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타로의 말대로, 점점 이상 증세를 보이는 병사들은 늘어나기 시작했다.
환각을 봤을 때 아까처럼 격하게 반응하는 병사는 드물었지만, 많은 병사들이 길을 왜곡되게 보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눈을 감은 채 다리만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XX….”
이제는 나오는 말이 욕밖에 없었다. 그나마 나는 환각이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잠시 휴식!”
그때, 지금 이 순간 제대 명령 다음으로 반가울 말이 들려왔다. 곳곳에서 부대원들이 바닥에 주저앉는 소리가 들렸고, 나도 반쯤 감긴 눈으로 겨우 자리에 앉았다.
“하아, 하아….”
“괜찮아?”
휴식 시간이 되자 가까이 온 것인지, 귓가에서 아퀼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추워.”
“…추워?”
그가 반응하기도 전에, 나는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응, 추워…. 그래도 난 환각은 안 봐서 다행이야….”
“괘, 괜찮아?”
당황했는지 아퀼라는 드물게 말까지 더듬었지만, 나는 고개를 다시 세울 힘이 없었다.
“물 좀 먹여.”
“사루비아, 물 마실래?”
이시나와 아퀼라의 목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나는 물을 달라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곧 내 입으로 수통이 다가왔고, 나는 그것을 입에 물었다.
…그리고 잠시 이시나와 아퀼라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여전히 정신은 온전치 않아서 시야가 흐릿하게 보였다. 다만 그 사이로 아퀼라의 주홍빛 눈만은 분명하게 보였다. 그는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물….”
입 안으로 물이 넘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수통을 기울여 달라는 의미로 수통을 문 채 웅얼거렸다.
아퀼라가 여전히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때, 예고 없이 몸이 번쩍 들렸다.
누군가가 내 어깨 아래에 팔을 넣고 붙든 채 나를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갑자기 몸이 위로 쑥 올라오면서, 나는 깊은 물속에서 빠져나온 듯한 감각을 느꼈다.
고개를 돌리자 보인 건 이시나의 초록빛 머리카락이었다. 이시나는 뒤에서 내 몸을 붙든 채, 내가 두 다리로 땅에 서도록 했다.
“왜….”
“자, 따라와, 따라와. 아무래도 잠깐 격리해야겠어.”
내가 그에게 왜 이러냐고 물으려 했을 때, 그는 내 말을 끊고 조금 떨어진 곳으로 나를 이끌었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이시나의 힘에 의해 질질 끌려 걸어갔다.
아까 우리가 앉아 있던 곳과 조금 떨어진 자리에 나를 앉힌 이시나가 물었다.
“자, 사루비아. 이제 정신이 좀 드니?”
“예?”
주위를 둘러보자 나무가 빽빽한 숲, 그리고 지쳐서 얼굴을 축 늘어뜨리고 앉아 있느라 서로 무얼 하는지 관심도 없어 보이는 병사들, 마지막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이시나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숲을 담은 듯한 암녹색 눈으로 걱정스럽게 나를 살피다가, 내 입가에 자신의 손을 가져다 댔다.
…침이 묻어 나왔다.
“어…. 죄송합….”
아무래도 입가에 침을 흘릴 정도면 진짜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XX…. 체면 어쩔 거야.’
나는 이시나에게 사과하려고 했으나, 그는 굳은 얼굴로 내 입술을 문질러 닦을 뿐이었다.
“진짜 손 많이 간다.”
“예?”
“이제 제대로 보여? 이거 몇으로 보이니?”
그가 내 눈앞에 손가락 세 개를 가져다 펴며 말했다.
“…세 개입니다.”
“나는 누구고?”
“이시나 님이십니다…?”
그러자 이시나가 다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 진짜 손 많이 가….”
“예?”
“너 조금 전에 환각 봤던 거 아니?”
“…예?”
내가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를 쳐다보자, 그가 해탈한 듯한 눈으로 말했다.
“수통이 아니라 왜 남의 손가락을 물고 있었냐고….”
“…예?”
“아니, 걔가 더 문제야. 그걸 왜 빼내지도 않고 가만히 둬? 돌아가면 다시 진솔한 대화를 나눠 봐야겠다….”
“…예?”
지금까지 ‘예’만 계속 말한 탓에 흥이 난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아니, 잠깐만.
‘…분명 그거 수통으로 보였는데.’
갑자기 동기가 자신의 손가락을 물고 있으면, 아퀼라의 입장에서는 당황해서 얼어붙을 만도 했다. 아까 전 이시나와 아퀼라가 보였던 반응이 이제 이해가 갔다….
그때 다시 행군의 재개를 알리는 목소리가 들렸기에, 나는 비틀거리며 겨우 몸을 일으켰다.
이시나는 처녀 귀신처럼 늘어진 내 머리카락을 보며 기겁하더니, 나를 다시 앉혀 두고 머리를 묶어 주며 말했다.
“진짜, 진짜…. 진짜 손 많이 간다….”
* * *
“유리, 우리 소대 대원들은 다들 상태 괜찮나?”
윈터의 물음에, 숨을 헉헉대며 걷고 있던 유리가 답했다.
“어, 신병은 산체스가 챙기고 있고, 베니는 산체스가 챙기고 있고, 밀피는 산체스가 챙기고 있어.”
“…뭐라고?”
“…그러게, 나도 말하고 보니 이상하네. 그런데 진짜 그래.”
“그렇군….”
평소라면 한 사람에게 너무 많은 일을 맡겼다고 문제를 지적했을 윈터였겠지만, 왠지 산체스라면 가능할 것 같아서 그는 유리의 말에 빠르게 수긍했다.
“아, 맞다. 블레어와 토피오는 무슨 저주를 하는 수준으로 욕을 쏟아부으면서 걷고 있더라.”
“그들은 원래 그랬지…. 옳지 못한 언어 사용이지만, 그 방법이 그들에게 효율적이라면 일단 그대로 두는 게 낫다.”
윈터는 소대의 가장 선봉에서 걸어야 하는 탓에 후미에서 다른 병사들을 챙길 수가 없었다. 대신 그는 낙오자가 없는지 꼬박꼬박 확인하고 있었다.
유리는 자신이 전한 내용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다가, 한 가지 사실을 빠뜨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사루비아도 아까 환각을 보고 상태가 안 좋았다는데, 지금은 아퀼라랑 이시나가 챙기고 있어서 괜찮아.”
“이시나도 그 정도로 체력이 좋았나?”
“지친 것 같긴 한데, 왠진 모르겠지만 아퀼라에게만 맡길 수는 없다고 이를 악물더라.”
윈터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낙오된 후임들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니 상황이 나쁘지는 않았다.
유리는 하나도 힘들어 보이지 않는 윈터의 옆얼굴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걱정 안 돼?”
“뭐가 말이지?”
“사루비아가 환각을 봤다고 했잖아. 네 라인 아니었어?”
그러나 윈터는 태연한 목소리로 답했다.
“사루비아는 강하니까,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넌 사루비아를 너무 강하게 생각하는 감이 있는데.”
유리가 윈터에게 무어라 말하려던 그 순간, 뒤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우측 마물 발견!”
그들의 뒤쪽, 거대한 나무의 가지 위에서 샛노란 눈이 번뜩였다. 어두운 탓에 또렷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마물의 것이었다.
마물의 근처에 있던 상등병 엘이 총을 들려고 했으나, 그의 뒤에 있던 사람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반쯤 감겨 있던 노란 눈이 번쩍 뜨이더니, 흰 손이 빠르게 움직이며 총을 고쳐 잡았고, 남색 제복을 입은 몸이 나무를 향해 총을 겨눴다.
탕-!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반응하기도 전, 사루비아는 빠른 속도로 총을 쐈다.
이윽고 거대한 구렁이처럼 보이는 마물이 나무에서 스르르 미끄러졌다. 알타이르가 그것의 시체를 한 번 더 검으로 베었다.
유리가 사루비아의 빠른 반응에 감탄하고 있던 그때, 그녀가 예상하지 못한 내용이 옆에서 들려왔다.
“봐. 사루비아는 분명히 강하다니까.”
확신이 담겨 있는 목소리였다.
* * *
“XX, 뒤지겠다….”
“…내가 들까?”
아퀼라가 조심스럽게 내 등에 얹힌 군장을 툭툭 치며 물었다. 그러나 나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절대 그럴 수는 없어….”
알타이르를 살리겠다는 게 내 목표이기는 했지만, 나는 이 행군을 무사히 끝내야 할 이유가 그것 외에도 있었다.
유리는 저 앞에서 행군을 잘 해내고 있었다. 감마 소대의 부대원인 리사도 씩씩하게 걷고 있었다.
비록 나는 아퀼라와 이시나의 도움을 받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스스로 군장을 메고 완주해서 국경방위군에서 살아남을 만큼 강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다.
‘후임들 앞에서 지는 건 싫어.’
가오는 남주들에게만 있는 게 아니었다. 나에게도 가오란 게 존재한다.
매일 속으로 남주들의 가오가 오늘도 마이너스니 뭐니 농담하고는 하지만, 이 행군을 제대로 끝마치지 못한다면 그때는 내 가오도 마이너스가 되는 것이다.
특히 자이든을 떠올리자니 오기가 들어서,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곧 끝날 거야. 조금만 버텨….”
옆에서 이시나가 지친 목소리로 나를 격려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새까맸던 하늘은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다. 어느새 파래진 하늘을 보아 새벽이 밝아 오는 것 같았다.
나는 새벽하늘의 색을 좋아하지 않는다. 뭐 특별한 과거가 있는 건 아니고, 그게 다 경계 근무 때문이다, XX.
새벽 3시부터 6시까지 근무를 서며 새벽하늘을 보다 보면, 이 근무가 끝나면 잠도 못 자고 일과를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서 개빡치기 때문이다. 아니, XX. 또 빡치네?
어쨌든, 새벽하늘이 보이자 저절로 이가 바득 갈렸다. 이제는 하다 하다 경계 근무로 모자라서 이 시간에 행군까지 하고 있다니.
“곧 있으면 출발점으로 돌아갈 거야!”
디어가 힘주어 외쳤다. 중간에 한 번 길을 꺾어 돌았는데, 빙 돌아서 우리가 처음 출발했던 16중대에 가까워진 모양이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멀리 떨어진 곳에 16중대의 초소 중 하나가 보이기 시작한 것을 보면, 정말 도착이 가까워진 모양이었다.
‘…아직 스카퍼는 안 나왔는데.’
행군이 거의 끝나 가는데도 오히려 내 긴장감은 고조되었다.
그건 얼마 안 가 마물이 나올 거라는 의미와 같았으니까.
“아아악!”
순간,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나는 긴장을 곤두세우며 비명이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건…!”
신병 도리의 목덜미를 물고 있는 건 거대한 호랑이를 닮은 마물이었다. 마물에게 끌려가는 도리가 팔다리를 마구 버둥거리며 저항하고 있었다.
“스카퍼가 아니라, 고스트타이거가 나타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