님과의 시간, 노스던 연맹 지켜내기 등등…. 긴 시간을 거쳐 그렇게 마침내 나는 결혼식에 성공하였다. 여기까지 오는 데 참 긴 시간이 걸렸다는 사실을 떠올리니,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가만히 허공을 쳐다봤다. 그동안 고생했던 또 다른 나 자신의 모습들이 떠오르면서 나를 향해 이제는 잘 사냐고 묻고 있었다.
물론 나는 그들에게 당당히 대답할 수 있었다. 나는 지금 행복하다고. 그리고 앞으로도 행복할 거라고.
나는 내 눈앞에 있는 아퀼라에게 가볍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
“아퀼라.”
“응.”
“변하지 않고 평생 나를 사랑할 거지?”
“당연한 소리를 해.”
나는 가볍게 웃어 보였다. 물론 아퀼라가 그렇게 대답하지 않아도 나는 그를 믿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곳은 로판 세계이고.
로판에서의 사랑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결국 모든 것들은 사랑에 의해 구원된다.
그러니 아퀼라는 계속해서 나를 사랑할 거고, 아퀼라에 대한 내 사랑 또한 변하지 않을 것이며, 나를 둘러싼 세계는 언제까지나 행복하게 굴러갈 것이다.
나는 내 인생의 마무리는 어린이 동화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내 인생의 결말은 ‘두 사람은 결혼하여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였으면 좋겠으니까.
* * *
평화로운 시간이 흘렀다. 지금껏 맛보지 못한 여유였다.
그러나 느긋하게 정원을 산책하려던 나는 문득 뭔가 대단히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아오, XX!”
정원에서 거슬리던 돌멩이를 강하게 발로 차며 내가 외쳤다.
“아퀼라, 아무래도 안 되겠어!”
“왜, 사루비아?”
“뭔가 이상한 것 같아!”
그래, 나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지금의 내 상태는 이상했다.
요즈음의 나는 자꾸 화가 났다. 사소한 일에도 예민해졌고, 조금만 거슬리는 게 생기면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상하다. 분명 결혼한 만큼 앞으로 행복만 남아 있을 줄 알았는데.
내가 그렇게 고민 상담을 하자 이시나는 ‘사루비아 평소의 너와 다르지 않은데?’라고 말했지만, 내가 느끼기에 평소의 나와는 확연히 달랐다. 아무리 그래도 평소의 나는 이 정도로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래서 내가 추측해 보기로, 아무래도 나는….
“화병에 걸린 것 같아.”
자꾸 화가 나니, 합당한 추론이었다.
돌이켜 보면 요즈음 속이 좀 답답한 것도 같았고, 어쨌든 뭔가 건강하지 않다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나는 의사의 진료를 받기로 했다.
물론 아직 연맹에 의사 수가 충분하지 않아 의사가 왕진을 오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으므로, 먼저 마법사의 힘을 빌려야 했다.
곧, 빅팀이 빠르게 우리 집으로 달려왔다. 빅팀은 내가 부르면 언제나 저렇게 반응했다.
내가 산체스로부터 위협을 받던 빅팀을 몇 번 구해준 이후로 그는 나를 더욱 잘 따르게 되었다. 가끔씩 “산체스 님이나, 사루비아 님이나, 뭐가 다른 줄 모르겠네….”라고 중얼거리긴 했지만.
하여튼, 그는 마법을 이용해 빠르게 내 상태를 진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꺼낸 말은….
“임신입니다.”
“푸흡! 콜록, 콜록!”
나는 사레에 들려 요란하게 기침을 하고 말았다. 아퀼라가 반사적으로 내 등을 토닥여 주었다.
조금 진정됐다고 느꼈을 때, 아퀼라가 나보다도 더 흥분한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라고요? 그게 정말입니까?”
“네, 틀림없는 임신입니다. 생명의 기운이 두 개인데, 제가 그걸 느끼지 못할 리가 없죠.”
그 말에 아퀼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러더니 그는 나를 들어올리기 위해 내 몸에 손을 올렸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그것을 내렸다.
그는 뭘 어떻게 해야 할 줄 모르는 눈으로 나를 보면서도 얼굴을 붉힌 채 말을 이었다.
“사루비아….”
감동을 받은 듯, 그의 눈 밑이 붉게 변하고 있었다. 얘도 은근 눈물이 많다.
분명 감동해야 할 타이밍이었지만, 나는 도통 감동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아니, 임신 증상을 화병으로 착각하는 게 어디 있어?”
보통 로판에서의 임신 증상은 다 정해져 있지 않는가? 어지럼증을 느낀다든지, 속이 더부룩하다든지, 입덧을 한다든지…. 어쨌든 다들 여주인공스럽고 병약해 보이는 증상들이었다.
그런데 나는 왜 몸은 튼튼하고 화병에 걸린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단 말인가? 임신했는데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로판 여주가 어디 있냐고?
내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빅팀을 보자, 그가 변명하듯이 말했다.
“어…. 제가 의사가 아니라 잘은 모르겠는데요…. 원래 임신을 하면 호르몬의 변화로 감정이 변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사루비아 님은 원래 범상치 않은 분이시니까요….”
“그래서 임신 증상도 남들과는 다르단 말이야?”
나는 정말 어이가 없어졌다. 저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건가?
그러나 아퀼라가 진정하라는 듯이 나를 토닥였기에 나는 입을 다물어야 했다.
“사루비아, 우리 이제 화를 덜 내보자. 아기한테 안 좋을 거야.”
“화를 덜 내라고? 이렇게 화가 나는데?”
“…이시나 님이 가르쳐 주신 호흡법을 하는 건 어떨까?”
결국 내가 옆에서 열심히 심호흡을 하고 있을 때, 아퀼라가 빅팀에게 물었다.
“주의해야 할 점이 뭐가 있습니까? 시기는 어떻게 되고요? 1개월쯤 되는 겁니까? 성별은 미리 알 수 있습니까? 그리고….”
“어…. 성별은 알아낼 수 있지만 아기한테 마법을 쓰면 안 좋을 것 같고…. 나, 나머지는 진짜 의사를 불러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며칠 후 진짜 의사에게 다시 한번 검진을 받은 후, 우리는 임신이 확실하다는 판정을 받을 수 있었다.
“사루비아!”
아퀼라가 울먹거리는 눈으로 내게 꽃다발을 내밀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얼른 그것을 받아들었다.
“앞으로 정말 잘할게. 정말로.”
“지금도 충분해.”
그러면서, 나는 나 자신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그리고 앞으로 나도 화를 줄여 볼게. 배 속에 있는 아기를 위해서라도 정말로.”
* * *
“음, 바람이 좋다.”
다음날,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길을 걷고 있었다.
요즈음 자꾸 화가 치밀어 올랐는데, 상쾌한 공기를 맞으며 산책을 하니 좀 나아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아이를 가진 후 더 이상 화도 내지 않고 욕도 끊기로 했다. 산책은 기분 전환에 도움이 됐으므로 내가 그 다짐을 지킬 수 있게 해주었다.
그때, 저 멀리로 보이는 익숙한 얼굴에 내가 인상을 찌푸렸다. 저건 틀림없이….
“자이든?”
그래, 저 뺀질뺀질한 금발! 틀림없는 자이든이었다! 국경방위군 시절 나와 악연을 맺고 있었던 그 말이다!
생각해보니 그도 이 나라에 불만이 있었을 거므로 혁명에 참여했을 거다. 그리고 노스던 연맹으로 와 이곳에 정착했을 거고. 그동안은 한 번도 만나지 못했지만, 사실 그도 이곳에서 살고 있었을 거다.
그의 얼굴을 보자 분노가 스멀스멀 튀어나오려 했지만, 나는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그래, 어쩌면 자이든과도 잘 지내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도 이제 한 아이의 엄마가 되는 성숙한 사루비아가 아닌가.
마침내 서로의 말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워졌을 때, 자이든이 쭈뼛거리며 자리에서 멈춰 섰다. 그도 나를 만난 게 어색한가 보다.
“아, 안녕하십니까….”
웬일로 그가 내게 먼저 인사를 다 하길래, 나는 그것을 받아주었다.
“그래, 자이든. 오랜만이다.”
“사루비아 님도 오랜만입니다. 교육부 최고위원이 되었다는 소식 들었습니다.”
그 이후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내가 흠흠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너는 잘 살고 있냐?”
“예, 뭐, 그럭저럭….”
“나는 아퀼라와 결혼했어.”
“아, 축하드립니다.”
“…….”
그리고 다시 우리는 어색해졌다.
내가 빨리 이 자리를 피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자이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사루비아 님….”
“어?”
“그때는 제가 좀 심했던 것 같습니다.”
“응?”
예상하지 못한 말에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자, 자이든이 말을 이었다.
“그냥, 그렇게 싫어했던 건 아닌데 그곳의 선후임 관계라는 게 복잡해서… 쉽게 가까워지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 그래.”
자이든이 내게 이렇게 말하다니, 정말 뜻밖의 일이었다.
그렇지만 왠지 훈훈한 기분에 나는 쑥스럽게 웃음을 지었다. 얼마 전에 내 인생의 마지막이 어린이 동화였으면 좋겠다고 빌었는데, 정말 모든 게 해피 엔딩이었나 보다.
자이든은 다시 한번 입술을 뗐다.
“그러니까 정말 미… 미….”
“미?”
“미친놈아! 너도 심했잖아!”
“뭐, 뭐?!”
“내가 1만큼 잘못했으면 네가 10만큼 되갚아 줬으면서!”
“뭐? 이 XX, 너 거기 안 서?!”
그렇게 욕하지 않고 화도 내지 않겠다는 내 결심은 하루만에 깨지고 말았다.
그래, 어쩌면 이게 나다운 결말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나는 이 세계가 사랑으로 돌아가는 로판 세계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 그래서 나는 오래오래 행복할 것이다.
어쨌든 내 탈영보다는 남주들의 집착이 빨랐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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