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고스트그룸 출현으로 인해 부대는 발칵 뒤집혔다.
그날 고스트그룸을 본 건 우리뿐만이 아니었다. 베타 소대와 감마 소대의 초소에서도 거대한 크기를 가진 고스트그룸을 보았다고 했다.
다들 고스트그룸이 그대로 국경 쪽에는 관심도 갖지 않고 자신의 영역으로 돌아가 주기를 바랐지만, 얼마 후에는 17중대에서 목격담이 들려왔고 또 며칠 후에는 16중대에서 소식이 들려왔다.
그건 고스트그룸이 언제라도 국경 안쪽으로 발을 들일 수 있다는 의미였다.
“저 정도 크기의 1급 마물이라면 자연적으로 발생하기는 힘들지. 아마 최근에 흑마술사가 거대한 규모의 흑마술을 사용한 적이 있을 거다. 그 대가로 생성됐을 가능성이 높아.”
윈터는 고스트그룸의 기원에 대해 그렇게 추측했다.
“아하…. 또 흑마술사인 겁니까.”
대체 흑마술사 때문에 우리가 피해를 입은 게 몇 번째지? 진짜 죽여 버리겠어, XX.
“윈터 님, 저 질문이 있는데 말입니다.”
“말해 보도록.”
“만약 고스트그룸에게 먹힌다면, 입 안에서 버티다가 입이 열렸을 때 다시 빠져나와서 살 수도 있습니까?”
“중대 본부에 있는 마물 도감을 읽어 보는 게 좋겠군. 고스트그룸은 살아 있는 생물을 통째로 삼키기에, 입 안에 특수한 막이 있다. 한번 삼켜진 생물들이 입 안으로 다시 나오지 못하도록 하지.”
“아하…. 감사합니다.”
만약 고스트그룸에게 먹힌다면 그냥 입으로 다시 빠져나오는 단순한 방법 따윈 쓰지 못한다는 거군, XX.
“필요하다면 지금 함께 중대 본부에 가겠나?”
“예… 저도 책 좀 읽어야겠습니다.”
그러자 윈터의 얼굴이 묘하게 밝아졌다. 와, 저 지식 중독자. 그렇게 책이 좋나.
이후 난 윈터의 뒤를 따라 본부에서 마물과 관련된 책들을 모조리 뒤져 봤지만, 역시 고스트그룸에게 먹혔을 때 빠져나오는 방법 같은 것은 나오지 않았다. 하긴 그딴 경험을 해본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마침내 17중대에서 고스트그룸에 의해 뜯겨나간 것으로 보이는 국경의 철조망을 발견했을 때, 대대 단위의 토벌이 결정됐다.
“중대장은 철조망에게 실망했다….”
드래곤만큼이나 위험한 고스트그룸의 침입에 충격을 받았는지 중대장은 알 수 없는 헛소리를 해 댔고.
“자, 빨리빨리 토벌 준비를 하도록!”
우리는 소대장의 지휘 아래서 토벌을 위한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베니, 네가 에인젤 짐 챙기는 것 좀 도와줄래?”
“넷슴다!”
XX, 이거 어쩐지 데자뷰인데.
3년 만에 다시 나타난 1급 마물의 소식에 중대, 아니, 대대는 발칵 뒤집혔고, 우리 소대도 핵폭탄을 맞은 듯 완전히 엉망이었다. 복도를 걸으면 어디서 튀어나왔을지 모를 옷가지가 발에 치일 정도였다.
“빨리! 더 빨리 준비해!”
…하지만 결국 나도 이렇게 베니와 에인젤을 재촉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XX, 내 발로 무덤에 기어들어 가기 위해 짐을 챙기고 있다니 좀 죽고 싶군. 아니, 어차피 죽을 거니깐 죽고 싶다고 말할 필요는 없겠지.
‘아냐, 침착해야 해….’
나도 잘 알고 있듯이, 내 단점은 별로 침착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런 위기 상황일수록 침착해져야 한다. 나는 지금까지 숱한 위기들을 잘 넘겨 왔다.
내 첫 토벌, 드래곤 사태 때 폭포에서 추락하면서도 가까스로 살아남았고.
알타이르의 죽음을 막기 위해, 다치면서까지 스카퍼를 죽였고.
그밖에도 내가 지금까지 죽인 마물들이 무수히 많았다.
‘그러니까 원작을 잘 떠올려 보고 치밀하게 대비해두자.’
원작에서 사루비아는 고스트그룸에게 먹혔다. 그리고 고스트그룸의 강산성 위액에 의해… 그, 그로테스크하게 죽었지.
‘그렇다면 대비해야 할 건 두 가지 경우야.’
하나, 고스트그룸에게 먹힐 일이 없도록 처음부터 긴장하기.
둘, 고스트그룸에게 먹혀 버렸을 때, 살아남을 방법 찾아두기.
얼마 전 나는 윈터와 함께 중대 본부에서 마물 도감을 펼쳐 들고 고스트그룸에 관한 정보를 머릿속에 때려 박았다. 아마 지금 이 부대에서 고스트그룸에 대해 나보다 잘 아는 인간은 없을 것… 아니, 윈터는 제외하자.
어쨌든, 나는 지금 고스트그룸에 대해 충분히 대비가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괜찮아, 비상시에는 계획대로 하기만 하면 돼….’
* * *
조금 뒤, 토벌이 시작되었다.
“이미 17중대에서는 흔적을 잡아 추적을 시작했다고 한다! 서두르도록!”
“예!”
중대장의 재촉에 우리는 더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
‘아, 이래서 행군을 했던 거군.’
덕분에 장거리를 이동하는 능력이 좀 갖춰지긴 한 것 같다.
디어를 비롯해 각 소대에서 가장 기수가 높은 사람은 초소를 지키기 위해 남았고, 우리는 가방을 멘 채 빠른 걸음으로 산을 이동했다.
크고 빠르게 발을 옮기느라 흙먼지가 피어올랐지만, 눈이 따가운 것을 신경 쓸 여유 따위 없었다.
“허억, 허억….”
물론 지금 다른 부대원들도 지쳐서 표정이 안 좋긴 하겠지만, 아마 그중에서도 내 얼굴이 가장 안 좋을 것이다. 그거야 나는 내 무덤으로 스스로 걸어가고 있는 거니까.
‘원작의 큰 스토리가 결국 바뀌지 않은 거면 어떡하지?’
다소 달라진 부분들이 있긴 하지만, 큰 틀에서 원작의 전개를 위해 꼭 필요한 요소는 바뀌지 않을 가능성이 있었다.
원작을 위해 필요한 요소는 ‘남주들의 특별한 존재가 사망했다’라는 사실이다. 그래야 그들이 이후 들어올 달린에게 관심을 가지게 될 테니까.
아퀼라는 나에게 각별한 동기애를 가지고 있고, 카론을 나를 잘 따르고, 윈터는… 가끔씩 나를 포기한 것 같기도 하고 좀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 주지만… 어쨌든 다른 의미로 기억에 남는 후임은 맞겠지, 음.
이렇듯 ‘남주들이 나를 특별하게 여긴다’는 사실만큼은 원작과 달라지지 않았으니, 다음으로 필요한 요소.
내 사망.
고스트그룸까지 나오는 이 모든 상황이 원작과 그대로 흘러가고 있으니, 불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대비해 놓은 게 통할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니까….
‘인생이 데드 플래그 투성이야.’
그리고 나는 예전의 경험으로 알고 있다. 이 X같은 아포칼립스 세계관에서는 데드 플래그를 피해도 죽고, 안 피해도 죽는다, 하하, XX.
17중대 본부 건물에 도착한 뒤 우리는 탐색을 시작했다.
각 소대별로 흩어져 고스트그룸의 흔적을 찾는 건데 사실 가장 유력한 곳으로는 이미 17중대가 이동했으니 우리는 이곳에서 소식을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미 선임들은 바닥에 앉아 쉬고 있었기 때문에, 나 또한 눈치를 보다가 슬그머니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퀼라와 카론이 내 근처에 앉았다.
“사루비아.”
아퀼라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왜?”
“말해 주겠다면서. 언제 말해 줄 건데.”
“아, 음….”
아무래도 내 표정이 어두우니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재촉하는 것 같은데, 도대체 내 현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냥 기분이 좀 그래….”
그 말에 아퀼라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다가, 자신의 한 손을 내 어깨 위에 얹으며 말했다.
“필요 없어?”
“응?”
“이제 내가 너에게 아무런 도움도 될 수 없냐고.”
고개를 들어 마주친 아퀼라의 눈은 어쩐지 살벌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또 버튼이 눌렸군….
그러니까 이건 동기들이 전부 죽은 뒤 아퀼라가 유일한 동기인 내게서 생존을 확인받는 어쩌고… 하여튼 그거다.
이번에는 아퀼라도 정말로 예민해진 것처럼 보였다.
생각해 보니 나도 요즘 예민해져 있으니까 아퀼라나 카론에게 아무런 신경도 쓰지 못한 것 같긴 하다.
“다 말해 주기로 했잖아. 그런데 왜.”
아퀼라는 거기서 말을 끝냈지만, 나는 이제 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아, 아냐…. 난 아직도 네가 필요해.”
“그럼 왜 자꾸 도망가.”
“으음, 잠깐만.”
내가 말끝을 흐리며 아퀼라의 눈을 바로 보았다.
아퀼라는 나를 볼 때 늘 그러하듯 뜨겁게 타오르는 듯한 주홍빛을 눈 안에 담고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마냥 무표정해 보이는 얼굴이더라도, 나는 아퀼라 또한 나와 마찬가지로 초조해하고 불안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좋아, 그러니깐 말이야.”
내가 죽을 것 같다는 얘기는 못하더라도, 이시나에게 그랬듯 내 고민에 대해서 대충 흘려 볼 수는 있겠지.
“있잖아, 내가 죽으면….”
그 말에 아퀼라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네가 왜 죽어, 사루비아.”
“…나도 죽기 싫어! 죽기 싫어, XX! 안 죽을 거야!!! 생각해 보니까 개빡치네? 이 X같은 아포칼립스! 안 뒤져, XX!!”
“…알았으니까 진정하고 얘기해 봐.”
갑자기 분노를 터뜨린 내 태도에 아퀼라가 역으로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그제야 나는 씩씩대던 걸 멈추고 정신을 차렸다.
“…내가 죽을까 봐 무서워.”
“갑자기? 네가 왜 죽어?”
내가 ‘죽음’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린 것 자체가 싫은 모양이었다.
“일단 들어 봐. 내가 무서운 건 두 가지인데, 하나는 그냥 죽는다는 상황 그 자체고.”
“…응.”
“그리고 두 번째는… 만약 내가 사고로 죽어도 사람들은 다 멀쩡하게 살아가겠지?”
“뭐?”
“지금까지 이 부대에서 죽었던 다른 부대원들을 우리가 가슴 속에 묻어 놓고 잊었듯이, 내가 죽어도 다른 사람들은 나를 가슴속에 간직하고 보내 줄 거고 이 세상은 멀쩡히 돌아갈 거잖아.”
그렇게 소리 내어 말하다 보니 다시 슬퍼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없이도 사람들은 잘 살아갈 거라고 생각하니까 배알이 꼴려서 미치겠어.”
뭐, 나는 이기적인 애였고, 이건 이기적인 생각이었지만 그래도 나는 그냥 빡쳤다.
물론 이 세계에 빙의한 후 365일 중 364일은 빡치는 날들이었지만, 내가 죽은 후에도 평온하게 살아가는 원작 소설을 떠올리면 나는 화가 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때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의외로 카론이었다.
“아닙니다! 사루비아 님, 절대 아닙니다!”
카론이 어떻게든 나와 시선을 마주치겠다고 내 옆에서 정신 사납게 굴길래, 나는 카론의 갈색 눈동자를 빤히 응시했다.
“글쎄….”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절대 아닙니다! 다른 분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저는 정말로 절대 못 잊습니다….”
…오히려 카론이 울먹거리기 시작했기에, 나는 당황하여 그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그, 그래….”
“네, 저는 정말로…!”
“으응, 좀 진정해….”
카론이 너무 격하게 반응하니 오히려 내가 침착해지는 기분이다. 내가 카론을 달래고 있을 때, 아퀼라가 낮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사루비아.”
“응.”
“네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
한 글자 한 글자에 힘이 들어가 있는 목소리였다.
“나한테 너밖에 없는 거 알면서도, 어떻게 네가 없는 내 미래를 상상했어?”
“내가 죽고 싶어서 죽는 게 아니잖아…. 그냥 죽을까 봐 무섭다는 거지….”
“아니, 넌 못 죽어.”
“내가 죽고 싶어서 죽냐, XX?”
반사적으로 거친 말부터 튀어나왔지만, 아퀼라는 태연했다.
“일어날 수 없는 미래라니까.”
아퀼라가 부드럽게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속삭였다.
“네가 없는 내 미래는 성립할 수 없는 상황이니, 그런 가정은 안 해도 돼.”
그가 말을 내뱉을 때마다 꼭 단어 하나하나에서 열기가 화르르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어디로 가든지, 무슨 수를 써서든 데리고 올게. 그러니 괜찮아.”
그렇게 말하는 아퀼라는 꼭 모든 것을 녹여버릴 것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무슨 수를 쓰든 곁으로 데리고 올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