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아포칼립스는 예고 없이 찾아오는 법이다.
제대 D-1825일.
“사루비아 님, 신병입니다!”
“그래, 그렇구나….”
편한 자세로 늘어져 있던 내가 의욕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베니의 뒤에는 키가 작은 금발의 신병이 서 있었는데, 여느 신병이 그러하듯 아주 어리바리해 보였다. 베니는 여자 후임이 들어와서 신난 것처럼 보였고.
하지만 난 신병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 이유야….
‘쟤 원작에 없었잖아….’
원작에서 달린에게 베니를 제외한 다른 여자 선임은 없었다. 그러니 저 신병은 얼마 안 가 죽을 것이다.
“베니, 네가 대충 도와줘.”
“앗, 알겠습니다! 에인젤, 이리 와!”
이름이 에인젤인가 보군.
어쨌든 내가 에인젤과 별다른 유대감을 쌓은 것도 아니고, 알타이르에게 했듯이 에인젤의 생존을 도와줄 마음은 당연히 없었다. 애초에 에인젤이 언제 죽는지도 모르고.
나는 이미 예전에 레이나를 살리는 데 한 번 실패했다. 거기서 깨달았지.
살아남는 일은 신병 스스로의 몫이다.
“하암….”
나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다가, 한 시간 뒤면 경계 근무 시간이므로 이 비는 시간에 그냥 낮잠이나 자기로 했다.
유리가 진급하여 떠나면서 난 자연스럽게 이 숙소에서 가장 기수가 높은 사람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 숙소에서만큼은 나는 자유지. 기수가 아주 제대로 풀렸다.
“자, 에인젤. 세면도구는 여기 두면 돼.”
“예, 알겠습니다!”
…베니가 죽을 운명의 신병에게 잘해 주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마음이 참 심란하고 착잡해진다.
도대체 내가 왜 이 X같은 아포칼립스 세상에 있는 거지?
“에휴, XX!”
내가 허공에 대고 욕을 하는 와중에, 베니와 에인젤이 옆에서 속닥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사루비아 님은 정말 좋은 분이셔.”
“그, 그렇습니까…?”
“하지만 조금 미쳐 있으실 뿐이야.”
“아하….”
아오, 베니 쟤가 요즘 짬을 먹더니 간땡이가 부었군…. 내가 아직 일등병이니깐 참는다, 진짜….
* * *
좋아, 솔직히 말해서.
내가 느끼기에도 요즘의 나는 극도로 예민한 상태였다.
그리고 내가 이토록 부쩍 상태가 안 좋아진 이유는, 바로 ‘원작 사루비아의 죽음’ 때문이었다.
‘분명히 이 시기에 죽었어.’
원작에서 사루비아는 달린이 입대하기 정확히 1년 전에 죽었다. 달린은 아퀼라가 막 상등병이 되었을 때 입대했고, 우리가 상등병이 되는 건 정확히 1년 뒤이니….
그러니까 여기서 로판에 빙의한 조연답게 ‘원작을 바꾸고 내 죽음을 막자! 그 뒤에는 남주와 여주가 잘 이어지도록 원작에서 퇴장해 주는 거야!’라고 생각해 줘야 할 타이밍인데….
‘XX, 원작에 힌트가 너무 적었잖아.’
원작 사루비아가 어떤 사건으로 사망했는지는 묘사되어 있지 않았다.
원작 남주들은 달린에게 ‘너는 오래전 죽은 그 애를 참 닮았군.’을 마지막으로 사루비아에 대한 어떠한 묘사도 하지 않았다.
그나마 내가 원작 사루비아의 죽음에 관해 가지고 있는 정보라고는 베니가 달린에게 한 대사뿐이었다.
“사루비아 님은… 그분들의 첫사랑이셨어. 그리고 마물 때문에 그만…. 아니다, 이 얘기는 그만하자.”
그래, 정말 이것만이 전부였다!
하다못해 원작 윈터는 알타이르의 죽음을 얘기할 때 ‘행군’이라는 배경이라도 제공했었는데, 내 죽음의 경우는 ‘마물’이라는 정보만이 전부였다! 아니, 그럼 여기서 당연히 마물 때문에 죽지. 뭐 때문에 죽겠냐?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저번에 옆 대대에서 무기 사고로 누가 사망했다고 하지 않았나?’
나는 마물이라는 정보라도 준 것에 감사하기로 했다. 맞다, 군대는 참 다이내믹한 곳이었지….
사망 원인이 마물이라는 건 경계 근무 때거나, 토벌 때거나, 혹은 행군과 같이 돌발 이벤트로 사망했다는 거겠지.
돌발 이벤트라니, 정말 미연시 같지만 여기엔 미소년도 없고 연애도 없다.
‘역시 경계 근무일 가능성이 높나? 아니면 보통 토벌 때 만나는 마물의 등급이 더 높으니까 토벌?’
“아, XX 빡쳐!”
허공에 대고 소리를 질러 봤지만, 안타깝게도 내 분노는 가시지 않았다.
아냐, 일단 침착하자…. 침착하고, 생각을 하는 거야….
‘정말 원작에 아무런 정보도 없었나?’
흑마술 아티팩트를 이용한 만큼, 원작의 작가보다도 내가 원작에 대해 더 자세히 외우고 있을 것이다. 처음부터 찬찬히 뜯어보면 답이 나올지도 모른다.
‘원작 사루비아의 죽음에 대한 묘사가 없었다면….’
그럼 마물과 관련된 정보들을 모두 떠올려 보자….
나는 정신을 집중하고 1화부터의 원작 내용을 복기해 보았고…
조금 뒤, 내 머릿속에 문장 하나가 번뜩 떠올랐다!
“하아, 하아….”
[아퀼라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검에 의해 완전히 배가 갈라진 거대한 마물의 앞에서, 오래전의 기억이 겹쳐 보였다.]
…아, 찾았다.
아퀼라 시점에서 묘사되었던 49화.
마물에 먹힐 뻔했던 달린을 간신히 구하고 나서, ‘마물에 먹힐 뻔한 상황’에 대해 트라우마를 느끼는 장면.
[그는 강철도 뚫지 못한다는 단단한 가죽을 가진 마물을 어떤 심정으로 죽였는지 똑똑히 기억한다.
그가 평소 싫어하던 얼음 속성 오러를 사용하는 선임이, 이를 악물고 배를 가를 때 어떤 심정으로 간절히 기도했는지 기억한다.
그리고 마침내 마물의 위장까지 갈라졌을 때.
강산성의 위액 속에서 간신히 발견했던 흔적.
생기를 잃은 흰 팔을…]
“아퀼라 님!”
“…아, 달린.”
“괜찮으십니까? 갑자기 숨을 못 쉬는 것 같으셔서….”
[아퀼라는 그 악몽 속에서 자신을 깨워낸 존재를 바라보았다.]
“그래, 네가 있었지….”
[과거의 일에 휘둘리면 안 된다는 사실을 이제 그는 알고 있었다.
아직 그에게는 미래가 남아 있었다.]
‘…아, 왜 이렇게 빡치지?’
원작에서 아퀼라와 달린이 있는 장면만 떠올리면 유독 빡치는데, 역시 동기가 오글거리게 행동하는 꼴을 보면 빡치는 건 당연한가 보다.
하지만 내가 지금 집중해야 할 부분은 그게 아니다.
‘원작 사루비아는 마물에게 먹혔구나.’
사루비아는 ‘강철도 뚫지 못한다는 단단한 가죽’을 가진 ‘거대한 마물’에게 먹혔다.
뒤늦게 남주들이 마물의 배를 갈랐으나, 그때의 사루비아는 이미 마물의 위에서 소화… 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로테스크하군….’
아퀼라와 윈터가 동시에 존재했던 상황을 보면, 경계 근무가 아닌 마물 토벌을 나갔을 때 사건이 발생했을 것이다.
그러니 당분간 마물 토벌을 주의하면 데드 엔딩을 피할 확률이 높아지지 않을까?
‘그런데 여기서 내가 뒤지면 어떻게 되지? 지구로 돌아가나?’
당연히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지만, 이 고생을 해 놓고 지구로 돌아간다면 또 그것도 억울하다. 내 3000마크네 내놔, XXX들아.
아마도 내가 여기서 죽으면 갑자기 원작 전개가 시작되고 갑자기 분위기는 로판이 되겠지? 갑자기 나와 친해진 남주들은 이제 원작 여주에게 플러팅을 던지기 시작할 거고?
지금의 남주들은 나와 친해지긴 했지만, 원작에서처럼 나를 사랑할 기미는 추호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늘 내 앞에서 관심을 구애하던 카론이 나 대신 달린을 졸졸 쫓아다니는 모습을 상상해 봤다. 음, 그때는 지금보다 얌전하겠지? 하, 얘를 얌전하게 키워 놓은 건 난데.
윈터는 약한 달린이 안전하도록 통제하려고 들고, 달린에 대해 하나부터 열까지 꼬치꼬치 캐묻겠지?
‘그리고 아퀼라는….’
윈터와 마찬가지로, 아퀼라는 나를 그냥 유일한 동기 정도로만 보는 것 같지만, 그렇지만….
“아오, XX 빡치네!”
나는 갑자기 걔가! 나랑 같이 고생해 놓고! 짬 먹은 뒤에! 누군가를 차별 대우할 생각을 하니! 또 열받기 시작했다! 대체 왜 이렇게 열받는 거지?!
“죽여 버릴 거야.”
“사루비아 님? 무슨 일이십니까?”
…아, 생각해 보니 지금 잘 시간이었지.
나는 눈을 비비며 비몽사몽한 표정으로 일어난 베니와, 그 옆에서 필사적으로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을 하는 에인젤을 번갈아 보다가 미안하다며 손짓을 했다.
베니가 다시 얌전히 자리에 눕는 것을 확인한 나는 화를 좀 가라앉힌 뒤에 깜깜한 어둠 속에서 원작에 대한 생각을 이어갔다.
‘사실 다른 사람들보다도 이시나가 제일 빡쳐.’
원작에서 이시나는 여주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한테는 별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일종의 소시오패스처럼 묘사되었다.
자신에게 늘 친절하게 굴던 이시나와 대화하던 달린은, 그에게 우연히 사루비아에 대해 질문하게 되고, 거기서 이시나의 서늘한 면모가 드러난다.
“누구? 아, 사루비아…. 그래, 너랑 닮았지….”
“…그분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그런 건 왜 묻니, 달린?”
“아…. 저, 그분이 마물 때문에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다들 그분을 많이 좋아하셨는지,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일단 달린의 따뜻한 마음씨를 알 수 있는 대사가 먼저 나온다.
“마, 만약 제가 그분이었다면…. 이곳에서 이름을 끝내기보다는, 자신의 이름이 조금이라도 더 기억되길 바랐을 것 같습니다.”
자신과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기억해 주려는 저 마음!
“그래서… 그분에 대해 제가 기억하고 싶어요.”
여기서 대사가 ‘요’로 끝난 건 넘어가도록 하자. 나는 이 원작 소설을 읽었을 때는 사실 말투가 크게 중요하지 않은 줄 알았다…. 물론 입대한 뒤에야 그게 원작 여주 한정임을 깨달았지만.
어쨌든, 달린의 이 따뜻한 대사에 대해 이시나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달린, 그렇게까지 해 줄 필요 없어…. 죽은 건 중요하지 않으니까.”
여기서 달린은 경악하고! 독자들도 이시나가 저런 애였냐고 경악하고! 그리고 나도 경악할 거다! 이시나, 이 피도 눈물도 없는 놈아!
막 입대했을 때는 구르느라 별생각 없었는데, 숙소에서 기수가 풀리고 몸이 편해지니까 이제 좀 빡치네!
죽은 거? ‘죽은 거’?!
어떻게 3년간 동고동락한 본인의 맞후임을 그렇게 칭할 수 있지? 아무리 생각해도 진짜….
“개빡쳐, XX!”
“사루비아 님, 혹시 저희가 무슨 잘못이라도….”
“아악! 내가 진짜 빡쳐서 어떻게든 살아남고 만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베니가 모른 척하고 결국 다시 돌아누웠다.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한참 동안 씩씩대다가 나는 문득 내가 이렇게 빡쳐 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원작이랑 똑같이 흘러간다는 보장이 없잖아?’
생각해 보니 이미 내가 살아가는 이 세계는 원작과 달라진 점이 너무나 많았다.
물론 원작의 ‘알콩달콩로맨스군부물~’이 ‘지옥의핵불닭마라맛군대에서살아남기’가 된 거는 둘째치고서라도.
‘아퀼라랑 윈터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부터가 원작에서 틀어진 거잖아?’
그것 말고도 차이점들은 더 있었다.
예를 들어, 이시나는 원작에서 무기로 총을 쓰던 것과 달리 지금 검을 쓰고 있었다!
게다가 원작과 달리 내 덕분에 알타이르는 죽지 않았고!
그렇다면 원작의 스토리와는 이미 좀 다른 길을 가기 시작한 게 아닐까?
가라앉아 있었던 기분이 제 고도로 돌아왔고,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꼭 인적 없는 숲에서 헤매다가 불빛을 발견한 감각이었다.
‘내가 너무 오바했나?’
물론 인간관계는 변하더라도 ‘일어날 사건’ 자체는 변하지 않는 것 같으니, 원작에서의 내 죽음에 대비할 필요는 있겠지만….
원작의 사루비아와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이니, 원작에서처럼 이시나가 충격과 공포의 ‘죽은 거’ 단어를 사용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며칠 전 이시나와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너 뭘 꾸미고 있는 거니?”
“제가 솔직하게 말하면 도와주실 겁니까?”
“…아니?”
그때는 애써 가벼이 넘기긴 했지만.
나는 그때 이시나와 내 사이에 흐르던 묘한 긴장감을 기억한다. 단호하게 “아니.”라고 대답하던 그때, 순간적으로 이시나가 지은 표정을.
그 일로 이시나와 내 관계에 변화가 생기는 일은 없었으므로 애써 잊고 있었는데, ‘이시나가 원작처럼 나를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생각하고 있나?’에 대해 고민을 시작하니 다시 그 상황이 떠올랐다.
‘아니, 그래도 그것만으로는 모르는 일이니까….’
사실 이시나가 나를 자신과 동등한 인간으로 보고 있을 수도 있지 않나? 내가 그동안 너무 오바한 거고, 사실 원작에서처럼 흑막 소시오패스가 되지는 않을지도?
…흠, 아까부터 자꾸 내 생각이 갈팡질팡하는 것 같은데.
‘그냥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이시나한테 물어봐야겠다. 내가 죽으면 어떨 것 같냐고.’
나 혼자 고민하느니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훨씬 간단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