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면피인가? 그런데 애초에 나한테 저런 쓸데없는 질문은 왜 하는 거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일단 나는 그의 장단에 맞춰 우리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대답해 주기로 했다.
“왜 그러십니까?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냐, 나는 별일 없어.”
이시나가 녹색 눈을 부드럽게 휘어 웃어 보이며 말했다.
“사루비아 너는 요즘 어때?”
‘…이거였군.’
누가 보더라도 요즘 내 몰골이 나날이 퀭해지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떠보려던 게 틀림없었다. 다 티 나지만.
그나저나 나한테 말을 붙이지 않던 이시나가 먼저 저렇게 말을 걸 정도로 내 상태가 안 좋아지긴 했나 보군.
“그냥… 군대는 늘 똑같지 말입니다.”
“그래? 정말?”
그리고 내가 그 말에 대답하기도 전에 끼어든 건 아까부터 묘한 태도로 아퀼라와 내 주위를 얼쩡거리던 베니의 목소리였다.
“아닙니다. 완전 불면증 상태이십니다.”
“베니!”
‘…내가 누워 있다 말고 가끔 밤중에 욕을 해 대긴 했지….’
아무래도 베니도 그 상황을 해결하고 싶었나 보다. 그런데 감히 내 얘기를 멋대로 해?
나는 매서운 눈으로 베니를 쏘아봤지만, 베니는 평소의 순한 얼굴로 태연하게 답할 뿐이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시나 님이 더 기수가 높으신데, 당연히 제가 답변드려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숙소 가서 보자….”
이시나가 나보다 선임이라는 점을 이용하다니.
‘베니, 재도 많이 컸다….’
“사루비아.”
갑자기 내 왼쪽 귓가에서 뜨거운 숨이 훅 들어와서, 나는 몸을 움찔했다.
“어, 어?!”
아까부터 침묵을 지키던 아퀼라가 내 팔을 받치고 있던 손에 힘을 더욱 주며 말했다.
“그래서 잠은 왜 못 자는 건데?”
…XX, 내 상태를 좀 숨기려고 했는데.
아니, 어차피 이건 내가 죽을 사건이 해결되면 괜찮아질 문제니까. 이시나에 대한 배신감은, 시간이 지나다 보면 자연스럽게 사라지겠지….
“아냐. 요즘 잠깐 잠을 못 자는 거야. 그냥 잠깐 좀 몸이 안 좋아서 그래….”
내가 부정해 봤지만, 아퀼라는 내 말을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무슨 일인데? 말 못 하는 문제야?”
늘 과묵하던 아퀼라는 갑자기 따발총처럼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반대로 이시나는 조용해졌다.
그야 본인도 생각이라는 걸 할 줄 안다면 지난번에 나에게 매정하게 군 것 때문에 이렇게 됐다는 걸 알고 있겠지.
‘XX, 그럼 해명이라도 좀 하든가.’
하지만 이시나는 정말로 아무것도 할 말이 없는 듯 침묵만을 고수할 뿐이었다.
반면 나를 응시하는 아퀼라의 주홍빛 눈에는 평소보다 깊어서 진득하게까지 보이는 걱정이 담겨 있었다.
“최근에 아무 일도 없었는데, 갑자기 잠을 왜 못 자. 도리가 죽어서? 이번 신병이 너랑 안 맞아서? 유리 님과 알타이르 님이 제대해서? …후보가 너무 많네.”
“몰라. 해 줄 수 있는 말이 진짜 없어….”
내가 말해 줄 생각이 전혀 없다는 듯이 끊어 내자 이번에는 아퀼라의 눈빛이 불만스러워졌지만, 이건 정말로 그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중에, 나중에 얘기할 수 있으면 얘기해 줄게.”
“…그래. 그 약속 꼭 지켜.”
나는 아퀼라의 손가락에 힘없이 내 손가락을 걸어 보일 뿐이었다.
* * *
그리고 내가 이렇게 수척해져 가는데 아퀼라만 나를 신경 쓸 리가 없었다.
“…사루비아, 괜찮나?”
“예, 아주 괜찮습니다….”
“목소리에 힘이 없는데.”
“예, 윈터 님이 그걸 예전에 서른 번쯤 말씀하셨는데 제가 아직도 못 고쳤나 봅니다…. 고치겠습니다.”
“…아니, 그런 걸 지적하려던 게 아니다. 이거라도 먹도록.”
나는 윈터가 내 접시 위에 올려 준 사과 푸딩을 내려다보다가 기쁜 마음으로 그것을 먹기로 했다. 푸딩이 두 개라니, 야호.
“아무래도 식사량이 적어서 기운이 없는 것 같은데.”
…윈터의 그 말을 듣고, 나는 우아한 공주님처럼 소식하는 베니의 접시와 평범한 1인분처럼 보이는 내 접시를 번갈아 보았다.
“조금 먹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넷슴다….”
대체 윈터의 기준이 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베니는 저렇게 먹고 있는데, 내가 먹는 양이 적다고?
하, 그나저나 로판에서 여주가 입맛이 없어 비쩍 굶고 있으면 남주는 어떻게든 여주에게 음식을 먹이기 위해 온갖 산해진미를 준비하는 거 아닌가?
그렇지만 이 X같은 군대에서 해 줄 수 있는 거라고는 고작 제 몫의 푸딩을 주는 게 전부다. 역시 이 빙의는 뭔가 잘못됐다.
“수프를 잘 먹지 않길래, 혹시 입맛이 없나 해서.”
“…그건 오늘 패티가 주방에 심부름을 갔다가 실수로 도마뱀꼬리풀 가루를 수프에 왕창 쏟아서… 수프 맛이 형편없어서 그렇습니다….”
베니의 말에 의하면 그건 마물 퇴치용 향료라는데 인간의 입맛까지 퇴치해 버렸다, XX.
“…그렇군. 패티에게는 내가 잘 조치하도록 하겠다.”
윈터의 표정도 아주 떨떠름해졌으나, 그는 곧 원래의 태도를 되찾고는 물었다.
“혹시 원하는 게 있나?”
나는 내 말은 듣지도 않고 나를 금방이라도 죽어 버릴 개복치 취급하는 윈터를 빤히 바라보다가 솔직한 대답을 내놓기로 했다.
“꿀이 뿌려진 자몽과 휘핑크림이 듬뿍 올라간 자몽 타르트와, 청포도와 딸기, 바나나, 멜론으로 장식된 수플레와, 아이스크림을 곁들인 애플 크럼블을 원합니다.”
“…경계 근무 시간을 가장 좋은 낮 시간으로 짜 주지.”
…그렇게까지 해 줄지는 몰랐는데. 흠. 특별히 윈터의 남주력을 +20 해 줘야겠다.
한편, 어떻게든 내 관심을 끌어 보려고 안달 난 카론도 당연히 내 상태를 눈치챈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사루비아 님, 혹시 거슬리는 후임이 있으십니까?”
“응, 바로 너…. 얌전히 좀 있으면 안 되겠니.”
그 말에 카론은 풀 죽은 표정을 했지만, 여전히 나를 졸졸 따라다니기를 멈추지 않았다.
“혹시 밤에 잠이 잘 안 오시는 거면, 뒷산에 있는 마커벨리 꽃가루를 물에 섞어서….”
“그거 마약이잖아, 이 미친놈아!”
아니, 쟤는 기억을 잃었다면서 대체 저런 건 어떻게 기억하는 거지?
“그런 건 도대체 어디서 배웠어? 누가 알려 준 거야?”
“…그러게 말입니다? 제가 이걸 왜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양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카론을 보며, 나는 왠지 답답해져서 또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역시 육아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 * *
나는 오늘도 퀭한 얼굴로 근무를 섰다.
다 포기하고 앉아서 쉬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경계 근무에서 언제 마물이 튀어나올지 모르니 긴장을 풀 수는 없었다.
그나마 나와 함께 근무를 서는 사람이 인성 파탄 85기가 아니라 윈터여서 다행이었다. 아마 윈터가 일부러 이렇게 짜 놓은 거겠지만.
어쨌든 내 옆에는 윈터가 있으니 적어도 이 근무에서 죽지는 않을 것이다.
윈터는 아까부터 내게 아무런 말도 걸지 않고 나를 흘끗대기만 했다.
“…사루비아, 혹시 당분간 휴식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도록. 근무를 최대한 빼 줄 수 있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그건 원칙에 어긋나는 일 아닙니까?”
윈터가 원칙을 따르지 않다니, 이건 정말 이상한 일 같…
‘로판 클리셰?!’
“정해진 규율을 지키지 못하더라도, 가끔은 융통성 있는 판단이 필요한 순간이 있지. 규율은 절대 인간에 대한 배려 위에 설 수 없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순간….”
“아니, 아니, 저는 아주 괜찮습니다….”
…하, 군법보다 ‘인간을 대하는 태도’가 윈터에게 더 중요한 원칙이었던 거군. 로판 클리셰는 무슨, 그럼 그렇지.
기운 없는 목소리로 윈터의 제안을 사양하던 나는, 문득 심상치 않은 기분을 느끼고 몸을 바로 세웠다.
그 기분을 느낀 것은 나만이 아닌지, 윈터 또한 시선을 국경 너머로 고정시키고 있었다.
…뭔가 있다. 분명히 뭔가 있어.
저절로 온몸에 소름이 돋도록 만드는 오싹한 기운. 본능적으로 도망치고 싶어지는 거대한 포식자의 존재감.
바람 한 점 불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국경 근처에 쌓여 있던 나뭇잎들이 사사삭 움직이고 있었다.
‘땅이 진동하는 건가?’
윈터와 내가 이 상황에 대해 말을 주고받을 여유도 없이 잔뜩 긴장하고 있던 바로 그 순간, 땅 위로 검은 그림자가 졌다.
“아….”
나는 순간 탄식했다가 스스로의 소리에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아냐, 조용히 해야 돼. 어쩐지 저 마물은….
‘들키면 안 될 것 같아.’
국경 너머에서 나타난 그 마물은 내가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형태를 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드래곤의 경우에는 정말 흉측하고 공포스럽게 생기긴 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읽은 창작물에서 묘사된 괴물의 형상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건….
‘거대해.’
그건 미처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크기였다. 소설에 빙의하고 이미 몇 년이나 흐른 지금, 그 마물은 내 흐린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고층 건물의 크기와도 비슷해 보였다.
거대한 크기, 표면이 무엇으로 되어 있는지도 알 수 없을 만큼 새까만 몸통.
그 마물은 포유류처럼 생겼지만 여섯 개의 다리를 가지고 있었고, 입은 하마처럼 거대했으며 꼬리는 도마뱀을 닮아 있었다.
내가 숨을 죽이고 총을 든 손을 부들부들 떨고만 있을 때, 국경 쪽으로 접근하던 마물은 마침내 몸통을 돌렸고 그것이 왔던 곳으로 사라졌다.
그것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난 뒤에야, 나는 비로소 숨 쉴 수 있었다.
“허억, 허억….”
다리에 힘이 풀려서 몸이 아래로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뭐 저런 게 다 있어….”
내가 무릎을 바닥에 부딪치기 전 윈터가 내 팔을 붙잡더니, 나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앉혔다.
“윈터 님….”
“사루비아, 많이 놀랐나? 숨 쉬는 데 이상은 없고? 심장에 통증은 없나?”
“…그 정도는 아닙니다만.”
윈터가 오바하는 것을 보니 마물로 인해 빨라졌던 심장 박동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그것보다 방금 그… 저희가 본 마물은 도대체 뭡니까?”
일단 저 거대하고 흉측한 마물이 1급이 아닐 리가 없다. 저건 틀림없는 1급 마물이다. 1급의 종류는 몇 되지 않으니 추론하기 쉽지.
거대한 검은색 몸통, 도마뱀을 닮았으나 여섯 개의 다리가 달렸고, 무엇보다 가장 특징적인 부분은 거대한 입…. 그러니까 분명히 이름이….
“고스트그룸입니까?”
내가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를 입 밖에 내자, 윈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 기억하고 있군. 고스트그룸이다.”
고스트그룸, 즉 ‘유령 신랑’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마물은 거대한 입으로 사람을 통째로 삼키는 마물이었다.
놀랍게도 그 마물은 사람이 아닌 생물은 사냥하지 않는 초식성 마물이었다. 먹는 것이 풀 아니면 사람이라니, 정말 극단적이군….
‘…잠깐.’
고스트그룸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잊고 있던 것 같은데.
‘왜 고스트그룸이라는 이름이 붙은 거였지?’
그래, 분명히 이전에 리니아가 내 옆에서 중얼거리며 암기하는 것을 들었다. 내 머릿속에 복도에 서 있는 리니아의 옆모습이 떠올랐다.
“고스트그룸, 거대한 입으로 사람을 통째로 먹어 치우는 마물. 하, 진짜 안 외워지네…. 아, 주로 여자를 식사로 선호하기 때문에 유령 신랑이라는 이름이 붙음.”
…그리고 원작에서 사루비아를 죽인 마물에 대한 정보가 뭐였지?
하나, 강철도 뚫지 못할 만큼 단단한 가죽.
둘, 거대하다.
XX…. 떡밥이군….
그러니까 이건….
‘내 죽음에 관한 떡밥이잖아, XX!’
벌써 고스트그룸이 원작 사루비아를 통째로 집어삼키는 외전 하나를 다 본 기분이었다.
왠지 돌이켜보니 고스트그룸의 생김새가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이랑도 비슷한 것 같군. 내가 코끼리 신세가 될 수 있다니, 정말 참신한 경험이다.
고스트그룸을 토벌하러 나갔다가 고스트그룸에게 소화되는 내 미래가 벌써부터 머릿속에 그려졌다, X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