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이야기의 끝은 어린이 동화였으면 좋겠어
“너, 너무 떨려….”
“사루비아 님, 움직이지 마세요!”
달린이 눈화장을 해 주는 가운데 나는 긴장을 가라앉히려 심호흡을 했다.
오늘은 내 결혼식 당일이었다.
나는 지금 결혼식을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 화장을 맡은 건 달린이었다. 나는 처음에는 뭐든 실수부터 하는 달린에게 의구심을 품었지만, 놀랍게도 달린은 화장을 아주 잘했다. 역시 달린은 21세기에 인플루언서로 태어났으면 떼돈을 벌었을 것이 분명하다.
나는 이전에 골랐던 머메이드 핏의 흰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이제 끝났습니다!”
달린이 화장 도구를 들고 뒤로 물러났다가, 내 얼굴을 보며 감탄했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거울을 바라봤다. 그리고….
“뭐지?”
혹시 지금 “이게… 나?”라는 대사를 치면 되는 타이밍인가? 그런데 그건 너무 식상하지 않나?
어떤 대사를 쳐야 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어쨌든 나는 감탄하기로 했다.
“와.”
지금의 나는 완벽하다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가 없었다.
드레스의 박힌 은색 보석들이 반짝거리며 빛났고, 눈두덩이에 얹힌 흰 펄도 드레스와 어울렸다. 볼에 얹힌 연분홍빛 블러셔도 내 얼굴과 잘 어울렸다.
화장은 비교적 옅은 편이었지만 나에게 정말 맞춤형이었다.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기 뭐하지만 요정 같은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입만 다물면 엄청 청순해 보이는 예쁜 얼굴을 타고났기 때문이겠지.
“달린, 너 정말 엄청나다.”
“헤헤, 그래서 저만 믿으라고 한 겁니다!”
내가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을 보며 감탄하고 있을 때, 누군가의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들어오세요.”
애초에 신부 대기실에 들어올 만한 내 지인은 몇 되지 않았다.
문을 열고 나타난 건 아니나 다를까 에이프릴과 유리, 베니였다.
“세상에!”
가장 먼저 감탄사를 내뱉은 건 베니였다.
그녀는 나를 보고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자리에서 펄쩍 뛰더니, 와다다 달려와 나를 이리저리 살피며 입을 벌렸다.
“세상에, 제가 상상하던 모습 그대로입니다!”
그녀가 황홀한 얼굴로 연신 중얼거렸다.
“저는 늘 사루비아 님의 이런 모습을 꿈꿔왔습니다, 아아….”
“너도 오늘 아름다워.”
피아노 반주라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기 때문인지, 그녀가 차려 입은 검은 드레스도 오늘따라 무척 힘을 준 의상인 듯했다. 하지만 베니는 오로지 내 차림새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베니가 나를 보며 감탄하고 있을 때, 에이프릴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으며 말했다.
“사루비아, 오늘 예쁘네.”
“가, 감사합니다….”
아직도 에이프릴로부터 칭찬을 받는 일은 어색하다, 응….
과도하게 나를 칭송하는 베니와 어색한 에이프릴 사이에서 그나마 멀쩡한 건 유리였다. 유리는 요즘 유행 중인 사진을 찍어주는 마법 아티팩트, 이름하여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흑마술 허용을 축하하는 기념식에서도 사용된 그 물건이다.
“사루비아, 사진 찍어줄까?”
“네!”
나는 카메라를 보며 은은한 미소를 지어 보였고, 셔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랜만에 듣는 셔터 소리에 나는 왠지 가슴이 찡해지는 기분이었다. 가끔 옛 세계의 것들이 떠오를 때마다 기분이 이상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사루비아, 그럼 오늘 식 잘 치르고. 끝까지 보고 있을게.”
“네. 아, 입장할 때 사진도 부탁드립니다!”
“그래.”
그렇게 에이프릴, 유리, 베니, 달린이 모두 떠나고 난 뒤, 나는 홀로 남은 신부 대기실에서 부케를 꽉 쥔 채 한숨을 내쉬었다. 식이 가까워지니 긴장되는 마음을 달랠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 부케는 예쁘네….”
보통 부케에는 잘 쓰지 않는 꽃이지만, 내 부케에는 사루비아 한 송이가 꽂혀 있었다. 아퀼라가 신경 써서 꽂아준 것이었다.
사루비아, 루비. 모두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둘러싸여 있으니 이 세상마저 아름다워 보이는 기분이었다. 꼭 나를 위해 돌아가는 듯한 세상 속에서, 나는 그 어느 때보다 행복했다.
* * *
그 시각, 아퀼라는 들어오는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익숙한 얼굴이 보일 때마다 아퀼라는 악수를 하며 인사했다. 그들은 대부분 국경방위군에 소속되었던 일원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빅팀 빼고 모두가 국경방위군의 일원이었다.
그때 남녀 한 쌍이 아퀼라 쪽으로 걸어왔다. 낯선 얼굴들이었지만 아퀼라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그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자네가 바로 우리 사루비아 양과 결혼한다는 신랑이군.”
“예, 맞습니다.”
아퀼라는 남자의 손을 잡으며 그 어느 때보다 깍듯하게 인사했다.
아퀼라는 이전에 사루비아로부터 그들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윈터 님의 부모님 맞으십니까?”
“그래, 맞네.”
윈터의 부모님, 폴라와 스노우였다.
그들이 등장하자 순식간에 식장의 온도가 떨어진 것 같아서 아퀼라는 반사적으로 몸을 오소소 떨었다. 폴라는 그런 아퀼라를 가만히 보다가 말했다.
“사루비아는 이런 취향이었군.”
이어지는 스노우의 말에 아퀼라는 몸을 움찔했다.
“어떤 놈팡이가 데려가나 했더니.”
아무래도 윈터의 부모님은 사루비아를 진심으로 자신의 딸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퀼라는 꼭 훈련병 시절에 선임을 대할 때처럼 바짝 얼어 그들을 안내했다.
긴장 속에 겨우 그들을 식장으로 데려다 드린 아퀼라가 숨을 고르고 있을 때, 이번에는 익숙한 얼굴이 등장했다. 아퀼라는 앞으로 벌어질 일을 직감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퀼라!”
잔뜩 분노한 이시나가 아퀼라의 앞에 서 있었던 것이었다.
이시나는 본래 늘 차분하고 쉽게 분노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요즈음의 이시나는 근원적으로 치료될 수 없는 분노에 휩싸여, 시도 때도 없이 화를 내다가 또 제풀에 지쳐 한숨만 푹푹 쉬기를 반복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아퀼라, 네가 감히 사루비아를 데려가다니…. 내가 얼마나 애지중지 키웠는데….”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이럴 때 아퀼라는 자신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이시나에게는 그저 죄송하다고 말하는 것만이 답이었다.
“그래도 저 아니면 사루비아를 감당할 사람이 없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데려가는 사람 없으면 내가 계속 키울 수도 있었어!”
“제가 사루비아를 내버려 둘 거라고 생각하셨습니까?”
“물론 그럴 리가 없겠지. 난 훈련병 시절부터 너희의 미래를 직감하고 있었다고!”
이시나가 자신의 머리를 싸매며 처절하게 외쳤다.
“진정하십시오. 오늘같이 좋은 날에 흥분하시면 안 됩니다.”
“그렇지…. 오늘은 좋은 날이지….”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이시나는 좋은 날이라는 말에 조금도 동의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시나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고 자리를 향해 가다가, 뒤를 돌아보고 아퀼라를 향해 말했다.
“아퀼라.”
“예?”
“조금이라도 사루비아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났을 시 사루비아가 원하는 대로 행동해주겠어.”
그건 사루비아가 원하는 대로 ‘속을 알 수 없고 어두운 범죄를 저지르면서 겉으로는 착해 보이는 사람’이 되겠다는 의미였다. 사루비아가 이전부터 이시나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아퀼라는 알고 있었다.
즉 이시나는 아퀼라를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아퀼라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그는 역시 사루비아를 쟁취하기란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에는 사루비아를 아끼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 * *
완벽할 정도로 아름다운 피아노 반주가 울렸다.
“신랑, 신부 입장!”
사회를 맡은 알타이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긴장한 채 숨을 들이마셨다.
옆에서 긴장하지 말라는 듯 내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는 손길이 느껴졌다. 나는 희미하게 웃는 얼굴로 아퀼라를 쳐다봤다.
내게 함께 입장할 아버지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동시 입장을 하게 되었다.
물론 윈터의 부모님이라든가 이시나는 나를 마치 친딸처럼 여기는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결혼식에서 진짜 그들의 손을 붙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아퀼라의 손을 붙잡은 순간, 잠깐 내 쪽에 시선을 준 그가 갑자기 숨을 멈추더니 딱딱하게 굳었다.
아무래도 행진을 하려니 긴장한 것 같아 내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아퀼라, 긴장했어?”
그러나 그가 내놓은 것은 황당한 대답이었다.
“아니, 그건 아니고. 혹시 오늘 나를 죽이려는 거야?”
“뭐?”
“방금 깨달았는데, 너 지금 나를 죽일 수 있을 정도로 예뻐.”
나는 어이없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진심인 것 같았다…. 감동이라도 받았는지 그의 눈 밑이 붉게 변해 있었다.
“에휴… 입장이나 하자….”
그래, 이놈도 ‘네미집’의 등장인물답게 멀쩡한 놈이 아니었다는 걸 잊고 있었다.
우리는 천천히 결혼식장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꽃으로 만들어진 길과 꽃으로 된 아치 모형이 우리를 반겼다.
우리가 천천히 길을 걷자 사방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왠지 가슴이 시큰거리는 것 같아, 나는 눈물을 참기 위해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다 나는 어딘가에서 유난히 열렬한 박수 소리가 들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슬쩍 고개를 돌려 보니, 그곳에는 카론이 환호하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와! 사루비아 님 드레스 너무 아름다우십니다! 결혼식장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역시, 카론은 그저 내가 드레스를 입었다는 것에 신난 게 분명했다….
눈물이 쏙 들어간 것 같아, 나는 웃는 얼굴로 길을 걸었다. 우리는 열렬하게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베니를 지나쳐 걸었다. 베니는 마치 거장이 현신한 것처럼 신들린 듯이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고 있었다.
우리가 길의 중간쯤 걸었을 때, 하늘에서 폭죽이 터졌다.
파바방-
낮인데도 불구하고 폭죽은 화려한 색을 내며 빛났다. 마법으로 만들어진 폭죽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가 길의 거의 끝까지 걸었을 때는,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와아!”
사람들이 꽃비를 보며 감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흐뭇하게 웃었다.
‘마법사들을 섭외하길 잘했지.’
비용을 꽤 써야 하긴 했지만, 아주 훌륭하게 값어치를 해내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지금까지 상상해 왔던 그 어떤 결혼식보다 멋진 결혼식이었다.
마침내 우리는 길의 끝에 도착했고, 주례를 맡은 가블 님이 인자한 얼굴로 물었다.
“신랑, 평생 신부를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
“네.”
“신부도 삶이 다하는 날까지 신랑을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
“네!”
씩씩하게 답한 뒤, 우리의 눈이 마주쳤다.
내 얼굴을 가리고 있던 면사포가 걷어지고, 말캉한 것이 입술에 와닿았다.
그 어느 때보다 황홀한 입맞춤이었다.
* * *
윈터는 조금 씁쓸한 얼굴로 결혼식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결혼식이 이루어진 이상 그가 이전에 품었던 감정의 잔해는 이제 완전히 수면 밑에 깊이 묻어 놓을 예정이었다.
그는 여전히 사루비아에게 인간적인 호감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선후임으로서의 관계를 이어갈 예정이었지만, 그래도 기분이 이상한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아퀼라는 좋은 동료니까.’
혁명을 위해 함께 싸우면서, 그는 아퀼라에게도 좋은 감정을 품게 되었다. 그러니 아퀼라와 갈등을 일으킬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그는 사실 지금의 관계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사루비아에게 있어 의지하는 선임이 되고, 가끔 사루비아가 그의 부모님의 안부를 묻는 그런 관계.
그래, 앞으로도 윈터는 그런 위치로 남아 있을 것이다.
마침내 결혼식 식순이 모두 끝났다. 사루비아와 아퀼라는 옷을 갈아입으러 대기실 안으로 사라졌고, 하객들도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윈터의 옆에 앉아 있던 유리가 윈터를 위로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야, 넌 강하니까 이겨낼 수 있을 거라 믿는다.”
“물론 그럴 거다.”
윈터는 담담한 목소리로 답하고는 다리에 힘을 주어 일어났다. 그는 유리와 함께 이동하다 막 사회를 마치고 나오는 알타이르를 만났다.
“야, 윈터! 너 오늘 좀 멋지다?”
“칭찬 고맙다.”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가까이 다가온 알타이르가 윈터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말했다. 반대쪽에서는 유리도 윈터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그 순간, 윈터는 무언가 이상한 사실을 깨달았다.
“왜 둘의 비누 냄새가 같지?”
“…….”
침묵이 감돌았다.
잠시 뒤, 알타이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술이 무섭더라.”
“무섭지.”
유리도 맞장구치는 가운데, 그들 사이에 낀 윈터는 눈을 질끈 감았다.
‘도대체 왜 나만 빼고….’
분명 둘이 절대로 그런 관계가 될 일은 없다고 했는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윈터는 좀 괴로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