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이시나 님, 이시나 님, 이시나 님!”
“사루비아…. 이름은 한 번만 불러도 충분히 들을 수 있어.”
“저 질문할 게 있습니다!”
아침에 이시나를 발견하자마자 내가 호들갑을 떨며 그의 이름을 불렀더니, 피로한 낯의 이시나가 내게로 터덜터덜 걸어왔다.
“왜, 사루비아? 뭐가 궁금한데?”
지친 얼굴이기는 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목소리만큼은 다정했다. 이시나는 나를 대할 때 늘 어린애를 대하듯 저렇게 친절한 목소리를 내고는 했다.
그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원작과 달리 이시나가 나에게 맞후임으로서의 정이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자신의 삶에 별 의미 없던 맞후임1이 죽었는데, 새로운 신병이 그 맞후임1과 닮아서 조금 관심을 가졌다가 정말로 사랑에 빠지고 그녀를 유일하게 특별한 존재로 여기는 상황’ 같은 건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시나 님, 제가 최근 고민이 있는데 말입니다….”
“그래, 말해 봐.”
“요즘 제가 죽음에 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죽음?”
갑자기 무거운 주제를 꺼냈기에, 이시나의 얼굴에는 걱정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그렇지만 그는 워낙 표정 연기를 잘하는 사람이라, 저게 진짜 걱정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예. 지금까지 많은 후임들이 죽었지만 저희는 그들의 죽음을 이겨 내고 늘 가볍게 넘기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제가 죽어도….”
나는 고개를 들어 이시나의 진녹색 눈을 마주 보았다.
“제가 죽었는데 제 주변 사람들이 저를 잊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길까 봐. 그게 두렵습니다.”
원작의 이시나처럼 “죽은 거는 어쩔 수 없지, 뭐~.” 할까 봐 불안하고 두렵다는 소리였다.
“무, 무슨 그런 생각을 해, 사루비아?”
이시나가 당황한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그의 표정을 보며 내 희망은 더욱 커져 갔다. 이시나는 내가 한 말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으니까.
“쓸데없는 생각일지는 몰라도, 그냥 제가 죽어도 저를 마음속에서 떠나보내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는 확신을 얻고 싶었습니다.”
“사루비아, 네가 죽으면 틀림없이 슬퍼할 사람들이 있어. 당장 아퀼라나 카론만 해도 제대로 일상생활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야.”
내가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꺼낸 영문을 알지 못하겠지만, 일단 이시나는 금방 침착한 태도를 되찾고 설명을 시작했다.
“그리고 죽는다니, 그런 불길한 얘기는 입에 담지 마, 응?”
나를 달래듯이 한 말에, 나는 이제 진짜 본론을 꺼내기로 했다.
최대한 여유롭게 말하려 했지만, 긴장을 담은 목소리가 저절로 떨려 왔다.
“그럼, 이시나 님은 제가 죽으면 어떠실 것 같습니까?”
“…그걸 왜 나에게 묻는 거야?”
“그거야 제 맞선임이시기도 하고, 그리고….”
나는 이시나만 이해할 수 있을 어조로 뒷말을 흘렸다.
“이시나 님은 감정에 있어서 깔끔한 편이시니까….”
겉보기에는 다정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다른 사람과 그 어떤 유대 관계도 맺지 않는 것. 이게 내가 원작에서 읽은 이시나였다.
내 앞에 있는 이시나라면 내가 ‘감정에 있어서 깔끔하다’라고 말한 게 무슨 의미인지 이해했을 것이다.
나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이해하고 있고, 나에게 그 모습을 드러내도 괜찮다고 간접적으로 말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
그러나 이시나는 내 질문에 답변하지 않고 한참 동안이나 침묵했다.
“이시나 님…?”
“…미안, 사루비아. 가 봐야겠어.”
“예?”
“생각해 보니 숙소에 끝마치지 않은 일이 있어서.”
그는 그 말을 남기고 숙소가 있는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건 누가 보더라도 상황을 회피하려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하하, 네가 죽어도 너를 절대 안 잊지. 네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데?’라는 말 같은 건 거짓말로라도 할 수 없는 사람처럼.
“…이시나 님!”
이대로 놓칠 수는 없었다. 나는 이시나가 조금 전 보인 거부의 태도를 애써 무시하고 그에게로 달려가 이시나의 앞을 막아섰다.
“저, 왜, 왜 대답 안 해 주십니까…?”
“사루비아.”
“얼마 전에 제가 솔직하게 말하면 저를 도와주실 수 있냐고 물었을 때, 도와주지 않을 거라고 하신 것과 같은 맥락이신 겁니까?”
이시나는 내게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는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사루비아, 나는 네 말대로 감정에 있어서 깔끔해.”
“그럼….”
“알잖아, 널 굳이 도울 이유는 없어.”
그렇게 말한 이시나는 뒤돌아 나를 떠났다.
이번에는 나도 그를 붙잡지 않고 한참 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어?”
이시나가 떠난 자리를 쳐다보는 내 얼굴이 왕창 일그러졌다.
예의상 “그래도 너는 맞후임인데 절대 못 잊어.”라거나 영혼 없더라도 “아, 진짜? 너무 슬프겠다.” 이 정도의 말은 해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그리고, 내가 그 뒤에 추가로 물었을 때 이시나는 자신에 대해 완전히 솔직하게 털어놓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감정에 있어서 깔끔하다’.
내가 알고 있는 그의 사고방식이, 나에게만 예외인 것은 아니라고.
즉 나도 그에게 지나가는 부대원1의 위치에 불과할 뿐이라고.
“아, 진짜….”
나는 결국 무릎 위로 얼굴을 파묻었다.
원작이랑 인간관계가 달라지기는 무슨, 다 내 망상이었다.
원작에서 사루비아를 사랑했던 아퀼라와 윈터가 여기선 날 사랑하지 않긴 하지만, 사실 아퀼라나 윈터의 감정이 원작과 다른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이 원작처럼 나를 사랑하여 집착하지 않더라도 이미 아퀼라는 유일한 동기로서 나에게 헌신적이었고, 윈터 또한 모범적인 선임이었으니까.
그렇지만 내가 지금까지 꽤 의지하던 맞선임이, 원작에서 그러했듯 나를 죽어도 상관없는 존재 취급한다는 건 좀 서러웠다.
이시나는 원작과 같다. 그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시나는 내가 죽어도 동요하지 않을 것이고, 내가 그에게 유대감을 느끼는 만큼 그는 나에게 유대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 * *
이시나가 내게 보인 태도는 내게 큰 배신감을 안겨 주었고.
그 감정은 이제 불면증으로까지 이어졌다.
“에휴….”
분명 새벽일 게 분명한데도, 나는 아직 잠에 들지 못했다.
원래 군 생활이라 함은 침상에 머리가 닿기만 해도 눈이 스르르 감기고 눈을 잠깐 감았다 떠도 몇 시간이 훌쩍 지나 있는 게 일반적인데, 분명히 지치고 피로한데도 나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내 머릿속에 죽은 부대원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내 동기 리니아, 칼, 마그네, 요한, 빌리, 히포….
레이나 기수의 네 명이랑, 황태자 습격 사건 때 입대하는 바람에 들어오자마자 청소부터 해야 했던 두 명이랑…. 자이든의 동기도 세 명인가 네 명인가가 죽었고…. 베니의 동기인 샤인, 머슬, 또 누구였더라? 어쨌든 그 세 명이랑….
그리고 일등병일 때 사망했던 선임 데닌 님이랑….
아, 일주일 전에는 도리가 죽었다….
“흑, 킁.”
이게 슬퍼서인지 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래, 내가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부대원들의 죽음에 슬퍼할 일도 없으니 아무래도 난 화가 난 것 같다.
내가 다른 부대원들의 죽음에 익숙해졌듯, 다른 사람들도 내 죽음에 익숙해질 생각을 하니 분하고 서러워서.
‘나는 내 이름까지 포기했는데.’
이 세계에서 앞으로 더 잘 살아가기 위해, 나는 내가 가진 가장 소중한 기억, ‘원래의 내 이름’을 포기했다.
빙의 초반의 내가 잠들기 전 그 이름을 입 안에서 굴리던 순간을 기억한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 이름이 무엇인지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그건 단순히 내게 이름이었을 뿐 아니라, 이전 세계에서의 나 그 자체였다.
나에게는 더 이상 이 세계밖에 남아 있지 않고, 이 세계에서 아는 사람들이라고는 부대원들밖에 없는데.
그 사람들마저 나를 잊는다면, 나는 두 세계에서 모두 사라지는 것이었다.
“흐읍….”
자고 있는 베니와 에인젤에게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울고 있자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거 우울증인가?’
지금 내 정신 상태가 별로 정상적이지 않은 거라는 건 잘 알겠다. 하지만 뭐 어쩌겠어, 여기서 병원을 갈 것도 아니고.
결국 그날 나는 혼자 이불 속에서 훌쩍이다가 밤을 지새웠다.
* * *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날로 수척해지는데 남들이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할 리는 없었다.
“사루비아, 어디 아파?”
“아니.”
나는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지만, 아퀼라는 두 손으로 내 뺨을 감싸며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다크서클이 생겼는데.”
“그냥 피곤해서 그래.”
“며칠째 잠을 못 잔 거처럼 보여.”
…역시 아퀼라, 관찰력이 아주 뛰어나군.
“글쎄….”
내가 말할 마음이 없다는 듯 의욕 없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아퀼라도 나에게 요즘 피곤해하는 이유에 대해 더 캐묻지는 않았다.
‘이건 솔직하게 얘기할 수도 없으니까….’
내가 발버둥쳐도 바뀌지 않는 원작의 흐름과 이시나에 대한 배신감 때문에 불면증이 생겼다고 말할 수도 없고. 이걸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그러나 아퀼라가 물러났다고 해서 끝은 아니었다. 나와 최근에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았던 사람까지도 내 얼굴을 보고 흠칫하더니 나에게 말을 붙여 왔으니까.
“사루비아, 오늘 식사는 어땠어?”
“예?”
아퀼라와 내가 식사를 마치고 나와 식당 앞에 서 있었을 때, 이시나가 다정한 목소리로 그렇게 물은 것이었다.
정말 뜬금없는 일이었다.
나는 저 질문을 한 사람이 정말 이시나가 맞는지 다시 한번 확인했지만, 지금 이 순간 다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건 분명히 이시나가 맞았다.
내가 비틀거리자 아퀼라가 내 팔을 붙잡고 받쳐 주었고, 나는 이상하다는 눈으로 이시나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식사야 뭐… 평소랑 같지 않습니까?”
“으응, 그렇구나. 그러고 보니 최근에는 네가 좋아하는 푸딩이 나온 기억이 없네. 이번 주에 나왔으면 좋겠다, 그렇지?”
“예…. 그런데….”
얼마 전의 일로 이시나는 나를 어색해하는 듯했고, 당연히 나도 이시나를 껄끄러워하고 있었다. 우리가 대화를 나누지 않게 된 지도 며칠이 지났다.
그런데 갑자기 아무 일 없었다는 양 나에게 저렇게 친절하게 구는 걸 보면, 그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