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알타이르는 나한테 노잼 개그나 하고! 자꾸 후임들에게 열정을 강요하는! 꼰타이르 그 자체지만!
‘절대 안 돼.’
그동안 정든 꼰타이르가 죽도록 내버려 둘 생각은 전혀 없었다!
좋아, 지금까지 ‘제발 빙의물 로판 클리셰대로 남주들이 집착해 줬으면 좋겠다….’를 외치던 나. 이제 빙의물 로판 클리셰 따위는 이미 어딘가로 날아가고 말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다시 빙의물 로판 전개의 힘을 믿어 보겠다.
“최선을 다해 원작을 비틀어 주겠어.”
…와, 이렇게 말하니까 드디어 빙의물 같네. 나 이 대사 꼭 해 보고 싶었어.
‘어쨌든 꼰타이르는 내가 구한다!’
* * *
얼마 뒤, 우리는 무거운 군장과 각자의 무기를 쥔 채 16중대의 연병장에 모여 있었다.
다른 중대에는 처음 와 본 것이었는데, 우리 중대와 별 차이는 없었다. 산이 거기서 거기지, 뭐.
여기 모인 병사들은 모두 클레도어 산악대대 소속 병사들이었다.
우리 앞에 서 있는 대대장은, 오늘의 행군에 대해 짧은 격려를 하고 있었다.
물론 그는 ‘짧은 격려’라고 스스로의 입으로 말했지만, 1분마다 다크서클이 진해지던 타로의 얼굴이 이제 완전히 어두워진 것을 근거로 할 때 결코 짧은 격려는 아니었다….
물론 지금 당장 이 연병장을 탈주하고 싶은 마음을 티 낼 수는 없으므로, 나는 애써 무표정을 유지했고.
마침내 대대장이 이동을 지시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16중대! 출발!”
그의 외침과 함께 16중대부터 이동을 시작했다. 우리 중대는 18중대였으므로, 17중대의 뒤를 이어 이동하면 되는 거였다.
‘행군이 시작됐어.’
내 머릿속에 원작 윈터의 대사가 다시 떠올랐다. 원작에 대한 기억을 되찾고 나서 추가적으로 생각해 낸 것이었다.
“사루비아가… 그 마물에게 총을 쏴서 죽이는 데 성공했지만, 간발의 차이로 내 동기는 그 전에 목숨을 잃었지.”
“아, 사루비아라고 하시면 그….”
“…그래. 너도 얘기를 많이 들었나 보군. 그녀가 총을 쏴서 마물, 스카퍼의 머리를 완전히 박살 냈거든.”
원작에서 ‘사루비아’에 관해 얘기할 때 나온 대사였는데, 덕분에 그 마물이 ‘스카퍼’라는 정보라도 얻어 낼 수 있었다.
‘스카퍼라는 마물을 놓치면 안 돼.’
그리하여 나는 눈을 부릅뜨고 절대로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걷기 싫다는 표정을 한 다른 부대원들과는 대비되는 태도였다.
“오, 좋아, 사루비아~. 열정적인 자세, 좋지.”
알타이르가 쾌활하게 웃으며 내 등을 치는 바람에 좀 짜증 나긴 했지만, 나는 낙오자가 속출한다는 행군에서 무조건 제정신을 차리는 게 목표였다.
“열정적이군.”
심지어 윈터까지 그렇게 말해서 나는 윈터도 아니고 그렇게 훈련에 열정적인 사람은 아니라고 해명하고 싶어졌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보면 나만 오바하는 사람 같잖아.’
어쨌든 마침내 우리 중대도 17중대의 뒤를 따라 행군을 시작했다.
‘무조건 알타이르는 살린다.’
* * *
‘…역시 나부터 살리는 게 좋지 않을까?’
조금 뒤, 나는 완전히 녹초가 되어 있었다….
XX…. 탈영하고 싶다….
당연한 일이지만 군장은 무거웠고, 심지어 나는 검이 아니라 총을 들고 있어 남들에 비해 팔을 쓰기가 더욱 불편했다.
“허억, 허억….”
높은 오르막길을 오르니 저절로 거친 숨이 튀어나왔다.
자갈이 가득한 오르막길이라니, 최악이다. 비포장도로라니.
‘…아냐, 여기서 불평하다가 우리가 이 도로를 포장하게 될 수 있으니까 그냥 조용히 하자.’
원래 군대란 그런 곳 아니겠는가….
온몸에서 땀이 쏟아졌고, 아까까지만 해도 죽을 만큼 아프던 발은 이제 아무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 지경이 되었으며, 어깨는 아프고 다리는 무거웠다. 땀이 자꾸 눈으로 들어가는 탓에 눈이 따가웠다.
‘그나마 방탄모 같은 건 없어서 다행인가?’
아니, 하지만 불편한 제복을 입고 있다는 데에서 이러나저러나 최악이었다. 이 XX 가오충 원작 작가가 이딴 옷만 입히지 않았어도….
‘이러다 내가 먼저 뒤지겠다….’
심지어 아까부터 내가 면밀히 주시하고 있던 알타이르는 나와 달리 쌩쌩한 기색이었다. 저 인간을 내가 걱정하고 있다니 그것도 어이없는 일이었다.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닦아 내며, 나는 슬쩍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벌써 달이 떠 있었다.
‘자고 싶다….’
이놈의 행군은 총 300에드를 걸었는데, 가장 최악은 이 행군이 바로 무박 행군이라는 것이다.
즉, 아주 잠깐의 휴식 시간을 제외하자면 우리에게 취침 시간 같은 것은 주어지지 않았다.
참고로 ‘에드’는 이 세계에서 길이를 재는 단위였는데, 정확히 비교를 해 볼 순 없겠지만 내 경험상 이전 세계의 ‘킬로미터’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니 300에드 행군이라는 건 정말 끔찍한 일이다.
심지어 내 베타 소대의 동기 블루는 300에드가 그나마 나은 편이라고 말했는데, 옛날에는 400에드 행군을 했다고 자신의 선임들이 말했다고 한다.
“잠깐 휴식!”
이제 누구의 것인지 구분도 되지 않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루비아, 괜찮니?”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이시나의 말에 대답하고, 이제 좀 휴식을 취해 보려고 했으나….
“다시 출발한다! 16중대! 18중대 뒤로 자리 교대해!”
분명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도 출발을 알리는 목소리가 들려왔기에, 나는 이제 울먹이기까지 하는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16중대의 병사들도 마찬가지로 금방이라도 뒤질 것 같은 눈빛으로 우리의 뒤쪽으로 이동했다. 번갈아 가며 중대 병사들의 자리를 바꾸는 것은 제일 뒤쪽에 있는 중대가 뒤처지기 쉽고 체력이 많이 소모되기 때문이었다.
“거기 아니고, 이쪽.”
아퀼라가 내 몸을 밀어 내 자리를 찾아 주었다.
“아, 고마워….”
이제 입에서는 다 뭉개진 발음이 튀어나왔다. 이미 체력을 바닥까지 긁어모아서, 더 이상 짜낼 힘도 없었다.
다시 행군을 시작하자, 이제는 잠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다리 끌면서 걸으면 더 힘들어.”
“예….”
나는 이시나의 말에 웅얼웅얼 대답하며 계속 걸음을 옮겼다. 그 와중에도 졸음이 밀려와서 눈꺼풀이 감겼다.
“사루비아.”
“어?”
아퀼라가 부르는 목소리에 대답한 나는, 순간 내 눈앞의 풍경이 바뀌었음을 깨달았다.
…이상하다, 뭔가… 뭔가 갑자기 풍경이 바뀌었….
“사루비아.”
“어.”
…다시 눈앞이 바뀌어 있었다.
‘뭐지?’
꼭 텔레포트를 한 듯한 기분이었다. 그래, 여기는 로판 세계니까 텔레포트 정도야 충분히 할 수 있지…. 그런데 내가 지금 텔레포트를 왜 하….
“아.”
다시 눈앞의 풍경이 달라져 있었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나, 지금 졸면서 걷고 있었구….
“…아.”
또 새로운 풍경이었다.
아무래도… 알타이르를 살리기보다는… 나부터 살아야 할 것 같….
‘여긴 또 어디야….’
큰일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 지금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 * *
정신이 몽롱했다. 힘들거나 몸이 아프기보다도, 잠이 밀려오는 탓에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기계처럼 걷다가 정신을 차려 보면 시야가 확확 바뀌어 있었다.
‘알타이르를….’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그를 지켜봐야 한다는 건 알지만, 이건 정신력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괜찮으십니까?”
“응….”
나는 누구인지도 모르는 목소리에 그렇게 대답했다가, 나중에야 그 목소리의 주인이 카론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카론, 너는 괜찮니?”라고 묻기에는 이미 시간이 너무 지났다….
잠깐 들은 카론의 목소리는 나와 달리 쌩쌩한 기색이었는데, 역시 원작 남주4답게 신체 능력이 남다른 모양이었다.
하긴, 원작에서 제일 힘이 세다고 묘사된 것도 카론이었다.
‘쟤는 대체 활동량이 얼마나 되는 거지.’
나는 평소에 내 관심을 구걸하느라 어수선하게 구는 그가 얌전해지려면 얼마나 많은 활동량이 필요할지 생각하다가, 어쩐지 그를 인간 취급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만두었다.
“XX, 뒤지겠네….”
갑자기 확 힘들어져서, 나는 반사적으로 입 밖으로 욕을 내뱉었다. 욕을 하니깐 슬슬 정신이 드는 것도 같았다.
“좀 괜찮으십니까?”
고개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며 걷던 나는, 마침내 그 사실을 인정하도록 했다.
“카론….”
“예?”
“난 글렀어….”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제는 인정해야 할 것 같아….”
카론이 의문을 담은 눈으로 나를 보았고, 내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욕하면서 일해야 덜 힘든가 봐….”
“아하.”
“85기 분들이 그렇게 말씀하셨을 때 헛소리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그분들이랑 똑같다니….”
XX, 내가 인성 파탄 85기랑 같이 ‘욕을 해야 덜 힘들다.’라는 공통분모가 있다니, 믿을 수가 없다. 내가 그 사람들이랑 닮았을 리가 없다고!
“XX, 뒤지겠다!”
그러나 그렇게 외친 순간, 유감스럽게도 나는 정말로 피로가 조금 가시는 것을 느꼈다….
XX, 그래…. 내면의 욕망을 받아들이고 진정한 자아를 수용하도록 하자….
“흐흑, XX, 언제 끝나?”
“하하, 깜짝 놀랐는데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지 말입니다.”
자괴감에 빠진 나와 달리 카론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평소의 사루비아 님과 다르신 것 없지 말입니다.”
“XX…. 그럴 리 없어….”
원래부터 남들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내가 한참 자괴감에 빠져 욕을 중얼거리며 걷고 있을 때, 갑자기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 집이다!”
모두가 놀란 얼굴로 목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몽롱한 상태였던 나도 갑자기 잠이 확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그곳에는 다른 소대의 병사가 행복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는데, 나무밖에 없던 숲 너머를 바라보던 그가 갑자기 달려가려 했다.
“어어, 안 돼! 잡아!”
“안 돼!”
주변의 선임들이 달라붙어 그의 몸을 잡았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발버둥을 치며 “집이 있습니다!”를 외칠 뿐이었다.
“…뭐, 뭐지?”
이게 언제 갑자기 호러 오컬트 로판으로 바뀐 거지?
카론과 내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을 때, 우리의 앞에서 걷던 타로가 고개를 슥 돌려 말했다.
“환각을 보는 거야.”
“환각… 말씀이십니까…?”
평소에 별로 대화도 해 보지 않은 그가 갑자기 말을 걸었기에 내가 당황하여 조심스럽게 물었으나,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태도로 설명했다.
“추워지고 졸려지고 탈수가 오면… 저렇게 환각을 보고 환청을 듣는 것 정도야 흔한 일이지.”
“아….”
행군이 그렇게 위험한 거였다고?
도대체 나는 왜 이 미친 세계에 빙의해서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거지?
“황태자님 방문 사건 때… 나도 환각을 경험했었지….
내가 이 세계에 다시 한번 분노를 표출하고 있을 때, 타로는 그렇게 말하더니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말을 하는 것도 귀찮다는 듯 그는 이제 발음을 씹어 가며 발음하고 있었다.
‘정말 불쌍하다….’
황태자 습격 사건 이후 타로는 늘 피곤해 보이는 상태였는데, 역시 그 사건이 만악의 근원이었구나…. 새로운 부대에 오자마자 얼마나 힘들었으면 사람이 저렇게 폭삭 늙는담.
황태자는 쿨톤이라 단두대의 은색 날이 참 잘 어울릴 텐데…. 언젠가 황태자에게 혁명의 맛을 꼭 보여 줄 수 있으면 좋겠다.