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흡, 팔이….”
“파, 팔?”
유리는 그제야 녹아내리듯이 된 내 팔 부근의 옷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이게 뭐야?!”
정신을 차리고 가까이 다가온 알타이르도 상황을 파악했는지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산에 닿았나 본데? 일단 응급처치라도 해 놔!”
“아, 물!”
알타이르의 말에 이내 침착함을 되찾은 유리가 수통을 열더니 내 팔 위로 물을 확 들이부었다.
그러자 팔이 더 쓰라려져서 그냥 나는 더 울기 시작했다. 이젠 될 대로 되라는 마음이었다.
“사루비아, 뚝, 뚝.”
가까이 다가온 이시나가 나를 품에 안고 익숙한 손길로 등을 두드려 주기 시작했다.
“흐윽, 아니, 킁! 아프, 흡.”
“응, 응. 아팠구나.”
그가 나를 달래는 동안에, 유리와 알타이르는 빠르게 응급처치를 마쳤다.
하도 울었더니 눈물이 시야를 가려서 앞이 보이지 않는 지경이었다. 이시나가 계속 등을 두드려 주니 나는 오히려 더욱 서러워졌다.
도저히 울음을 멈출 기미는 보이지 않아 그냥 내가 이 감정을 전부 쏟아내고 있을 때, 아퀼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 왜 다쳤어?”
남은 사람들이 하도 오지 않으니 다시 내려와 본 모양이었는데, 이 순간에는 그가 너무 반가웠다.
“나, 나 추워, 흡.”
“추웠어?”
아퀼라가 내 몸을 붙들며 그렇게 묻자, 새로운 수통을 꺼내 물을 들이붓던 유리가 물었다.
“안 뜨거워? 추워?”
“아, 아니, 흡, 춥습니다, 흡, 흐윽.”
“그, 그래….”
그냥 이 상황이 너무 서러워서 어린애처럼 엉엉 울며, 동시에 나는 비로소 모든 것이 끝났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이로써 원작 알타이르의 죽음도 막고, 내 행군도 끝난 것이다.
그리고 나는 도무지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뚝, 뚝.”
나를 달래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나는 울먹거리는 얼굴로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고아원에서 지냈던 그때, 외로웠던 며칠의 기억.
내가 빙의하기 전의 사루비아가, 고아원에서 어울리지 못하고 늘 이질적으로 지내야 했던, 늘 혼자였던 기억들.
입대 초, 국경방위군에 적응하지 못하고 늘 탈영하고 싶어 했던 나와, 그런 내 곁에 있던 몇몇의 동기들.
그리고 지금.
내 눈앞에는 나를 어떻게든 달래려 드는 동기도 있었고, 맞선임도 있었고, 유리와 알타이르도 있었고….
‘이 세계가 X같은 아포칼립스인 건 맞는데.’
이상하게도 난 지금 이 순간이 좋았다. 내가 지금까지 겪어 온 과거보다, 현재가 좋았다.
원작에 대한 기억을 얻겠다고 내 이름을 버렸던 일은 내게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었고, 평생 내가 잃어버렸던 내 이름을 극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 무거운 경험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가능성을, 아주 조금 엿본 것 같았다.
“어우, 멍든 것 좀 봐.”
내 팔 부근의 옷을 찢겨 내던 유리가 질색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총을 연습하느라 내 오른쪽 어깨에 늘 진하게 나 있던 멍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이것도 다친 건 아니겠지?”
“아냐, 이건 총 때문에 그런 거야.”
유리와 알타이르가 대화를 하며 내 상처에 응급처치를 하는 동안에, 나는 가장 앞쪽에서 나를 달래던 이시나에게 물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전, 전… 돌아가기 싫습니다.”
“그래, 그래.”
사람이 살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건 당연한 거고, 그래서 늘 생각해 왔던 거지만, 이걸로 나는 더욱 마음을 굳게 먹었다.
난 절대로 원작 사루비아처럼 죽지 않을 거다. 내가 지금까지 쌓아 올린 이 모든 관계들을 잃고,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내 이름을 버림으로써, 나는 내 이전 세계 또한 스스로 박살 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내게 선택지는 하나였다.
“입대하기 전보다, 킁… 차라리 지금이, 지금이 낫습니다…. 그러니까 절대 안 돌아갑니다.”
“그래, 너는 안 돌아갈 거야.”
다정하게 달래 주는 목소리 속에, 몸의 기운은 점점 빠져 가는데도 머리만큼은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난 절대로 안 죽는다.
이 미친 아포칼립스 세계에서, 절대로 내 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 * *
중대로 이동하는 길.
사루비아가 아퀼라에게 업혀 가는 뒷모습을 보며, 유리가 제 왼쪽에서 걷던 윈터에게 물었다.
“야.”
“…아, 어?”
윈터는 딴생각에 빠져 있었던 건지, 유리의 말에 어색하게 반응했다. 그 모습을 보며 유리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고 싶은 심정이었다.
유리는 아까 전 사루비아가 울던 모습을 떠올렸다.
첫 행군이어서 가뜩이나 고생했는데, 그 상태로 갑자기 나타난 마물을 죽이느라 놀랐을 거고, 팔까지 다쳤으니 눈물이 나올 만했다.
아퀼라와 이시나는 사루비아를 아주 익숙하게 달랬다.
그리고 그때, 허겁지겁 응급처치를 마치고 물러났던 순간에, 유리는 윈터의 얼굴을 봤다.
‘…고장 났었지.’
다들 응급처치를 하거나 사루비아를 달래고 있던 때, 윈터는 홀로 조금 떨어진 곳에 굳은 채 서 있었을 뿐이었다.
그는 분명히 놀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울고 있는 사루비아가 너무 어색해서 어쩔 줄 모르는 것 같았다.
“야, 이렇게 될 줄 몰랐냐?”
유리가 윈터를 노려보며 말했다.
“내가! 그렇게 안 강하다고! 했잖아!”
그녀의 힐난에 윈터가 어색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러게.”
그의 입에서 나오는 건 유리가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낯선 목소리였다.
“왜 이렇게 약하지?”
“…뭐?”
윈터의 왼쪽에서 걷고 있던 알타이르도 이상한 눈으로 윈터를 돌아봤다.
“그건 네가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어서 그렇고. 저 상황에는 충분히 울 수 있….”
알타이르는 자신을 도운 사루비아를 변호하기 위해 꺼낸 말이었지만, 윈터가 ‘약하다’라고 말한 의중은 그가 생각했던 것과 달라 보였다.
“그래… 약하군….”
윈터는 이미 알타이르와 유리의 존재 따위 인식하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렇지만 강해.”
“뭐?”
“연약해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그 무엇보다 강인하다고.”
그는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약하다’와 ‘강하다’라는 말만 번갈아 중얼거리다가, 푸른 눈으로 저 멀리 걸어가는 사루비아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그 모습을 지켜본 알타이르와 유리가 어색하게 눈빛을 주고받았다.
‘유리, 저 상태 뭔가 이상한 것 같지 않냐?’
‘그래.’
‘착각은 아니겠지?’
‘대부분의 착각은 사실이더라.’
‘그럼 확실하네.’
알타이르는 한숨을 푸욱 내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해가 뜬 하늘은 이 난장판에 어울리지 않게 산뜻했다.
‘내 동기가 전출 위험에 놓였군….’
알타이르는 부디 윈터가 자신이 생각한 ‘그 감정 상태’가 아니기를 기도했다.
* * *
“사루비아.”
“예…?”
반쯤 정신을 잃은 채 숙소에 누워 있던 나는, 누가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떴다.
지옥의 행군 후 소대 전원은 휴식 상태에 빠졌고, 경계 근무를 서야 하는 인원만 제외한 채 모두 잠에 빠져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나의 경우에는 부상을 입었기 때문에 당연히 근무에서 빠졌고.
중대에서 의무관한테 확실히 치료를 받고 다친 부위는 괜찮아진 것 같긴 했는데, 행군을 한 상태로 울기까지 했으니 탈진해서 계속 누워 있었다.
“알타이르 님?”
내가 간신히 눈을 떴을 때 보인 건 숙소 입구에 서 있는 알타이르였다.
막 잠에서 깨 몸을 일으킨 듯한 유리가, 알타이르에게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알타이르는 문을 닫고 숙소 안으로 들어왔다.
“다친 데는 좀 괜찮냐?”
“아, 예. 며칠만 있으면 완전히 아물 거라고 했습니다.”
“그래, 다행이네.”
그는 그렇게 말하더니 괜히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나를 보며 말했다.
“야, 나 살려 줘서 고맙다.”
“아….”
“너 아니었으면 난 뒤졌을걸.”
“그건 맞아. 넌 정말 사루비아에게 고마워해야 해.”
옆에서 유리도 끼어들었다.
“뭐, 그래서….”
평소에 이런 말을 잘 하지 않는 알타이르가 낯부끄러운 듯 자신의 머리카락을 털었다. 그러나 그는 유리의 재촉하는 듯한 눈을 마주치고는 결국 입을 열었다.
“어려운 일 있으면 말하라고.”
“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 도와줄 테니까.”
유리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내 얼굴이 환해졌다.
‘실세 라인 탑승하는 소리가 들린다!’
물론 알타이르와 유리는 그동안 티 나게 나를 챙겨 주기는 했지만, 내가 알타이르의 목숨을 살린 일로 알타이르는 진심으로 감명받은 듯했다.
이제 그들의 위에 있는 상등병들도 가그네와 자라밖에 없었으니, 내가 이전보다 더욱 막 나가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을 거다.
‘내가 자기 동기를 살려 줬는데, 윈터도 나한테 잘해 주겠지.’
나중에 윈터가 이 부대의 지휘사관으로 진급한 뒤에도 내 라인은 튼튼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내가 밝은 표정으로 웃고 있을 때, 숙소를 나서기 전 알타이르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 그리고….”
“예.”
“혹시 윈터의 행동이 이상해 보이면.”
“예?”
“바로 보고해라.”
알타이르는 그 말만을 남기고 나가 버렸다.
‘뭔 소리야?’
나는 설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유리를 쳐다봤지만, 유리는 괜히 헛기침을 흠흠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리 님?”
“야, 알타이르! 같이 가!”
유리까지 나가 버린 자리를 보며, 나는 좀 어리둥절한 기분이 되었다.
“대체 뭔데.”
혹시 드디어 빙의물 로판 클리셰에 따라 원작 남주2인 윈터가 나에게 반해 버리기라도 한 걸까?
하지만 난….
‘안 속는다, 이 XX들아.’
내가 이 미친 세계에 속은 게 몇 번인데! 안 속아! 절대 안 속아!
* * *
“자, 내 동기야. 이제 진솔한 자아 성찰 시간을 가져 보자.”
윈터의 왼쪽에 앉은 알타이르가 말했다.
“그래, 우리 두 손을 맞잡고 이 고민을 함께 나눠 보자.”
윈터의 오른쪽에 앉은 유리가 말했다.
그러나 알타이르는 유리의 말에 곧장 기겁했다.
“뭐? 내가 이 칙칙한 자식이랑 두 손을 맞잡아야 한다고?!”
“…그럼 우리 둘이서 잡든가.”
결국 진솔한 대화를 나누기 위해 알타이르와 유리는 윈터를 사이에 두고 두 손을 맞잡았다.
분명히 뭔가 이상한 것 같은데. 유리가 찜찜한 눈빛을 했고, 윈터도 잠깐 혼란스러워진 것 같았지만, 어쨌든 그들은 대화를 나눠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